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사람의 이름이 큰 소리로 호명되었다.
“라~크!!!! 엘~두루~스!!!!”
스타디움 전체에 함성이 울려 퍼졌다.
그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둥글게 만들어진 시합 장소로 걸어왔다.
그 중간에 서서 국왕과 공주가 앉아 있는 자리를 향해 바라보고 고개를 숙였다.
‘X’ 표시가 있는 장소에 둘은 섰다.
열 발짝 정도 떨어져 있었다.
경기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가 들렸다.
게임의 규칙은 상대방이 항복하거나 상대방을 둥근 경기장 밖으로 밀어내면 승리하는 것이었다.
두 사람은 한참 동안 움직임 없이 서로를 지켜 보았다.
엘두루스는 목검을 두손으로 쥔채 위로 치켜 세웠고 라크는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목검을 아래로 내린 채 지켜보았다.
관중석도 조용해 졌다.
어느 순간 엘두루스가 목검을 들고 달려왔다.
관중석에서 환호성이 다시 울리기 시작했다.
엘두루스는 지금까지 라크의 경기를 유심히 관찰했다.
나름 라크의 약점을 파악했다고 생각하고 전략을 세웠다.
엘두루스는 베는 척하다가 라크의 배쪽을 찔렀다.
라크가 막아내자, 칼끝을 아래로 한 채 칼날을 가슴 쪽으로 밀어내었고 라크가 막자, 힘으로 밀어내기 시작하였다.
힘으로는 자신이 있는 엘두루스였다.
라크는 ‘아차! 허를 찔렸군. 이 사람의 힘이 보통이 아닌데!’라고 속으로 생각하며 살짝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라크는 경기장 끝까지 밀려났다.
한 발짝만 더 물러서면 실격이었다.
순간 카이르와 대련했던 가장 어려웠던 순간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연구하고 수련 했던 수 많은 해결책중 하나를 떠올렸다.
라크는 순식간에 칼날을 비틀어 엘두루스 칼날 위로 오게 한 뒤 칼을 살짝 들어 밑으로 있는 힘껏 쳐냈다.
그리고 뛰어올라 엘두루스 머리 위로 빙 돌아서 엘두루스 뒤에 섰다.
경기장은 갑자기 조용해졌다.
엘두루스가 몸을 돌릴 순간도 없이 라크는 그를 밀어냈다.
당황하며 중심을 잃은 엘두루스는 경기장 밖에 떨어졌다.
순간, 경기장을 뒤흔드는 환호성이 터졌다.
라크는 쓰러진 엘두루스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어 그를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잠시, 서로의 어깨를 가볍게 껴안았다.
더 큰 환호성이 경기장을 뒤덮었다.
관중석에서 경기를 지켜보던 이레나는 라크의 경기가 진행되는 내내 두 손을 가슴 위로 꼭 모으며 숨을 죽였다.
마지막 장면을 보는 순간, 라크의 품에 안긴 엘두루스 대신 자신이 그 안에 있는 상상을 하는 자신을 깨닫고 얼굴이 붉어졌다.
다음 날 아침, 라크는 다시 경기장에 섰다.
이번 상대는 귀족이었다.
라크는 그의 얼굴에서 뻔한 오만함을 읽어냈다.
국왕에게 인사를 올리는 순간, 그 귀족은 라크를 향해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이 근본도 없는 놈아… 오늘 내가 너를 끝장내 주마.”
경기가 시작되자, 귀족은 자신감 넘치게 목검을 높이 들고 달려들었다.
그러나 라크는 단 한 번의 움직임으로 그의 칼을 가볍게 막아낸 뒤, 칼등으로 상대의 목 뒤를 정확히 가격했다.
순간 귀족은 무너진 허수아비처럼 바닥에 푹 쓰러졌다.
지금까지 대결에서 라크는 상대편의 자존심을 살려주는 방식을 취했으나 이번에는 예외였다.
