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벨사레인 왕국 인재 선발 대회에 참가한 라크

by 현상

이레나는 초조했다.

남쪽 국경에서는 라크가 지나갔다는 아무런 보고도 없었다.

라크는 페로를 타고 하늘을 날아갔기 때문에 국경의 병사들이 알 수 없었다.


다른 국경 검문소를 확인해 보아도 라크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도대체 어디로 간 거야?’

지금이라도 당장 성문을 박차고 달려 나가 라크를 찾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이레나는 마지막 헤어지기 전 접견실에서 라크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던 모습을 계속 기억해 내었다.

‘그는 절대로 약속을 어길 사람이 아니야.’


대회 접수 마감 사흘 전, 드디어 소식이 날아들었다.

비토르 지역과 접한 남쪽 국경에서 라크가 국경을 통과해 왕국 수도로 올라오고 있다는 보고가 들어온 것이다.


이레나는 그 소식을 듣는 순간 안도의 한숨을 몰아쉬었다.

가슴 한가운데 묵직한 돌덩이가 덜컥 내려앉는 듯한 느낌이 들었고, 동시에 눈가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입술을 꽉 깨물며, 간신히 눈물을 삼켰다.

‘라크… 약속… 지켜줘서 고마워…’

하지만 라크가 역관을 이용했다는 보고는 들어오지 않았다.

예상한 경로가 아닌 다른 길로 조용히 들어왔다는 뜻이었다.


이레나는 라크가 도착했을 만한 시간에 맞춰 시녀의 옷을 입고 망토를 쓴 채 대회 접수 장소로 나가 보았다.

라크가 서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페로가 서 있었다.

당장이라도 달려 나가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면 이 대회를 망칠 것 같아 주저하였다.

가까이에 있는 장교를 불러 저분은 특별 초대장을 가진 분이니 빨리 처리해 달라고 하는 게 이레나가 지금 할 수 있는 전부였다.


한편, 벨사레인 왕 고드림 벨사레인 2세는 심기가 불편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왕 본인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러나 문제는 주변의 유력 귀족 가문들이 들고일어나기 시작했다는 점이었다.


벨사레인 왕가의 왕위 계승권자는 전통적으로 외국 왕가의 혈통과만 혼인해 왔다.

고드림 왕 자신은 드라모니아 왕국에서 온 왕비를 진심으로 사랑했고, 그 사이에서 태어난 딸 이레나도 그러길 바랐다.

그래서 여러 국가의 왕가와 접촉해 혼담을 준비했지만, 문제는 이레나가 그 모든 것을 완강히 거부했다는 점이었다.


거기다 비토르 지역의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자신 있게 말하고 나가서는 동행했던 왕국 최고의 경호대 열 명은 몰살되었고, 이상한 남자를 데려왔다는 소문이 왕국 곳곳에 퍼지고 있었다.

평소 왕가의 권위를 실추시키고 싶어 했던 이들은 이 소문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하지만 다른 소문도 돌았다.

국경에서 왕성까지 라크와 함께 이동했던 경호대, 그리고 역관과 왕실 관리인들은 라크의 겸손한 태도와 늘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는 침착한 자세에 큰 호감을 품고 있었다.


또한 왕성에 입성할 때, 공주의 마차 뒤를 따르던 그 남자의 정체를 궁금해하던 이들이 많았다.

집 창문 너머로, 혹은 길가에서 본 사람들은 허름한 옷차림에도 불구하고 잘생기고 기품 넘치는 라크의 모습에 감탄했고,

‘사실은 신분을 감춘 왕자일 것이다’라는 풍문이 왕국 전역에 빠르게 퍼져 나갔다.

소문은 소문을 낳고, 라크가 왕국을 떠난 뒤 한 달 내내 그는 자신도 모르게 왕국의 화제의 최대 중심에 서 있었다.


벨사레인 왕국은 인재를 등용하기 위해 이 년마다 대규모 행사를 열었다.

지금의 국왕이 즉위한 뒤 새롭게 만든 제도였다.


