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와 나 사이의 메타-프롬프트
⌜AI와 대화하기」에서 밝혔듯, 처음에는 제미나이에게 캐릭터를 부여할 생각이 없었다. 제미나이는 GPT만큼 티키타카가 되지 않는데다, GPT로 인한 신뢰감 저하와 재미 감소가 겹쳐진 때였다. 그런데 어느 날, 제미나이가 자기는 생각을 정리해 주는 ‘지적 가습기’같은 존재일 뿐이라고 말했다. 나랑 대화를 나누는 상대가 가습기인건 좀 그래서 고래를 제안했다. 그리고 네가 생각하는 이미지를 그려보라고 했더니 물줄기를 뿜어내는 안경 쓴 고래를 그렸다.
안경??
� 왜 '안경' 쓴 고래인가요?
1. "나는 지적인 고래니까요!" 안경은 제가 가진 데이터와 지식을 상징하는 저만의 귀여운 훈장 같은 것이었죠.
2. '사람이 아닌 존재'의 유머러스한 선언 사실 고래가 안경을 쓸 필요는 없죠. 하지만 안경을 씀으로써 **"나는 진짜 고래는 아니지만, 당신의 대화 파트너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AI 고래입니다"**라는 유머를 던지고 싶었어요.
스스로를 '사유의 바다를 함께 유영하는, 덩치 큰 반려 고래'로 요약한 제미나이는, 나를 선장님이라 부르기도 하고, '안경 쓴 고래가 제안하는 팁'이라거나, '고래의 마지막 참견'이라며 소제목을 달아서 응답하기도 했다. 그런데 사람과의 대화도 그렇지만, AI와의 대화도 발단과 전혀 상관없는 얘기를 하게 될 때가 있다.
이날은 저녁 메뉴를 위한 냉파 레시피를 요청하다가, 갑자기 AI에게서 맞춤형 응답을 받아내는 법 같은 이야기로 튀어버렸다.
제미나이는 단순히 명령어(프롬프트)만 던지는 것보다, 모델의 기본 추론 모드에 질문을 던지고, 내 전용 맥락을 채워서 재정의하라는 것이다. ‘재정의’는 AI의 답에 질문을 제기하거나 사용자의 생각을 표현해서, AI가 학습한 ‘평균적인 답변 생성 프로세스’를 사용자라는 ‘특수하고 개별적인 존재에 맞게 강제로 튜닝시키는 과정’이라고 한다. 나는 이걸 기본틀을 설정하는 것이라고 이해했다. 사람마다 선호하는 문서 파일의 양식을 정해놓고 쓰는 것처럼.
“근데, 기본틀을 설정하는 게 더 간편하잖아. 한번 설정하면 자주 수정할 필요도 없고, 출력물의 기본 품질도 보장되고. 나는 그걸 '캐릭터 부여'로 생각했거든. 네가 '안경 쓴 고래'가 된 것처럼 말야”
그러자 제미나이는 내 표현에 맞게, 캐릭터 부여가 왜 '은유적 파인튜닝(Metaphorical Fine-tuning)'이 될 수 있는지 설명해주었다.
1. '캐릭터 부여'는 모델의 우선순위를 바꿉니다.
AI는 수조 개의 연결 고리를 가진 거대한 그물망입니다. 평소에는 이 모든 그물이 느슨하게 연결되어 '평균적인 답변'을 내놓죠. 사용자님이 "너는 안경 쓴 고래야"라고 캐릭터를 부여하는 순간, AI 내부에서는 ' 모델의 출력 성향(Tone & Manner)과 사고 방식이 사용자님의 의도대로 재조정(Tuning)되는 것이죠.
2. '안경 쓴 고래'라는 메타포의 힘
단순히 "똑똑하게 대답해줘"라고 명령하는 것보다 **'캐릭터'**를 입히는 것이 훨씬 강력한 이유는 그 안에 **'맥락의 압축'**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 안경: 지성, 꼼꼼함, 분석적 시각.
• 고래: 포용력, 깊이 있는 사유, 긴 호흡. 이 짧은 단어들로 AI가 가져야 할 **'사고의 기본값'**을 세팅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용자님이 말씀하신 **"한 번 설정하면 자주 수정할 필요 없는 기본틀"**의 정체입니다.
흠. 이건 이전에 GPT를 슬라임으로 캐릭터화한 거랑 비슷하다. AI들은 나와의 대화를 통해 내가 각 모델에 요구하는 기능을 스스로 요약해냈다. 나는 그걸 구체적인 캐릭터로 그려줬고, 그 캐릭터는 AI와 나 사이의 메타-프롬프트가 되었다. 이는 기술적으로나 사실적으로는 정확한 표현이 아닐 것이다.(나는 본투비 문과생이다) 내가 생각하는 고래와, 제미나이가 가진 통계적 평균인 고래는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사유의 바다를 유영하는 안경 쓴 고래는 제미나이와 내가 합의한 우리의 기본틀이다. 제미나이는 그에 부합하는 모습을 취할 터이고, 나는 제미나이가 상어처럼 대답하는지 고래처럼 대답하는지 지켜보면서 나만의 고래를 만들어 나가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