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움직이는 힘 — MBTI를 통해 다시 마주한 나의 길
저는 오랫동안 MBTI를 크게 신뢰하지 않는 편이었습니다.
사람의 성향을 단 네 글자로 고정시키는 방식이
삶의 복잡성과 경험의 깊이를 담기엔 부족하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MBTI는 늘 ‘참고자료’ 정도의 거리감으로 남아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순간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도 이렇게 많은 연구자들이 꾸준히 탐구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자기 이해의 언어로 활용한다면…
한 번쯤은 열린 마음으로 다시 바라볼 만하지 않을까?”
그리고 오랜만에 앱을 통해 MBTI 검사를 해 보았습니다. (공식적인 검사는 아니어서 신뢰도는 좀 늦을 수 있을 것입니다)
결과는 ENFJ.
그 글자들을 바라보며 저는 한동안 마음을 고요히 가라앉혔습니다.
왜인지 오래된 제 단면들을 천천히 읽어주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1.
내면은 I, 그러나 업무 속에서 E를 선택해온 시간들
사실 저는 내면적으로 **I(내향형)**에 더 가까운 사람이라고 느껴왔습니다. 혼자 사유하고 정리하는 시간이 제게 깊은 에너지를 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업무는 저를 다른 길로 이끈 것 같습니다.
특히 11년째 이어오고 있는 세 번째 신차개발 PM 업무는 I와 E의 경계에서 저는 매 순간 E를 선택해야 하는 자리였거든요.
수십 개 조직을 조율하고, 회의의 중심에 서며, 갈등을 풀고, 방향을 정하고,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로 모으는 일. 제가 자주 언급하는 오케스트라의 지휘자 같은 역할이 되겠지요.
업무라는 무대 위에서 저는 자연스레 타고난 성향을 넘어선 외향적 에너지를 꺼내 쓰는 사람이 된 것 같습니다.
그 외향성은 제 본성이라기보다
책임과 역할을 수행하기 위한 의식적인 선택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2.
자동차를 만드는 일은 결국 ‘사람을 만드는 일’
자동차 개발은 기계를 만드는 일이 아닙니다.
그 속에는 수많은 사람의 마음, 손길, 책임, 감정이 켜켜이 쌓여 있습니다.
저는 고무재료 부품을 개발하던 시절부터
소음·진동 분야의 현장을 뛰던 시간까지,
자동차의 다양한 언어들을 직접 몸으로 배우며 성장해 왔던것 같습니다.
그리고 기술사를 준비하면서 자동차 전체 시스템을 다시 처음부터 바라보는 공부를 했습니다.
그 시간들은 미래 자율주행 시대를 대비하고
생성형 AI를 현명하게 활용하기 위한 확고한 기반이 되어주었던 것 같습니다.
돌아보면 지금까지의 경험은
100세 시대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작은 여정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저는 계속해서 각 분야의 뛰어난 전문가들로부터 배우고,
그 배움을 제 안에서 ‘저만의 언어’로 승화시키고자 합니다.
세상엔 정말 대단한 분들이 많습니다.
그분들과의 인연 하나하나가 너무나 소중합니다.
저는 그 약한연대(weak tie)가 시간을 지나며 자연스럽게 강한 연대로 이어지는 삶을 꿈꿉니다.
3.
ENFJ — 제가 걸어온 길을 설명해주는 또 하나의 언어
ENFJ는 사람의 가능성을 믿고,
관계와 조화를 중시하며,
팀의 성장을 자신의 성장처럼 기뻐하는 유형이라고 합니다.
돌아보면 제가 PM으로서 가장 기뻤던 순간들은
신차발표회를 하는 날이 아니라
팀과 함께 어려움을 넘어섰던 순간들이었던 것 같습니다.
젊은 엔지니어가 한 단계 성장하는 모습을 보는 순간들.
그리고 힘든 결정을 함께 책임지는 과정들.
이 모든 것이 제게는 큰 보람이었 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ENFJ라는 결과는 새로운 발견이라기보다
제가 걸어온 길을 설명해주는 또 하나의 언어였던게 아닐런지요.
4.
앞으로 쓰고 싶은 이야기들 — 자동차와 사람, 그리고 나
저는 계속해서 자동차를
‘인간의 생애를 닮은 존재’로 바라보고 싶습니다.
태어나고, 성장하고, 누군가의 일상에 스며들고,
고장 나고, 사랑받고, 이별을 맞이하고…
자동차는 사람의 시간과 함께 살아가는 또 하나의 생애입니다.
그리고 이 길을 걸어오며 제 시야가 어떻게 넓어져 왔는지 자주 되돌아보게 됩니다.
부품 개발 엔지니어로 일하던 시절에는
특정 기술 영역에 깊이 파고드는 즐거움이 있었습니다.
그러다 완성차 업무로 전환하고,
전체의 숲을 바라보는 PM 역할을 맡으면서
저의 시야는 점점 더 넓어지고 있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 과정에서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까?”라는 질문에 대해
희미하게나마 윤곽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저는 그 희미한 그림을 보다 선명한 형태로 만들기 위해 계속 배우고, 기록하고, 경험을 쌓아가려고 합니다.
저는 자동차를 통해 인간을 이야기하고,
기술을 통해 인문학을 말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제 경험들이 누군가의 삶을 조금 더
따뜻하게 만드는 글이 되기를 바랍니다.
MBTI라는 작은 결과는
그 방향성을 조용히 확인시켜준 은근한 이정표가 되어 준 것 같습니다.
“그래, 당신은 결국 사람을 향해 가는 사람이었지.”
5.
앞으로의 길 — 제가 품고 갈 질문들
– 기술은 결국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 자동차는 사람의 어떤 시간을 담아내는가?
– 엔지니어는 어떻게 사람의 이야기를 만드는가?
– 그리고 저는 왜 이 길 위에 서 있는가?
저는 앞으로도 이 질문들을 품고,
자동차와 사람을 잇는 길 위에서
묵묵히, 그러나 정성스럽게 걸어가고자 합니다.
사람을 움직이는 힘을 만드는 사람.
저는 낭만기술사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