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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열했던 나의 지난 6년!

생존을 위해 치열하게 살았던 나의 기술창업 도전기

by HS

언젠가 나의 이야기를 글이나 만화로 그려보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나의 지난 6년이라는 세월은 개인에게는 큰 도전이었고, 큰 열정을 가지고 지나온 시기였지만… 그 시간이 그때는 분명 존재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마치 없었던 것 같은 나의 지난 시간.


어느덧 30대 중후반이 되어버린 나의 과거가 참 허무하고, 고통이 클수록 단단해진다고는 하지만 단단해진 것일까? 아니면 드러내지 않게 되는 것일까? 알 수 없는 현재의 내 모습을 간직한 채, 페이스북 한편에 나만 볼 수 있게 해 놓은 작은 메모들이 나의 이야기를 남길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것을 알고, 어쩌면 이제까지 드러내고 싶지 않던 나의 이야기를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함이 아닌 나를 위한 기록으로써, 향후 10년, 20년 후에 과거를 한 번 돌이켜보고자 지난 시간을 글로써 남겨보려고 한다.


젊음의 패기…!!???

20대 후반

나는 기술을 가진 한 기업의 해외 마케팅, 해외 영업을 담당하며 4년이라는 세월을 보냈었다. 문과생인 나는 기술에 대한 이해도는 많이 떨어졌지만, 누구보다 앞장서서 일을 해나갔던 열정이 넘친 젊은 청년이었다.


2017년 6월
4년간의 직장 생활을 그만둘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던 시기가 왔다. 그때의 나는 기회가 온 것이라고 큰 착각을 하고 있었다. 젊음의 패기??? 와 근본 없는 자신감은 도전하지 말았어야 할 너무 큰 사업에 뛰어들고 만다.

지금에서야 생각해 보면 너무 무모한 시도였다. 과거의 내가 어떻게 그걸 시작해 보겠다고 생각한 것인지, 이런저런 고난을 겪고 난 현재의 내가 바라보면 그때의 나 자신은 미친 것이었다고밖에 볼 수 없는 과거의 그 시간이 시작된다.


기술창업 - 하지 말았어야 할 도전… 그러나

무엇부터 시작할지 몰랐다. 자본도 없고, 기술을 개발할 능력도 없었다.

다만, 나는 사람을 대하는 능력이 남들보다 뛰어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나의 말에 힘이 있다는 얼토당토않은 근자감을 가지고 있었던 때였다. 이 사업을 내가 하기로 목표를 정했으니 지금부터는 설득이었다.

솔직히 그때 어떻게 그렇게 했었는지 모르겠다. 그냥 1년간 핵심 인력들을 귀찮을 정도로 찾아다니며 설득하였고, 결국 그들은 설득당하였다.


당시 나뿐만 아니라 그들 또한 이 기술과 이 사업에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사업성이 있는 기술이 도태되어 가는 당시 상황이 안타까웠고, 모두가 알고 있었지만 그것을 나서서 하지는 못하는 분위기 속에서 내가 행동으로 옮겼을 뿐이다.


1년간 팀원들을 설득하는 동시에 고객사를 찾아가 또 지루한 설득작업이 진행되었고, 무슨 자신감으로 중국 대기업에 통역사 한 명과 기술팀장만 대동하여 회의를 치른 것인지. 상대 쪽에서는 결정권자 포함 10명이 참석하였고, 그때 찍어둔 사진을 꺼내 보면… 지금 생각하면 등골이 오싹하다.


팀이 조직되었으니 본격적인 창업 준비에 들어갔다. 자금을 어떻게 끌어와야 하는지 설명회 등을 참 열심히 돌아다녔다. 그리고 마침내 2018년 9월, 정부의 기술혁신형 창업 지원 사업에 선정되면서 본격적인 창업에 돌입하였다.


