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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정윤 Sep 06. 2020

무제

몇 날 며칠을 내리던 비가 강과 하천을
무참히도 범람했다.
물이 지나간 자리는 아무것도 남기지 않는다는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빗물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는 원래부터

아무것도 없었던 것처럼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다.

불이 지나간 자리는 재라도 남긴다는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가슴을 태워내던 빨간 불덩이는
짙고, 깊고, 커다란 마음의 자취를
빛바랜 잿빛으로 흔적을 남겼다.
바람이 불 때마다 아주 조금씩 조금씩
날려서 흩어질 것이다.
그래도 이 세상에서
가장 반짝이며 빛나던 순간들은
가장 눈부시게 아름다운 날들은
당신이 곁에 있었던 그때였다.
좀 더 가까이 가고 싶어서
좀 더 오래 머물고 싶어서
나를 태우고 또 태웠던 그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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