본문은 구어체로 작성된 리뷰 방송 대본을 AI를 활용하여 다듬은 글입니다.
얼마 전, 영화제에 다녀온 지인이 입에 침을 마르도록 추천한 작품이 하나 있었습니다. 국내에 정식 개봉하면 무슨 일이 있어도 무조건 극장에 가서 보라며 호들갑을 떨더군요. 대체 어떤 영화이기에 저러나 싶은 호기심이 일었습니다. 그래서 개봉 첫날 바로 예매를 하고 극장으로 향했죠. 상영 회차가 워낙 적게 배정된 탓에 어쩔 수 없이 저녁 식사 시간까지 포기하며 상영관에 들어가야 했습니다.
빈속이라 배가 고파서 팝콘을 큰 통으로 사 들고 자리에 앉았는데, 영화가 시작되고 나서 상영관을 빠져나올 때까지 단 한 번도 그 팝콘에 손을 대지 못했습니다. 숨소리조차 내기 힘든 압도적인 몰입감 때문이었죠. 러닝타임이 모두 끝나고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며 조명이 켜졌을 때도, 상영관 안의 관객 중 누구 하나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오늘 여러분과 나눌 영화는 카우타르 벤 하니야 감독의 <힌드의 목소리> 입니다. 제82회 베니스 국제영화제에서 심사위원대상인 은사자상을 거머쥐었고, 베니스 영화제 역사상 전례가 없는 23분이라는 최장 시간 기립박수를 이끌어낸 바로 그 영화입니다.
작품의 배경은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전쟁이 참혹하게 이어지던 2024년 1월 29일입니다. 팔레스타인에는 적신월 사라는 민간단체가 있는데, 쉽게 말해 우리의 119와 같은 역할을 하는 구조 콜센터입니다. 민간인 피해자로부터 다급한 신고가 들어오면 현장으로 구조대원을 파견하는 시스템을 갖추고 있죠. 영화는 이 콜센터라는 공간 안에서 벌어지는 숨 막히는 시간들을 따라갑니다.
어느 날 이 콜센터에 힌드 라잡이라는 여섯 살짜리 꼬마 아이의 전화가 걸려옵니다. 가자지구 북부에 대피 명령이 떨어져 삼촌네 가족과 다 같이 차를 타고 황급히 피난을 가던 중, 그 차가 무차별적인 총격을 받고 만 것입니다. 피가 낭자한 참혹한 차 안에서 오직 6살 힌드 혼자만 살아남은 상황. 아이가 있는 곳까지 구급차가 달려가는 데 걸리는 시간은 딱 8분 거리였습니다. 영화는 이 전화를 받은 오마르를 비롯한 콜센터 직원들이 어떻게든 아이를 살려내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그야말로 피가 마르는 절망의 현장을 관객에게 고스란히 체험하게 만듭니다.
청각으로 빚어낸 지독한 공포
본격적인 이야기에 앞서, 지금부터는 영화의 핵심적인 내용이 포함되어 있으니 가급적 영화를 관람하신 뒤에 제 글을 읽어주시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이 영화는 세상에 나오게 된 출발점부터가 남다릅니다. 다큐멘터리와 극영화를 오가며 독보적인 작업 방식을 구축해 온 카우타르 벤 하니야 감독이, 어느 날 SNS에서 우연히 힌드의 실제 통화 녹음본을 듣게 된 것이 모든 것의 시작이었습니다. 감독은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이 비극을 영화로 만들어내면 전 세계가 다시 귀를 기울일지도 모른다는 확신을 가졌다고 합니다. 곧바로 힌드의 어머니를 찾아가 설득하고 팔레스타인 적신월 사의 협조를 이끌어내는 힘든 과정을 거쳤죠. 이 의미 있는 행보에 브래드 피트, 호아킨 피닉스, 알폰소 쿠아론, 조나단 글레이저 같은 할리우드의 세계적인 거장과 배우들이 뜻을 모아 지지를 보내면서 마침내 이 영화가 빛을 볼 수 있었습니다.
