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관계:트라우마의 시작 (호랑나비)

by 새하

“아싸! 호랑나비.”

김흥국 아저씨의 등장은 나에게는 그 등장만으로 충격 그 이상 경악에 가까웠다.

얼굴에 콧수염을 기르고 넘어질 듯 안 넘어지며 마치 술에 취한 아저씨가 비틀거리는 듯한 이상한 춤을 추며 노래를 하는 그 기괴한 모습은 그동안 TV에서는 볼 수 없었던 진기명기 그 자체였다.

‘와 무슨 저런 가수가 있지?’

그렇지만 다음날 교실문을 여는 순간 깨달았다. 그 콧수염 아저씨는 벼락 스타가 되었다는 것을.

교실의 앞 뒤 빈 공간을 가득 메운 친구들이 “아싸 호랑나비.”를 외치며 이리 비틀 저리 비틀 아슬아슬한 춤을 추고 있는 것이었다.


거리에는 온통 호랑나비 노래가 흘러나왔고 콧수염 아저씨의 비틀 거리는 춤사위는 거의 바닥에 닿을 듯 말 듯 저러다 진짜 넘어지지 싶을 만큼 날이 갈수록 과해졌다.


그 무렵 나는 5년을 다녔던 학교에서 친구 하나 없는 다른 학교로 전학을 가게 되었고 그 시기는 내 어린 시절을 통틀어 가장 우울하고 힘든 시기였던 걸로 기억한다. 새로운 학교에서 친구를 만들기란 쉽지 않았다. 이미 5년을 함께 지낸 친구들 사이에 갑자기 나타난 전학생이 끼어들어 갈 틈은 없었다.

어릴 적부터 욕심이 많아 뭐든 적극적이었고 인기도 많아 늘 주변에 친구가 많았던 나는 전학과 함께 점차 내성적이고 소심한 아이로 변해갔고 조용히 학교와 집을 오가며 빨리 시간이 흘러가기만 기다렸던 것 같다.


그날 아침은 교실 문을 여는 순간 앞 뒤를 가득 메운 호랑나비 군단들 사이로 내 짝이 보였다. 짝이 된 지 꽤 됐는데도 나에게 말을 걸 때면 얼굴을 붉히며 낯을 가리는 얌전한 친구인데 무슨 일 인지 그날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비틀비틀 우스꽝스러운 춤을 추고 있는 것이다. 나와 눈이 마주친 친구는

“너 호랑나비 알아? 이 춤 진짜 웃기지?” 하며 나에게 오라고 손짓을 하는 것이다. 나는 그냥 고개를 좌우로 흔들고 멋쩍게 웃으며 내 자리로 가 앉았다.

“너 진짜 호랑나비 몰라?” 자리로 돌아온 친구는 의아하다는 듯 내게 물었다.

어떻게 모를 수가 있겠나. 전 국민이 다 알 텐데..

“본 적은 있는데 잘 몰라.”

나는 혹시라도 아는 척을 하면 같이 춤이라도 추자고 할 것 같아 슬쩍 발을 빼며 잘 모르는 척을 했다.


그렇게 말을 하기 시작한 짝은 전학 온 학교의 내 첫 번째 친구가 되었고 그 친구와 새로운 학교의 적응을 잘해가고 있던 어느 날 그 일이 터져버렸다.

그 일은 내가 크면서 내내 친구 사귀는데 트라우마로 작용할 만큼 어린 나에게는 너무 큰일이었고 어쩌면 사람에 대한 불신의 시작이 되는 사건이었다.

그때 우리 삼촌은 일본 유학생이었다. 종종 일본의 예쁜 학용품들을 조카들에게 보내주곤 했고 우리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다양하고 예쁜 일제 학용품들이 내 필통에는 늘 가득했다.

그중에서도 특히 내가 아끼는 펜이 하나 있었다. 펜촉이 많이 얇고 잉크가 진해서 글을 쓰면 어떤 글씨도 예쁘게 보이는 내 딴에는 마법의 펜이었다.

닳을까 아까워 잘 쓰지도 못하고 아껴 쓰던 것이었는데 그게 없어졌다.

친구가 많지도 않아 하소연할 곳도 없었고 펜하나 잃어버린 걸로 전학 온 지 얼마 안 된 학생이 선생님께 말씀드리기는 더더욱 힘들었다.


그렇게 속앓이만 하던 어느 날 친구는 자기 필통을 열어 새로 산 펜이라며 나에게 펜 하나를 보여줬고 놀랍게도 그 펜은 내가 그토록 찾던 내 펜과 같은 것이었다.

“그거 어디서 샀어?” 나는 조심스럽게 물어봤고

“우리 아빠가 어제 주셨어.” 친구는 내게 자랑하듯 말했고 나는 너무 황당하고 기가 막혀 더 이상 말을 할 수 없었다.

그 펜이 그 친구 아빠가 준 펜이라는 건 100% 거짓말이다. 왜냐하면 내가 그 펜 꼭지에 붙여 놓았던 스티커가 너무 내 것이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 스티커까지 친구 아빠가 사준 것이었을 수도 있다. 그냥 그렇게 생각하는 게 더 마음이 편했던 것 같다. 펜 하나로 겨우 사귀었던 친구를 잃을 수는 없는 것이었으니까.


그렇지만 내가 친구를 잃을까 무서워 아무 말 못 하고 있을 때 그 친구는 그 펜은 원래 자기 것이었는데 내가 가져갔다는 어이없는 소문을 내기 시작했다. 심지어 나는 그 펜에 대해 누구에게도 말을 한 적이 없었는데 말이다.

그때 우리 반 누구도 내가 아니라고 하는 말을 믿지 않는 눈치였다. 그 뒤 어떤 결론을 맞았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며칠을 집에서 울었고 소식을 들은 삼촌이 박스로 보내주셨던 일제 학용품을 거들떠도 보지 않고 내던져 놨던 기억이 난다.


그 일이 있고 친구를 사귀는 일이 쉽지 않았던 것 같다. 고등학생이 되어서야 마음을 다 열 수 있는 좋은 친구를 만나게 되었지만 어린 시절 그 사건은 아직도 처음 만나는 사람에 대한 경계심이 다른 사람들보다 심하다는 것을 이 나이가 되어서도 느낄 때가 있다.


가끔 TV에서 콧수염 아저씨를 볼 때면 천진하게 춤을 추던 그 친구의 모습이 어렴풋이 떠오를 때가 있다.

다른 사람들에게 호랑나비가 그 시절 파격적인 웃음을 주던 최고의 코믹물이었을지 모르지만 나에게는 잊지 못할 트라우마를 안겨준 호러물 중의 호러물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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