심판이 다가와 더이상 싸울 수 없는 상대의 상태를 확인한 뒤, 오른팔을 번쩍 들며 선언했다.
“승자! 라크!!”
조용했던 경기장은 폭발하듯 함성으로 뒤덮였다.
관중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소리를 지르며 박수를 쳤고, 라크는 여전히 담담한 표정으로 관중석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조용히 경기장을 떠났다.
결승전 날이 되었다.
병사 스무 명이 주어졌고 한 명의 조력자를 지명할 수 있었다.
양쪽에 스물두 명씩 총 사십네 명이 참가하는 경기였다.
라크의 상대는 왕국의 군사를 총지휘하는 도리아 크사르 장군의 장남 헤르 크사르였다.
라크는 엘두루스를 헤르 크사르는 그의 아버지를 조력자로 지명했다.
마지막 경기는 왕성 밖 어느 장소에서 열렸다.
여기에는 왕족, 고위 관료, 소수의 귀족만이 참관할 수 있었다.
그들을 위해 경기장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곳에 자리가 마련되었다.
오백 미터 정도 떨어진 거리에 작은 언덕 두 개가 있었고 언덕의 정상에는 노란색과 파란색 깃발이 각각 꽂혀 있었다.
언덕 사이에는 평지였다.
상대편 깃발을 뺏으면 최종 승자가 되었다.
이번 경기에서는 목검이 아닌 금속으로 된 칼이 사용되었다.
양쪽의 참가자들은 각각 해당 팀 색에 맞는 조끼를 입었는데 칼로 조끼를 찌르거나 베었을 경우 조끼에서 빨간색 액체가 나왔다.
그러면 그 즉시 죽은 자로 간주해 엎드려 있거나 경기장 밖으로 물러나야 했다.
언덕 근처에서 경기 시작 전 한 시간 동안 배정된 병사들을 데리고 작전을 논의할 수 있었다.
라크는 자기에게 주어진 병사들을 하나하나 살펴보았다.
엘두루스는 이미 라크의 어떤 명령이라도 따를 준비가 되어 있었다.
스무 명 병사의 검술과 달리기 실력을 모두 점검한 이후에 라크는 가장 검술 실력이 좋은 병사 세 명과 발이 빠른 병사 두 명을 골랐다.
그리고 작전을 설명했다.
그때 한 병사가 말했다.
“저쪽은 왕국 최고의 실력을 가진 병사들이 배정되었어요.
거기다 상대편의 실질적인 지휘관은 왕국 최고의 장군입니다.”
그 말에 병사들의 눈에는 두려움이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라크는 그냥 빙그레 웃고는 그 병사에게는 자신과 함께 움직이라고 명령하였다.
드디어 시작을 알리는 나팔 소리가 울렸다.
라크는 노란색 깃발을 들고 여섯 명의 병사와 함께 적진을 향해 달렸다.
적진에 어느 정도 다가 가서 깃발을 뺏어 보라는 듯 약간 조롱하듯 깃발을 흔들었다.
이 모습을 본 도리아 크사르 장군은 ‘이게 뭐하는 짓이야’라고 생각하였다.
갑자기 라크는 함께 온 여섯 명의 병사와 함께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고 전속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저들을 잡아라. 두배의 병력으로 빨리 깃발을 뺏으면 우리의 승리다” 라고 말하며 도리아 크사르 장군과 열두 명의 병사가 깃발을 뺏고자 달려 나왔다.
라크는 최대한 멀리 오른쪽으로 이동하여 어느 순간 멈추고 진영을 갖추었다.
라크가 크사르 장군이 오는 방향으로 맨 앞에 서고 그 옆에 마지막에 데려온 병사를 세운후 검술 실력이 좋은 병사 세 명을 뒤에 있게 했다.
발이 빠른 병사 두 명은 조금 더 멀리 떨어져 서 있었다.
드디어 두 진영을 맞붙었다.
