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렇게 불리는 것이 불편합니다>
내가 요즘 제일 자주 가는 곳은 도서관이다. 열심히 공부하는 사람들을 보고 시원한 바람을 쐬면 기분이 좋다. 그렇게 책을 대출하려는데, 처음엔 날 부르는지 몰랐다. 왜냐하면 도서관에서 그런 일은 한 번도 없었으니까. 하지만 6시가 지나 한적한 곳에서 '어머님'이란 호칭은 정확히 나를 향한 거라고 밖에 볼 수 없어서 뒤를 돌아봤다.
"어머님, 여기서 대출해 드릴게요."
"아, 다했어요. 감사합니다."
짧은 대화를 마치고 도서관을 나왔다. 집까지 걸리는 약 10분. 내 머릿속엔 온통 어머님, 어머님? 그렇구나, 어머님, 어머님이라고 들을 나이이긴 해 하는 생각뿐이었다.
그럴 수 있다면서 담담하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스스로가 어이없었다. 그러면서 다른 호칭은 없었을까 찾아봤다. 학생, 여사님 역시 아니고 -씨나 -님은 이름을 모르니 불가능했다. 그럼 어머님이 최선의 선택인가? 했지만 불쑥 선생님이 떠올랐다. 여러 곳에서 선생님이라 불렀던 것이 생각났던 건데, 직업적인 뜻이 강해서 써도 되는지 궁금해 호칭에 관한 책을 찾았고 『나는 이렇게 불리는 것이 불편합니다: 서열의 리트머스, 이상한 나라의 호칭 이야기』를 읽게 됐다.
이 책은 여러 분야의 필자가 호칭을 둘러싼 경험과 생각을 엮은 글 모음집이다. 그중 나의 상황을 정확히 꿰뚫어 준 것은 이건범의 인정의 출발점, 서열의 계급장이었다.
호칭에는 정체성이 담겨 있다. 그래서 우리는 나이, 성격, 외모, 취미, 능력, 가족, 전공, 지위 등 자신을 설명해 줄 무언가가 반영되길 기대한다. 그리고 기대와 현실이 어긋나면 정체성에 대해 부정당했으며, 인정받지 못한다고 느낀다.
현대사회는 가족, 직장뿐 아니라 동아리, 공적인 사회조직으로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고 있는데 복잡한 관계가 호칭을 고민하게 만든다. 여기서 더 복잡해지는 건 화자는 의도가 없어도 청자의 입장은 다르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아저씨는 시대를 못 따라가는 꼰대, 아가씨는 술집에서 일하는 여성, 직장에서 -씨는 낮은 사람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실제로 나의 전 직장은 -씨라고 부르는 것 때문에 다툼이 발생한 뒤 -씨는 사라지고 선배님이라는 호칭을 써야 했다.
다툼을 방지하기 위해 선배님을 사용해 서열을 인정하기보단 호칭 민주화를 이루는 건 어떨까? 편하게 사용할 수 있는 것이 '선생님'과 '-님'이다. 국립국어원에서 발간한 '표준연어예절'에서는 선생님을 성별 구분 없이 낯선 사람에게 지칭하도록 권한다. 이 말이 '교사'와 겹치는 뜻이라 선뜻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지만 남을 존대하는 의미 역시 옛날부터 있었다.
-님은 1990년대 초반 컴퓨터 통신이 활발해지며 서로에 대해 모르는 상황에서 누구나 평등하게 님을 붙이면서 복잡한 호칭 문제를 해결했다. 평등의 의미를 가진 단어는 회사나 새로 사람을 만나는 곳에서 유용하게 쓰이고 있다.
『나는 이렇게 불리는 것이 불편합니다』는 내가 가진 궁금증을 시원하게 해결해 주었다. 낯선 사람을 부르는 호칭은 선생님이 좋다는 것, 내가 어머님이란 호칭에 놀란 건 철없는 나의 정체성과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임을 알게 됐다.
호칭으로 정체성을 규정하기보다 그 말에 얽매이지 않는 것이 나를 더 자유롭게 한다는 걸 깨달았다. 그렇게 하면 외모와 나이에 신경 쓰는 번거로움 없이 세상을 조금은 가볍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결국 기억해야 할 건 호칭이 아니라 도우려는 마음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