그때는 몰랐다. 이 창업의 시작이 고통의 시작이었음을…

창업 후 첫 6개월은 개발의 방향조차 알 수 없었다. 막연히 타깃으로 정한 고객사와 산업은 있었지만, 무엇을 어떻게 만들어야 할지 감조차 잡히지 않았다. 그렇게 안갯속을 헤매던 가운데, 6개월이 지나 마침내 기술이사가 합류했고, 그때부터 기술 개발에 서서히 탄력이 붙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2년간 우리는 기술 개발에 몰두하였다. 기술팀들은 설계에 집중했고, 나는 이곳저곳을 다니며 우리의 제품과 사업을 설명하고 자금을 끌어오는 데 집중하였다. 그렇게 2년이라는 기간이 지나 2020년이 되었다.


2020년 창업 3년 차… 8억 원 자금 조달 성공, 그리고 내리막길의 시작

8억 원… 누구에게는 큰돈이고, 누구에게는 작은 돈일 수 있겠지만, 이 자금은 우리에게는 희망의 자금이었다. 때마침 1차 설계가 끝이 났다. 특허도 확보되었고, 시제품 제작에 착수하면 되었다. 그러나… 공간이 없었다. 단순 소비제품이 아니다 보니, 부품 300여 개를 보관할 공간과 그것들을 조립할 공간, 조립에 필요한 간이 호이스트를 둘만한 공간이 필요했다. 그러나 돈이 없었다. 확보한 자금은 인건비와 사무실비, 제품 개발비 등 운영비로도 빠듯하였고, 제품 조립 공간을 위한 비용으로 충당하기에는 너무 큰 리스크였다. 결국 공장장님의 힘을 빌려 알게 된 작은 공장의 사장님에게 우리의 사업을 설명하고, 또다시 지루한 설득 작업에 들어갔다.


주단조 부품 300여 개를 제작해야 했는데, 30여 개의 업체를 공장장님과 둘이서 설득하고 또 설득했다. 이놈의 설득이 계속 이어졌다. 업체들은 돈도 안 되는데 굳이 우리 부품을 해줄 겨를이 없다는 핑계로 높은 단가를 요구했고, 싫으면 관두라는 식이었다. 업체들에게 빌고 요청하고 설득하여 단가를 낮추고 겨우겨우 부품 제작을 이어나갔고, 2021년 마침내 모든 부품 제작이 완료되어 조립에 착수할 수 있었다.


300개의 기계 부품을 조립하기란 여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조립할 기계장치도 없이 시제품을 모두 수작업으로 진행하다 보니, 한여름 에어컨도 없는 작은 공간에서, 대형 선풍기에서 불어오는 뜨거운 열기를 맞으며 팀원 중 누구는 망치를 휘두르다 자기 손을 찍는 경우도 생겼다. 열악한 환경에서, 우리만의 공장이 없다는 서러움을 꼭 목표를 이루겠다는 다짐으로 간직한 채, 제품 조립을 이어나갔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 조립은 끝이 났건만, 긴장한 채 구동시킨 1차 시제품은 어디서 문제가 발생한 것일까.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던 시제품의 문제점을 찾아 다시 분해하고, 재조립하고, 또 구동시키고… 이것을 3~4번 반복하다 보니 어느덧 2021년은 흘러가버리고, 마침내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우리 제품과 기념사진 한 장을 찍으며, 개발의 끝이 보이는 만큼 우리의 자금도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본격적인 고통의 시작… 끝없는 추락

2022년 2월
이제 테스트만 하면 끝이 난다고 안도할 즈음,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 발생하였다. 당시 우리는 대학교 내의 창업보육센터에 사무실이 있었는데, 느닷없이 경찰이 들이닥쳤다. 불법 설계 프로그램 사용으로 인해 업체에서 고발한 것이다. 창업 초기 자금이 없었던 우리는, 한 카피당 1,300만 원이었던 프로그램을 살 여력이 없어 우선 몰래 사용하고 나중에 구매하자고 생각했던 것이, 정신없이 달리다 보니 완전히 망각되어 있었고, 그것이 발목을 잡아 경찰이 찾아온 것이다.