라크는 순식간에 세명의 병사를 베고 - 게임에서 이탈하게 만들고- 도리아 장군과 서로 칼을 맞대었고, 라크 옆에 서 있던 병사를 방패 삼은 라크 진영의 검술 실력자들은 다른 병사들과 서로 싸우기 시작했다.
막상막하였다.
어느 순간 라크는 깃발을 크게 흔들었다.
그러곤 싸움에서 한 발짝 벗어나 있던 가장 발이 빠른 병사에게 깃발을 던졌다.
그 병사는 그 깃발을 들고 아무도 없는 방향으로 달렸다.
그순간, 엘두루스는 남은 병력을 이끌고 함성을 지르며 파란색 깃발이 있는 곳으로 달려 나갔다.
엘두루스는 곧장 헤르 크사르를 향해 달려들었다.
오른쪽에서 펼쳐지는 전투 과정을 멍한 얼굴로 쳐다 보고 있던 청군 진영은 갑작스러운 공격에 급격하게 무너지기 시작했다.
거기다 병력도 열세였다.
헤르 크사르는 엘두루스의 힘에 못이겨 쓰러졌다.
도리아 장군은 ‘아차!’ 싶어 진영으로 돌아가려 했으나 이미 상당히 떨어져 있었다.
마침내 노란 조끼를 입은 한 병사가 파란 깃발을 높이 들고 흔들었다.
라크의 완벽한 승리였다.
이것을 본 이레나는 기뻐 소리를 질렀고, 어떤 귀족들은 한숨을 내쉬었다.
다음 날 아침 관리 시험의 수석을 뽑는 자리가 열렸다.
라크도 그 자리에 있었다.
최종 세 명 중 한 명으로 선택된 것이다.
부정을 방지하기 위해 수험번호와 이름이 함께 있는 명단은 시험 접수 당일 왕만이 열 수 있는 왕실 금고에 보관되었다.
그리고 세 명의 답안이 올라왔을 때 왕이 그 답안을 직접 보고 세 명의 이름을 알려 주었다.
십이 년 전 최고 권력을 가진 귀족 가문의 아들을 합격시키고자 시험 감독관들은 평민이 낸 답안지와 바꾸었다.
그 당시 왕은 결과만 보고 받았다.
왕은 바뀐 합격자를 비서로 임명하였는데 지나치게 일을 못 하고 아는 게 없었다.
의심이 든 왕은 은밀히 조사를 시켰는데 이러한 사실이 드러났다.
그 귀족 가문은 귀족 작위를 박탈당하였고 관련된 자들은 모조리 유배를 갔다.
그리고 수소문 끝에 진짜 답안의 주인을 찾아내고 등용하였다.
그가 현재 왕국 재무대신으로 있는 엘사르 누르이다.
그 사건 이후 이러한 최종 면접 시스템을 만든 것이다.
라크의 답안은 거의 완벽에 가까웠다.
현재의 정세를 정리하고 앞으로 일어날 수 있는 사건들을 나열하고 그에 대한 대비 방안이 적혀 있었다. 왕국 재정을 늘일 수 있는 방안을 포함해서…
이에 따라 당장 정책을 만들 수도 있는 수준이었다.
세 명은 궁전 안 가장 큰 접견실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문 안에서 세 명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고 문이 열렸다.
문 안으로 걸어간 그들은 들어가서 긴 탁자 앞 자신의 이름 앞에 나란히 섰다.
왕좌에는 고드림 벨사레인 2세가 앉아 있고, 양옆으로는 주요 신하들과 귀족 대표들이 자리했다.
은으로 만든 작은 왕관을 쓴 이레나 공주도 국왕의 옆에 앉아 있었다.
라크를 보자 이레나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왕에게는 원본이 그리고 공주, 신하, 귀족 대표의 손에는 필사된 답안이 들려 있었다.
답안지 맨 첫 장에는 이름도 함께 적혀 있었다.
국왕 옆에 서 있던 사람이 말했다.
“맨 왼쪽에 있는 자부터 이름을 밝히고 간단히 소개하시오.”
라크부터 시작하였다.
