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I

펭귄, 심리학, 그리고 우화

by 지온

펭귄, 심리학, 우화

내가 좋아하는 세 가지다.


펭귄, 집단적이면서도 고독한 생명체.

나는 펭귄을 볼 때마다 그런 느낌을 받는다.

내가 펭귄을 그리기 시작한 건 벌써 8년 전이다.


그때의 나는 꽤 우울했다.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것 같았고, 아무도 나를 좋아하지 않을 거란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비가 엄청 내리던 어느 날, 집 안에만 있기엔 숨이 막혀 우산을 들고 무작정 밖으로 나섰다. 그러다 홀린 듯 동네 서점 안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책들을 이리저리 둘러보던 중, 우연히 남극에서 직접 찍은 펭귄 사진을 모은 책이 눈에 들어왔다. 나도 모르게 그 책을 집어 들고 사진과 글을 넘겨보기 시작했다.


그러다 한 장의 사진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무리에서 살짝 떨어져, 혼자 고개를 숙이고 있는 새끼 황제 펭귄 사진이었다. 그 새끼 펭귄이 꼭 나처럼 느껴졌다. 마음속에서 울림이 느껴지고,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문득 펭귄을 그리고 싶어졌다.


지금 와서 그때의 마음을 돌아보자면, 아마도 나는 그 펭귄에게서 내 모습을 본 것이고, 누구에게도 알리지 못했던 내 마음을 그림으로라도 표현해보고 싶었던 것 같다.


그날 나는 사진집과 함께 샤프와 지우개, 그리고 그림 노트를 사 들고 나왔다. 그리고 그 책 속의 다양한 새끼 펭귄들을 따라 그리기 시작했다.


그러다 다양한 종류의 펭귄을 그리기 시작했고, 나름 잘 그리기 시작했으며, 펭귄도 더 좋아졌다.

내 마음도 점차 나아지기 시작했다.


심리학, 애증의 학문.

나는 학부 시절 심리학을 전공했고, 현재는 대학원에서 상담학을 전공하고 있다. 내가 좋아하는 심리학은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내가 수련 중인 상담과 관련된 심리학에 국한된다.


사실 심리학은 매우 방대한 학문이다. 발달, 사회, 인지 등 다양한 하위 분야가 있다. 사람들은 흔히 심리학을 ‘낙인 효과’나 ‘피그말리온 효과’처럼 인간의 행동과 마음이 작동하는 원리를 공부하는 학문으로 떠올리곤 한다. 나 역시 그렇게 기대했다.


그 기대는 학부 1학년 때 듣게 된 ‘심리학개론’ 수업에서 당혹감과 좌절로 바뀌었다. 시냅스, 뉴런, 교감신경계, 부교감신경계... 잘 이해도 안되는 뇌과학 개념들이 줄줄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나는 고등학교 때 문과였지만, 이과 과목을 싫어하진 않았다. 오히려 흥미로워했다.

다만 ‘생명과학’ 과목만은 정말 지독히도 싫어했다.

그런데 대학교에 입학하자마자 그 싫어했던 생명과학 관련 개념들을 다시 마주해야 했으니 절망스러웠다.


그런데 더 큰 좌절은 따로 있었다.

평소에 꾸준히 공부하고, 시험 날이면 잠까지 줄여가며 공부했음에도 시험 직전 날에 벼락치기로 공부한 동기들보다 시험 성적이 현저히 낮았던 것이다.

그 일이 몇 번 반복되자, 나는 점점 동기(더 나아가 심리학 전공생)들을 ‘이기지 못하는 괴물’로, 나 자신을 ‘하찮은 존재’로 여기기 시작했다.


결국 나는 심리학으로부터 도망치기를 선택했다.

전공 과목을 피하고, 심리학을 제외한 교양 수업만 주로 들었다. 동기들과도 자연스럽게 거리를 두게 되었고, 그들과의 관계는 점점 소원해졌다.

이러한 것들이, 앞서 말했던 우울감의 원인 중 하나였을 것이다.


그러나 언젠가는 졸업을 해야 하는 법. 졸업을 위해서는 전공 학점을 채워야 했다.

2학년을 마친 후, 그동안 수강한 과목들의 목록과 성적표를 들여다보며 위기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전공 과목의 성적은 처참했고, 남은 필수 과목들도 많았다.

무엇보다 진로를 정하지 못한 상태였다. 취업을 할지, 대학원을 갈지,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았다.

전공 성적을 보면 둘 다 쉽지 않아 보였다.


그러나 다행히도 군 입대를 위해 약 3년의 휴학이 예정되어 있었다.

나는 이 시간을 심리학을 처음부터, 내 속도로 다시 공부하는 기회로 삼았다.

첫 1년 동안은, 1학년 때 덮어버렸던 ‘심리학개론’ 책을 다시 꺼내 소설 읽듯 가볍게 처음부터 읽었다.

그 과정에서 나와 맞지 않는 심리학 분야들을 하나씩 소거할 수 있었다.

끝에 남은 것이 바로 ‘상담심리학’이었다.