보통은 내용증명을 먼저 보낸다고 알고 있었기에, 갑작스러운 경찰의 방문에 우리 모두는 당황했다. 당시 나는 사무실에 없었기에, 경찰서로 방문해 달라는 안내장만 받은 상태였고, 잔뜩 긴장한 채 경찰서를 방문하였다.


군 생활을 전투경찰로 복무했던 나는, 막상 내가 안 좋은 일로 경찰서를 간다고 생각하니 더 긴장을 하게 되었던 것 같다. 수사관님을 처음 대면한 나는, 의외로 그분으로부터 미안하다는 얘기를 들었다. 불법 소프트웨어는 민사 사건이기 때문에 고발이 들어오면 수사를 할 수밖에 없다는 것, 그리고 많은 중소기업들이 자금 때문에 몰래 쓰는 현실을 알고는 있지만 스타트업에 대한 고발은 흔치 않아, 수사를 해야 하는 본인들이 더 미안하다는 말에… 지금까지의 힘든 과정 때문이었을까. 수사관님 앞에서 체면도 없이 눈물이 흘렀다.


그러면서 고발이 들어온 이상 수사는 해야 하지만, 법인 앞으로는 벌금 얼마면 끝낼 수 있다는 말과 함께, "다만 법인은 벌금을 부과하면 끝이 나지만, 불법 소프트웨어 사용은 법인의 의도였더라도 실제로 사용한 사용자가 조사를 받아야 한다"는 말을 덧붙였다. 불법 소프트웨어는 반의사불벌죄라 조사를 받고 벌금을 내거나 합의를 해야 했고, 당시의 나는 팀원들이 조사를 받게 해서는 안 되겠다고 판단하여 상대 변호사와 연락을 취해 합의를 하였다. 법인 통장에 있는 돈, 없는 돈을 긁어모아 합의를 했다. 명백한 나의 잘못이긴 하지만, 스타트업이 감당하기에는 소프트웨어 가격이 너무 컸다.


이때부터 자금의 허덕임이 시작되었다. 자금을 구하러 이곳저곳을 뛰어다녔지만, 이미 데스밸리로 진입한 스타트업에게 도움을 줄 곳은 아무 데도 없었다. 정부 자금 담당자는 냉랭한 반응을 보였고, 전화는 아예 연결조차 되지 않았다.


극복하지 못한 데스밸리

언제,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아니면 애초부터 잘못된 것이었는지. 불법 소프트웨어를 합의한 이후, 악재가 연달아 닥쳐왔다.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로 악재가 계속 밀려들었다. 나중에서야 그 시간이 지나고 경험을 통해 내가 왜 그렇게까지 정신을 못 차렸을까… 싶었지만, 이 악재의 끝을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했던 당시의 나로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


내가 흔들리는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된다는 마음으로 팀 앞에서 감정을 절대 드러내지 않았지만, 마지막 하나의 악재가 나를 완전히 무너뜨렸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나도 모르게 팀들 앞에서 담담히 “그만해야 할 때가 온 것 같다”라고 말했고, 그 순간 머리를 쥐어짜며 고개가 숙여졌다.


공황장애가 시작되었다. 태어나서 단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그 느낌. 앞으로 절대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그 공황장애는, 정말로 나를 감싸고 있던 주위의 공기가 나를 무겁게 짓누르는 느낌이었다.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실제 그 느낌이었다.


그때 혼자서 며칠간 술을 굉장히 많이 마셨다. 무서운 건, 깡소주를 혼자서 두세 병 마셨는데 전혀 취하지 않고, 두 시간 후에 잠에서 깨버렸다. 그러면 또다시 잠들기 위해 소주를 마셨다. 그렇게 공황장애를 심하게 앓으며 약 한 달의 시간이 흘러갔다.


결국 정신의학과 병원에 가서 상담도 받고 약도 먹어보았다. 그런데 정신과 약을 그때 처음 먹어봤고, 이 약은 먹을 게 못 되는구나라는 걸 깨달았다. 공황장애의 특징이 심장이 쿵쾅거리고 불안 증세를 보이는 것인데, 약을 먹으면 그런 것이 사라진다. 대신 감정도 없어지고, 정말 살아있는 좀비가 된 기분이 들었다. 몽롱한 상태에서 운전하다 사고가 날 것만 같았다.