“저의 이름은 라크입니다. 지금은 사라진 하이델 마을 출신입니다.”
라크가 말을 끝마치자, 오른쪽에 있는 참가자가 떨면서 말했다.
“저… 저의 이름은 레… 레온 하르크입니다. 저… 저희 집안은 와… 왕국 내에서 직물을 유통하고 이… 있습니다.”
마지막 면접자가 입을 떼었다.
“저는 크라이엘 에이크입니다. 에이크 가문 출신입니다.”
에이크는 최고 귀족 가문이어서 더 이상의 소개는 필요가 없었다.
왕은 그 세 명을 쭉 보고는 말했다.
“그대들이 보던 답안은 짐이 모두 읽어 보았다.
하나하나 모두 훌륭하였다.
앞으로 등수와 상관이 없이 그대들은 왕국의 최고 인재이며, 앞으로 왕국의 안녕과 번영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짐이 하나만 묻겠다.
‘백성은 물과 같아서 배를 띄우기도 하지만 배를 뒤집을 수도 있다.’
이 말의 의미를 크라이엘 에이크부터 한 명씩 답해보라.”
크라이엘은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었다.
“폐하, 백성은 다스림의 대상입니다.
물은 본래 형체가 없고, 배는 견고하고 단단합니다.
배가 뒤집히지 않게 하려면, 물이 넘지 못하도록 단단한 방벽을 쌓아야 합니다.
백성이란 그저 귀족의 지도 아래 있어야 하는 존재일 뿐입니다.”
귀족들 사이에서 고개를 끄덕이는 이들이 있었다.
그들은 ‘역시… 귀족 가문답게 현실을 잘 아는군.’이라고 생각하였다.
레온은 살짝 긴장된 얼굴로 깊게 숨을 들이켰다.
“폐하, 물이 넘치지 않게 하려면 강둑을 잘 관리해야 하듯, 백성이 배를 뒤집지 않게 하려면 그들의 불만을 미리 듣고 조율해야 합니다.
세금과 시장, 무역 모두가 백성의 땀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 흐름을 잘 살피면 배는 오히려 더 높이, 더 멀리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답변을 들은 사람들은 ‘확실히 상인 가문답게 답변하는군.’이라고 생각하였다.
마지막 답변자인 라크는 침착하게 대답했다.
“폐하, 물은 배를 띄우기도, 뒤집기도 하지만 본래 물의 성질은 늘 같습니다.
배를 띄우고 뒤집는 건 결국 배의 무게, 균형, 그리고 그 안에서 무엇을 싣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백성은 늘 그 자리에 있습니다.
변해야 하는 것은 배에 탄 자들입니다.
백성이 등을 돌리게 만들지 않게, 먼저 배 안에서부터 무게를 바로잡아야 합니다.
백성을 잘 다스리면 나라가 안정되지만, 백성을 등한시하면 나라가 망할 수 있습니다.”
귀족들 사이에서는 약간의 찡그림이 보였고, 일부 관리들은 놀란 눈빛을 주고받았다.
이레나 공주는 자리에서 살짝 미소를 지으며 끄덕였다.
국왕 고드림 2세은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이레나가 어쩌면 한 달 전 용을 데려왔는지도 모르겠구나.’
침묵이 조금 흐른 후 그의 앞에 서 있는 세 명을 바라보며 엄숙한 목소리로 왕은 말했다.
“세 사람의 답변이 모두 훌륭하도다.
그대들의 답안을 보고 짐이 생각하는 등수대로 왼쪽부터 세웠다.
조금 전 답변으로 짐은 순서가 바뀔 이유는 없다고 생각한다.”
양쪽에 앉아 있는 참관자들을 훑어보며 왕은 말했다.
“이 결과에 불만이 있는 사람은 지금 말하시오.”
왕은 잠시 기다렸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자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오늘부터 그대들은 내 신임을 받는 자들이다. 스스로 무게를 알고 행동하라”
잠시 후 왕과 공주는 자리를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