그 분야만 따로 다시 몇 차례 읽었고,

그때부터 상담이라는 진로에 흥미를 느끼기 시작했다.


그 다음으로 읽은 책은 우연히 발견한 톰 버틀러 보던의 '내 인생의 탐나는 심리학 50'이었다.

이 책은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 올리버 색스의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 등 심리학사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저서 50권을 간략히 소개하는 책이었다.


이 책은 나에게 정말 큰 도움이 되었다.

심리학의 발달 흐름을 자연스럽게 익힐 수 있었고,

무엇보다 ‘나도 심리학을 이해할 수 있겠다’는

작은 자신감을 얻게 되었다.


나는 그 자신감을 무기삼아 조금 무식한 방법을 선택했다. 책에 소개된 50권의 심리학 고전들을 실제로 모두 읽아보기로 결심한 것이다.

결론적으로는 군 복무가 끝날 즈음까지

읽은 책은 45권에 그쳤지만,

그만큼 심리학이라는 분야에 대한 자신감이 붙었다.


이 자신감을 바탕으로, 제대 후 복학 전까지 남은 반년 동안에는 남은 4학기 내에 수강해야 하는 전공 과목들을 정리하고, 관련된 개론서와 상담 이론서를 미리 공부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보니 개강이 기다려졌다.


그 이후의 흐름은 간단하다.

복학 후에는 전공 과목에서 꾸준히 높은 성적을 받았고(졸업 무렵에는 평점 4.5 만점에 4.3 정도였다),

예전처럼 심리학 전공생들을 괴물처럼 바라보지 않게 되었다.

결과적으로는 장학금과 함께 상담학 전공의 대학원 진학으로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내게 심리학이라는 것은

‘나의 속도대로 한다면 나는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이제는 나의 미래와도 깊이 연결된 학문이다.


우화, 왠지 모르게 매력적인 이야기.

아마도 대학원 진학 전까지 심리학 관련 어려운 책만 파고든 반동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대학원에 입학한 나는, 문득 쉬운 책이 읽고 싶어졌다.


반년 전 광화문 교보문고를 둘러보던 어느 날,

갑자기 떠오른 책이 있었다.

바로 '이솝우화'였다.

어릴 적 재미있게 읽었던 이솝우화를 지금 다시 읽으면 어떤 느낌일지 궁금해졌다.


나는 바로 이솝우화를 찾아 서가를 살폈다.

책장 맨 꼭대기에 모여 있는 번역본들의 두께를 보고 살짝 당황했다. 생각보다 꽤 두꺼웠기 때문이다.


그 자리에서 스마트폰으로 각 번역본을 비교하기 시작했고, 결국 아서 래컴의 일러스트가 포함된 전집 하나를 골랐다.

그리스어 원전을 완역했다고 강조하는 책이었다.


그 길로 책을 구입해 나왔고,

한 달에 걸쳐 머리 아플 때 달달한 간식을 먹듯 조금씩 전집을 완독했다.


다시 읽은 이솝우화는 어린 시절의 기억과는 꽤 달랐다. 어릴 때 읽었던 이솝우화는 대부분 각색된 버전이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성인이 되어 읽은 이솝우화는 훨씬 더 차갑고, 현실적이었다.


어릴 적의 우화가 ‘착한 행동 방식’을 알려주는 도덕 교훈 같은 느낌이었다면,원전에 가까운 우화는 독자에게 ‘현명한 행동 방식’에 대해 스스로 생각해보게 만든다는 인상을 주었다.


짧은 문장 몇 줄로 나의 마음과 행동, 선택을 돌아보게 만든다는 점에서 우화는 참 매력적이었다.

그래서 상담에서도 우화를 활용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를 찾아온 누군가에게 그의 고민과 닮은 우화를 들려줌으로써 그 사람이 자신의 문제를 제3자의 시선으로 다시 바라볼 수 있도록 도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이 생각을 계기로 나는 실제로 우화를 활용하는 심리극 세미나에 참여해보기도 했고, 상담 실습 현장에서는 즉석에서 떠오른 우화나 비유를 내담자에게 들려주기도 했다.

모든 상담 장면에서 우화를 활용하는 것은 아니지만

사용할 때마다 우화는 내담자와 조금 더 가볍고 재미있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도록 도와주는 장치가 되었다.

그리고 나만의 우화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아무튼 펭귄, 심리학, 그리고 우화

이 세 가지가 내게는 나름의 의미 있는 요소라는 것을 길게 풀어 이야기했다.


이 세 가지를 한데 엮어,

하나의 무언가를 완성해나가겠다고 결심하게 될 줄 나 자신도 예상하지 못했다.


하지만 내 곁에는 그런 도전을 응원하고 촉진해준 고마운 한 분이 계셨다. 그 분은 내게 실존상담과 삶의 변화에 대해 가르쳐주시는 스승이다. 스승의 격려를 발판 삼아 시작된 이 여정이 끝까지 이어지기를 바란다.

나는, 조금씩 조금씩 이 책을 완성해보려 한다.


아무튼 이 글을 읽게 될 여러분들은

나를 격려해주고 환대해주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