여전히 공황장애에서 벗어나지 못한 어느 하루, 나는 가장 오래된 친구 둘과 저녁 식사를 하고 있었던 와중에 아주 난리가 났다. 저녁 식사 전, 고등학교 친구와 연락하며 “오늘도 심장이 떨린다”라고 한 번 말한 뒤, 전화기를 보지 못했다.


그리고... 몇 시간 후, 휴대폰을 보니 전화가 약 40통이나 와 있었다. 완전히 뒤집어진 것이다. 오해한 고등학교 친구가 내가 잘못된 생각을 한 줄 알고, 저녁 10시경 내가 전화를 보지 못했던 그 사이에 나의 집에 경찰과 구급차를 불러들였던 것이다. 당시 나는 3층짜리 단독주택에 살고 있었고, 3층에는 집주인이 거주하고 있었기에 우리 어머니께 연락해 집 비밀번호를 묻고 들어간 것이다.


그날 나에게 있어서 6·25 난리는 난리도 아니었다. 온 가족, 친척들이 뒤집어졌고, 어머니는 거의 실신 직전이셨다. 가족과 지인들에게 전화를 돌려 급히 수습했고, 경찰관이 내가 있는 곳으로 와서 안전하다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일이 마무리되었다. 그리고… 집주인에게 있는 욕, 없는 욕을 다 들어야 했다. 아직도 그 집에 살고 있다. 지금은 집주인께서 오해를 푸시고, 나에게 굉장히 잘해주신다.


다음 날, 전화를 받지 않았던 친구의 퇴근 시간에 맞춰 역에서 기다려 만난 후, 싹싹 빌며 진심으로 사과했다. 친구가 어느 정도 풀어진 이후… 아주 격렬하게 싸웠다. “왜 그렇게 오버를 하냐”며, “어머니 심장병 걸릴 뻔한 줄 아냐”라고.


그런데 그 난리가 있은 직후, 언제 그랬냐는 듯 공황장애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그때 두 가지를 깨달았다. 생각보다 나를 걱정해 주는 사람이 많다는 것 하나와 내가 진심으로 힘들어할 때 무심코 꺼낸 말 한마디가 나를 걱정해 주는 많은 사람들에게 그대로 고민과 걱정으로 전해진다는 것을...


친구의 오해로 큰 난리가 났지만, 그 덕분에 심하게 앓고 있던 공황장애가 한순간에 사라졌고, 나는 정신을 차리고 개발 막바지에 집중할 수 있었다.


2022년 9월

우리에게 설계 용역을 주는 업체에서 우리의 어려움을 알고 거래 제안을 해왔다. 그들은 우리의 기술에 눈독을 들이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고, 우리 제품 개발을 완료해 주고 사업화하여 일부 기술료를 주겠다는 제안과 함께, 나에게 그들의 해외영업 과장으로 입사하라는 제안을 하였다.


나는 그들의 속셈을 알고 있었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기에 역제안을 하였다. 우리의 도면을 줄 테니 그들의 고객사에 팔 수 있게 아주 낮은 기술료를 제안하고, 또한 우리 남은 기술자들을 프로젝트 참여를 위해 채용하겠다는 약속을 받고 그 회사에 들어갔다.


그러나 나와 약속했던 상무는 예견했듯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내가 그의 직원이라 장담했는지, 우리 제품 테스트를 끝내려면 중국 고객사의 의향서를 받아내라고 협박 아닌 협박을 하였다. 그는 나를 이용했다고 생각했겠지만, 오히려 그를 이용한 것은 나였다. 나는 우리의 제품으로 그들이 정부 사업을 따올 수 있도록 도왔고, 그들의 자금을 이용해 우리 제품 테스트를 진행할 수 있었다.