영화를 보며 가장 소름이 돋았던 부분은, 전쟁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러닝타임 내내 전투 씬이나 피가 튀는 시각적인 잔혹함이 단 한 컷도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제가 평생 보아온 그 어떤 전쟁 영화보다 반전의 메시지가 가장 강렬하고 끔찍하게 다가왔습니다.
그 비결은 감독이 선택한 독특한 형식에 있습니다. 놀랍게도 영화는 힌드와 콜센터 직원들이 실제로 통화했던 70분짜리 녹음 원본을 가공도 없이 그대로 사용했습니다. 화면에는 힌드가 등장하지 않습니다. 스크린에는 오직 통화 음파 그래프만 요동치고, 그 위로 힌드의 실제 목소리가 덮입니다. 심지어 콜센터 직원 역을 맡은 배우들 역시 연기라는 작위성을 지워내기 위해, 촬영 내내 귀에 인이어를 꽂고 실제 힌드의 음성을 실시간으로 들으며 반응했다고 하더군요. 극 중 스마트폰으로 촬영하는 화면 너머로 당시 실제 직원들의 영상이 교차 편집되기도 하는데, 이 모든 연출이 만들어내는 심리적인 압박감은 정말 상상을 초월합니다.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아이의 거친 숨소리, 불규칙하게 고막을 찢는 총성, 그리고 보이지 않는 공포 속에서 벌벌 떨며 살려달라 애원하는 여섯 살 아이의 목소리. 눈앞에 직접 보이는 시각적인 잔인함보다, 청각에만 의존해 머릿속으로 그려내야 하는 보이지 않는 공포가 할리우드의 거대한 스펙터클보다 수백 배는 더 무겁게 관객을 짓누릅니다. 영화를 보는 내내 어릴 적 읽었던 안네의 일기가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참혹한 홀로코스트 현장을 직접 묘사하지 않고, 은신처에 갇힌 한 소녀의 목소리와 개인적인 기록만으로 시대의 비극을 증언해 냈다는 점에서 무척이나 닮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절차와 원칙 뒤에 숨겨진 구조대원들의 무게
작품 속에서 제 숨을 턱 막히게 했던 두 가지 장면을 꼽고 싶습니다.
첫 번째는 적신월사 콜센터의 리더 격인 마흐디라는 인물이 짊어진 딜레마입니다. 마흐디는 신고가 접수되면 외부 기관에 협조를 구하고 구조 파견을 조율하는 실무 총괄을 맡고 있습니다. 힌드의 구조 요청이 떨어지고 나서, 오마르나 라나 같은 동료 직원들은 불과 8분 거리에 있는 구급차를 당장 보내야 한다며 핏대를 세웁니다. 하지만 마흐디는 군과의 협의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며, 모든 절차가 완료될 때까지 무조건 기다려야 한다고 고집을 부립니다. 1분 1초가 피를 말리는 긴박한 상황이다 보니, 스크린 밖의 관객 역시 오마르의 심정에 완벽하게 이입되어 꽉 막힌 절차만 따지는 마흐디가 답답하고 원망스러워지죠.
하지만 극이 진행되다 어느 순간, 마흐디가 구조대원들의 사진이 빼곡하게 붙어있는 종이 한 장을 오마르에게 조용히 내미는 장면이 나옵니다. 알고 보니 그 사진 속 얼굴들은 모두 과거에 민간인을 구하러 나갔다가 참혹하게 희생당한 동료들이었던 겁니다. 마흐디는 생명의 무게를 모르는 냉혈한 원칙주의자가 아니었습니다. 그저 또 다른 내 동료들이 사지로 뛰어들어 죽음당하는 것만은 어떻게든 막아보려고, 속이 새카맣게 타들어 가는 걸 억누르며 필사적으로 절차를 지켜내려 했던 리더였던 것이죠.
