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업란은 왜 있는겨?
처음에는
그저 나의 단출한 하루를
적어두고 싶었을 뿐이었다
나 혼자 기억해도 되고,
나 혼자 다시 들춰보고 싶은
지루하고 소박한 하루들.
아무리 꼭 쥐고 있어도
어느새 손가락 사이로
스르르 빠져나가 버리는 모래처럼
붙잡히지 않는 하루들.
어떤 날은
컬투쇼에나 나올 법한 장면이 벌어지고,
또 어떤 날은
삼류 드라마에서나 있을 법한
기이한 일들이 일어난다.
또 어떤 날은
너무 잠잠해서
살아 있음이 실감 나지 않는
내 하루의 자취들.
그런 기록을
어디엔가 남겨보려다
브런치에 가입했고
글을 남기려니
작가 심사는 물론
자기소개서와
포트폴리오까지
기록해야 했다.
작가가 될 마음은
감히 -
일도, 품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차는 꽤나 요란했다.
무엇보다
직업을 고르는 칸에서
손이 멈췄다.
배우도 있고,
활동가도 있고,
파일럿도 있는데,
음악가는 없다.
주부를 고르자니
밥상 하나 제대로 못 차리는 주제에
양심에 찔렸고,
예술가를 고르자니
내가??
사기꾼 같아 싫었다.
가르치는 일을 하니
강사가 맞을 것 같긴 한데
그 단어 역시 나를 대변하지는 못한다.
잠시
'나는 누구인가'를 두고
한참을 서성였다.
50년 넘게 피아노를 쳤고
30년 넘게 피아노를 가르쳤다.
학생과 학부모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선생보다는 상담사에
더 가까운 날도 많은
나
강사를 눌렀다 지웠고,
교사를 눌렀다 지웠고,
예술가를 눌렀다 지웠다.
결국
아티스트를 눌러두고
혼자 얼굴이 화끈거려
괜히 주변을 두리번 거린다.
음악가는
왜 없는 걸까.
가수도 있는데
그럼 작곡가는 뭐라고 쓸까
순간 궁금해졌다.
음악가를 넣어 달라고
건의를 해야 하나
잠시 진지하게 고민도 했다.
반 고흐도
그림으로 먹고살지는 못했으니
먹고사는 일을 직업이라 부른다면
그 역시
예술가가 아니라
백수였을지도 모른다.
직업이라는 것이
그것으로 생계를 유지해야만
성립되는 말이라면,
내가 나를 설명하는 직업과
내가 실제로 먹고사는 직업이
다른 사람도 많으리.
직업은
나를 설명하는 단어가 아니라,
나를 잠시 어디엔가 놓아두는
말일지도 모른다.
나는
브런치에서 제공하는
그 어느 직업란에도
들어가지는 못하는 존재.
그래도 여전히
매일을 살아내며
나를 기록하고 있으니,
그것이면
족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