2023년 3월

그들의 자금과 고객사의 장비를 이용해, 마침내 정부기관의 설비로 테스트를 시작했다. 이 시점에 나는 그 기업에서 나와 막바지 테스트를 진행했고, 사업체로 돌아온 나는 서서히 마무리를 준비했다. 향후 다시 만나자는 약속 아닌 약속을 하며, 팀원 한 명씩 순차적으로 작별 인사를 고했다. 나와 핵심 인력 두 명만이 남아 마지막 테스트를 진행했고, 마침내 정부기관에서 공식적으로 발행된 테스트 성적서를 발급받았다.


결국 개발은 성공적으로 끝이 났다. 그러나 사업은 끝을 맺어야 했다. 아주 실패를 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 기업이 우리 제품을 판매할 경우 일정 기술료를 우리에게 줘야 하는 기술료 계약서를 맺어두었기에, 그 기업이 진행 중인 프로젝트를 끝낸 후 우리 제품으로 본격적인 사업을 시작하게 되면, 기술료를 받을 수 있도록 해두었다. 그것을 가능하게 만들기 위해, 우리 팀원 중 연세가 있으신 박사님을 그곳에 취업시키고 나왔다.


마지막...

법인을 파산시켜야 했다. 법인을 유지하면 금융기관에서 수십 통의 전화가 쏟아졌고, 더 어려운 상황에 직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법인이었기 때문에 개인에게 추심이 들어오지는 않았다. 스타트업이기에 연대보증도 없었다.


공황장애를 앓던 중, 중국의 돈 많던 친구들에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전화를 돌린 적이 있었고, 대학원 형님들 중 크게 사업하던 분께 급하게 큰돈을 요청했을 때 선뜻 바로 빌려주신 분이 계셨다. 다만 그분이 돈을 빌려주며 정확하게 언제 상환할 건지 알려달라는 한 마디를 덧붙이셨다. 그 말 한마디는, 절대 개인적으로 돈을 빌리면 안 되겠다는 마음을 먹게 만든 계기가 되었다.


나는 그 돈을 다음 날 바로 돌려드렸다. 만약 그분이나 지인에게 돈을 빌렸더라면, 지금 나는 없었을지도 모른다. 진심으로 이 세상에 없었을지도 모른다. 다행히 개인적으로 빌린 돈은 없었기에, 법인만 청산하면 모든 것이 끝이었다.


2023년 10월

어언 6년 만에, 내 손으로 직접 이력서를 제출하고 면접을 보고 직장인으로 돌아갔다. 나의 사업 경험이 다른 직장에서는 좋지 않게 보이는 것인지, 30군데를 지원했지만 연락 온 곳은 단 한 곳, 지금 다니고 있는 직장뿐이었다.


새로운 분야인 플랜트 산업에서, 입사 후 바로 진행 중이던 미국 플랜트 현장 지원을 나갔다. 내가 일을 못하게 생겼었는지, 총괄 소장님은 나에게 “과장이니 과장 역할을 다 하라”는 압박을 주셨다. 그런데 현장에서의 일이 나에게 딱히 어려운 것은 없었다. 시공을 할 것도 아니고, 설계를 할 것도 아니고, 다만 그 외의 일만 하면 되었기에 크게 어렵지는 않았다. 물론 관리해야 할 일이 엄청 많았다. 그냥, 관리할 게 엄청 많았을 뿐, 2~3명이 해야 할 일을 혼자 다 쳐냈다. 이게 무슨 일인 양, 나에게는 절대 어렵지 않았다.