결국 우여곡절 끝에 군의 승인이 떨어지고 구조 대원들이 현장으로 출동하지만, 그 길고 끔찍했던 기다림이 한순간에 허망한 잿더미로 변해버리는 비극이 발생하고 맙니다. 이 영화가 단지 힌드라는 어린 생명 하나에만 매몰되지 않고, 그 아이를 구하려다 산화한 구조대원들의 입장까지 입체적으로 담아냈다는 점이 여운을 남겼습니다. 절차를 지키고 모든 허가를 받아냈음에도 불구하고 기어코 공격의 표적이 되어버리는 무법천지의 현실. 그 모순이야말로 이 영화의 반전 메시지를 피 토하듯 쏟아내는 가장 강력한 장치로 작동하고 있었습니다.
총싸움 게임, 그 서글픈 대비
두 번째로 인상 깊었던 명장면은 오마르와 마흐디가 격렬하게 충돌한 직후에 등장합니다. 감정을 추스르지 못한 마흐디가 화장실로 혼자 몸을 숨기자, 잠시 뒤 오마르가 그를 찾아갑니다. 그리고 닫힌 화장실 문짝 하나를 사이에 두고 두 남자가 각자의 스마트폰으로 게임을 같이 하는 다소 엉뚱한 장면이 이어지죠.
수화기 밖에서는 진짜 총알이 빗발치고 살려달라는 아이의 울음소리가 메아리치는데, 정작 이들은 그들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 미쳐버릴 것만 같은 숨 막히는 무력감을 도저히 맨정신으로 견딜 수가 없어서, 잠깐이라도 잔혹한 현실에서 도망쳐 멘탈을 붙잡아보려는 발버둥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게임 소리에 귀를 기울여보니, 이들이 화장실 바닥에 주저앉아 하고 있는 것이 다름 아닌 총을 쏘는 FPS 전쟁 게임이었습니다. 방금 전까지 현실 전쟁의 참혹함 앞에서 치를 떨고 눈물을 흘리던 사람들이, 화장실 문에 기대앉아 총싸움 게임을 즐기고 있다니. 처음에는 이 기괴한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아 어리둥절했습니다.
하지만 곱씹어 보니 그 이유가 슬프게 다가왔습니다. 게임 속의 전쟁은 적어도 내가 상황을 온전히 통제할 수 있는 세계입니다. 반면에 지금 밖에서 실시간으로 벌어지는 현실의 비극은, 본인들의 의지로는 티끌만 한 영향력조차 행사할 수 없는 통제권 상실의 상태인 것이죠. 그 무력감의 늪에서, 아주 잠시나마 자신들이 통제할 수 있는 가짜 세계로 도망쳐 숨을 골랐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쪽에서는 실제 전쟁으로 누군가의 숨통이 끊어지고 있는데, 다른 한쪽에서는 그 전쟁을 모티브로 한 게임을 소비하며 위안을 얻어야 하는 이 기묘한 대비. 자신들이 현재 얼마나 무력한 존재인지를 더 날카롭게 후벼파는 은유였습니다.
