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마다 깨어나는 야성의 기록
밤에 보는 드라마는 낮에 보는 것과는 사뭇 다르다.
낮에 보면 도무지 눈 뜨고 봐주기도 힘든 전개도, 밤이 되면 갑자기 사정이 달라진다.
시시한 줄거리도 그럭저럭 인생사 같아 보이고, 손발이 오그라드는 대사도 괜히 나름의 의미가 있어 보이고,
심지어 덜 떨어진 연기마저도 "저 나름 얼마나 노력을 했겠어." 하고 눈감아 줄만 해 진다.
이쯤 되면 드라마가 좋아진 건지, 내가 수준이 낮아진 건지 헷갈릴 지경이다.
물론, 그건 밤의 힘일 것이다.
밤은 사람을 느슨하게 만들고, 기준을 낮추고, 웬만한 일은 다 이해하게 만든다.
하지만 문제는 그 너그러움이 위장까지 번진다는 데 있다.
낮에는 점잖게 주는 대로 받아먹던 위장이 밤만 되면 갑자기 존재감을 확실히 드러낸다.
마치 "나 너무 오랫동안 참았어, 더 이상은 아냐~"를 외치며 강하게 나를 타격한다.
거기에 뇌까지 합세한다.
이 녀석은 특히 교활해서 늘 그럴듯한 말만 골라한다.
때로는 아주 정교한 가짜 신호까지 보내면서 말이다.
오늘 하루만 먹어라,
인생이 늘 계획대로 흘러가던가,
이게 바로 소소한 행복 아니겠느냐,
돈 많은 연예인들 조차 쉽게 못 누려보는 호사가 먹고 싶은 걸, 먹고 싶을 때, 마음껏 먹는 자유다.
게다가 넌, 요즘 별로 먹지도 않았잖아.
지금 먹고
두어 시간만 더 드라마 보면 되지 않겠느냐며
아주 당당하게, 마치 이성의 얼굴을 하고 나를 설득한다.
그런데 왜
낮에는 좀처럼 들리지 않던 욕망의 목소리가
밤만 되면 이렇게 또렷해지는 걸까.
낮에 TV를 켜면 해야 할 일들이 줄지어 서서 내 이름을 부른다.
청소, 일, 약속, 책임 같은 것들이 리모컨을 빼앗아 들고
불안과 죄책감으로 화면을 껐다 켰다 반복한다.
하지만 밤은 다르다.
밤은 이미 하루가 끝났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모든 변명을 합법으로 만들어 준다.
이 시간은 온전히 내 것이고,
드라마를 보며 무언가를 먹는 일은
게으름이 아니라 하루를 무사히 견뎌낸 사람에게 주는 정당한 포상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드라마는 평론가처럼 보고,
간식은 주인공처럼 먹는다.
내일의 나는 분명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잔소리를 하겠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내일 나의 몫이다.
오늘의 나랑은 상관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