다른 기업 때문에 우리 일정이 늦어져서 그 업체와 싸우라고 하면 그냥 가서 싸웠다. 우리가 먼저 설치하면 다른 기업들은 문제가 컸기에, 싸우고 나면 상대는 꼬리를 내렸다. 그러면 나는 시간이 좀 지난 후, 다시 가서 사과하고 그랬다. 그냥 일을 혼자 다 해냈더니, 총괄 소장님은 모든 업무를 나에게 맡기고 한국으로 휴가를 떠나셨고, 이곳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어쩌다 보니 소장 대행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9개월간의 미국 현장 지원을 마치고 귀국한 후, 마침내 2024년 6월, 법인 파산이 선고되었다. 공식적으로, 우리의 사업이 종지부를 찍은 시점이다. 파산 선고를 받기 위해 교대역에 있는 서울회생법원으로 향했고, 선고를 받은 뒤 법원에서 지하철역으로 걸어오던 그 길… 아무런 생각도, 어떤 감정도 들지 않았다. 그냥 무덤덤했다. 허무함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냥… 그랬다. 이렇게 끝이 났구나라는 생각만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나는 사람들에게 말한다. 하필 창업을 시작하고 얼마 안 돼서 코로나가 터졌다고… 사람들은 수긍한다. 아니, 수긍하게 만들고 싶었다. 왜 내가 실패했는지 그렇게 설명하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안다. 너무 무모한 도전이었음을. 첫 단추부터 잘못 끼워졌음을. 그렇게라도 내 잘못으로 끝났다는 사실을 에둘러 회피하고 싶었던 것임을…


우리가 다시 시작하려면 할 수는 있다. 기술 개발은 마쳤고, 테스트도 완료시키고 법인을 청산했기에 이제는 자금 없이 일어설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다. 창업 기간 동안 많은 것을 배웠고, 깨달았다. 하지만 그만큼 고통이 컸고, 많이 지쳤다. 하지 말아야 한다. 대학원 형, 누님들은 아직 내가 젊다고, 다시 일어설 수 있다고 진심을 담아 말해주시지만… 나는 안다. 열정이 앞서면 큰 화가 된다는 것을. 누구보다 뼈저리게 느꼈기에...


지난 6년간의 나의 도전은 이렇게 끝이 났다. 나보다 대부분 나이가 많았던 우리 팀원들을 내가 조직했고, 나의 방향에 함께해 주었다. 가진 것 하나 없던 우리 손으로 10억 원을 조달하고, 기존에 개발된 적이 없던 제품을 우리 손으로 개발하고 작동시켰던 경험은 단순히 고통만이 아닌, 내게 많은 것을 안겨주었다.


"직장은 전쟁이고, 밖은 지옥이다"라는 표현 속에, 기술창업은 정말로 까딱하다가는 죽을 것만 같았다. 버티려면 살아남아야 했고, 그 절박함은 항상 긴장과 예민함으로 이어졌다. 꼭 성공하겠다는 일념으로 기다리고 또 기다리며 버텼던 지난 6년. 그 시간이 한순간에 무너지는 것을 지켜보며, 대부분의 사람은 알지 못하거나

어쩌면 알 수조차 없는 치열했던 경험과, 그를 통해 얻은 깨달음이 지금의 흔들림 없는 나를 만든 것이라 생각한다.


2025년 3월, 현재

나는 현재 다니고 있는 회사에서 월급도, 복지도 나쁘지 않게 받으며 근무하고 있다. 지금의 나의 삶… 참으로 평안하다. 이곳 사람들은 나의 과거를 알지 못한다. 그래서 나를 스스럼없이 대한다. 이렇게 살아도 되나 싶을 정도로 너무 평탄하고, 편안하다. 이렇게 살아야 한다. 이렇게 살자. 욕심부리지 말고… 열정 가지지 말고… 그냥 평범하게 살아가자. 회사에서 조용히, 드러내지 말고, 너무 잘하려고도 하지 말고… 그냥 그렇게 살아가자. 오늘도, 내일도.


오늘도 퇴근 후 아무 생각 없이 러닝머신이나 뛰어야겠다. 역시 잡생각이 들 땐 뜀박질이 최고다.


마지막으로, 나를 믿고 함께해 준 7명의 우리 팀들과,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공장 한편을 내어주신 J 사장님께, 직접 전하지는 못했지만 진심으로 미안함과 감사함을 전하고 싶다. 그리고, 항상 나를 걱정해 주는 우리 부모님과 누나에게, 죄송한 마음을 간직한 채 이만 나의 이야기를 마무리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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