숫자로 지워지지 않을 이름
제목이 가진 의미를 다시 짚어보게 됩니다. 우리는 일상에서 뉴스로 전쟁 소식을 접할 때, '민간인 수백 명 사망'과 같은 문장을 통해 희생자들을 숫자로 퉁쳐버리곤 합니다. 그런데 이 영화가 제목의 정중앙에 '힌드'라는 사람의 이름을 넣은 것은, 그 숫자 속에 가려진 이들이 각자의 이름을 가졌던, 실제로 우리 곁에 존재했던 사람들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 달라는 호소일 것입니다. 동시에 힌드의 목소리는 지금 이 순간에도 포탄의 굉음 속에서 묻혀가고 있을, 지구상 모든 아이들의 살려달라는 외침으로 그 의미가 확장됩니다.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전쟁을 소재로 했다는 점 때문에 혹시라도 어느 한쪽의 정치적 프로파간다가 아닐까 경계하시는 분들도 계실 겁니다. 저 역시 극장에 들어가기 전에는 그런 우려를 했으니까요. 하지만 이 영화는 특정 이념을 편들거나 전쟁의 시시비비를 가리는 데는 관심이 없습니다. 누가 먼저 총을 들었든, 평범하게 일상을 살아가던 무고한 민간인들에게 대체 무슨 죄가 있겠습니까. 영화는 그저 살려달라는 어린아이의 호소와, 그 작은 생명 하나를 구하지 못해 발버둥 치는 자원봉사자들의 절망감에만 카메라를 맞춥니다. 전쟁이라는 거대한 시스템이 어떻게 연약한 생명들을 일방적으로 파괴하는지 고발하는 것. 어떤 대단한 명분으로도 전쟁은 정당화될 수 없으며 무고한 민간인의 희생은 막아야 한다는 가장 원론적인 상식. 그것이 바로 반전주의의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영화를 보는 내내 예전 미국과 이란의 전쟁 사태 뉴스를 지켜보며 수첩에 끄적여 두었던 메모들이 머릿속을 맴돌았습니다. 이란 남부의 한 여자 초등학교가 공습을 맞아 수업을 듣던 200명이 넘는 어린아이들이 한순간에 목숨을 잃었던 일. 전쟁 발발 불과 나흘 만에 민간인 사망자가 1,000명을 훌쩍 넘어섰고, 중동 전역으로 범위를 넓히면 3,000명 이상이 희생됐다는 끔찍한 추산이 나왔던 일들 말입니다. 불과 한 달 사이에 의료시설 20여 곳이 집중적으로 공격을 받았고, 생명을 살려야 할 응급실이 먼저 무너져 내리면서 직접적인 폭격을 맞지 않은 사람들조차 서서히 죽음으로 내몰리는 참담한 상황이 되어버렸죠.
학교에서 수업을 듣는 아이들이 죽어선 안 된다.
다친 사람을 치료하는 병원은 어떠한 이유로도 공격받아선 안 된다.
인류라면 당연히 지켜야 할 최소한의 룰조차 지켜지지 않는 야만의 시대. 가자지구든 이란이든 혹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그 어딘가든, 장소와 시간표만 바뀔 뿐 어른들의 욕심이 일으킨 참상의 대가는 늘 가장 연약하고 힘없는 존재들이 치러내고 있습니다.
감독 역시 한 인터뷰에서 고백을 남겼더군요. 이 영화를 기획하고 촬영하는 그 긴 시간 동안에도, 뉴스에서는 또 다른 수많은 힌드 라잡들의 죽음이 매일같이 보도되었다고요. 결국 스크린 속 콜센터 직원들이 느껴야 했던 그 무력함은 곧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의 무력함이기도 합니다.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걸 알면서도 어쩌지 못하는 그 절망감이, 소파에 앉아 뉴스로만 참상을 지켜볼 수밖에 없는 우리의 얼굴과 포개집니다. 그리고 영화는 관객을 그저 울리기만 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더 이상 방관자로 숨어있지 말라는 돌멩이를 우리 마음속에 던져 넣습니다.
가벼운 마음으로 즐길 수 있는 영화는 절대 아닙니다. 하지만 매일같이 쏟아지는 자극적인 비극에 나도 모르게 마음의 굳은살이 박였다는 생각이 드신다면, 이 영화가 여러분의 굳어버린 감각을 툭 하고 깨워주는 강렬한 경험이 될 것입니다. 상영관이 턱없이 부족해 발품을 파셔야 하는 수고로움이 따르겠지만, 기회가 허락한다면 극장이라는 공간에서 꼭 이 먹먹한 외침을 마주해 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혹시라도 이 영화를 관람하게 되신다면 여러분은 어떤 감정을 느끼셨는지 댓글로 남겨주세요. 저도 하나하나 읽어보며 배우고 채워나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