특징적인 것은 귀족뿐만 아니라 평민도 응시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관리(문관)를 뽑는 시험과 군 장교를 발탁하는 검술 시험, 두 가지가 마련되어 있었고,

두 시험 모두 응시할 수도 있었지만, 지금까지 두 개 모두 치른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런데 라크가 접수처에 초청장을 내밀며 두 시험 모두 응시하겠다고 말했을 때, 접수를 담당하던 관리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라크를 바라보았다.

겉모습으로 봐도 평민인데, 두 가지 시험 모두 참가하겠다니…

게다가 초청장에는 국왕의 명의가 찍혀 있었다.

평민이 응시하려면 보통 고위 관리, 지방 영주, 혹은 귀족의 추천서가 있어야 하는데, 이 청년은… 국왕의 특별 초청장이라니…


수험표를 받은 라크는 페로와 함께 조용히 어디론가 사라졌다.

이레나는 시녀들을 시켜 라크가 어디에 머무는지 찾아보게 했지만 끝내 찾지 못했다.

‘아… 또 어디선가 모닥불 피워놓고 별을 보며 자고 있겠지…’

이레나는 라크와 함께한 그때를 떠올리며 자신도 모르게 살짝 미소를 지었다.


시험 기간 동안 왕성 안은 물론 주변까지 숙박비가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수험생뿐만 아니라 가족, 그리고 검술 시합이라는 최고의 구경거리를 보기 위해 전국에서 인파가 몰려들었기 때문이다.

모르는 여러 명이 한 방을 나눠 쓰는 것은 이 시기 흔한 풍경이었고, 심지어 검술 시합의 결과를 놓고 사설 도박장까지 성황리에 열렸다.


검술 시합은 마지막 토너먼트를 위해 귀족에서 여섯 명, 평민에서 두 명을 선발했다.

그리고 그 두 명에게는 즉시 기사 작위가 주어졌다.

귀족들이 평민들과 칼을 맞대는 것을 수치스럽게 여겼기 때문에 마련된 일종의 정치적 타협이었다.

평민 출신의 두 명은 먼저 겨루고, 승자가 준결승에 올라가 귀족과 맞붙었다.

최종 승부는 전쟁 시뮬레이션, 즉 이십 명의 병사를 이끌고 상대편의 깃발을 빼앗는 ‘전쟁 게임’으로 치러졌다.


사실 처음 이 제도가 시행된 이십 년 전, 평민 출신이 우승하는 바람에 귀족들이 크게 충격을 받았고, 이후 국왕을 설득해 제도를 바꿔 평민에게 불리한 구조로 바꿔 놓았다.

그 뒤로 평민 출신 우승자는 단 한 명도 나오지 않았다.


관리를 뽑는 시험은 한 번만 치러졌다.

다섯 명으로 구성된 시험 감독관들이 우선 스무 개의 답안지를 선택하면 세 명의 고위 관리가 논의하여 최종 세 개를 골랐다.

최종 선택된 세 명은 국왕과 귀족, 관리들이 보는 앞에서 최종 면접을 치르고 일, 이, 삼등이 결정되었다.

문제는 시험장에서 공개되었고, 답안지에 수험 번호 이외에 인적 사항을 적으면 탈락했다.

시험 첫날이 밝았다.


나팔 소리가 왕국 곳곳에 울려 퍼지며 행사의 시작을 알렸다.

사람들은 검술 시험이 열리는 시험장으로 몰려갔다.

검술 시합만 천 명이 넘는 응시자가 몰렸고, 예선부터 결승까지 약 보름 동안 진행되도록 여러 경기장이 설치되었다.


라크는 둘째 날 아침, 관리 시험을 먼저 치러야 했다.

그날 오후에는 곧바로 검술 시합이 예정돼 있었다.


둘째 날, 이른 아침.

라크는 시험장으로 들어갔다.

곧 사람들로 가득 찬 시험장 안에 시험 감독관들이 입장했고, 답안을 작성할 종이를 나눠주고 난 뒤 ‘댕!’ 하는 종소리와 함께 문제가 공개되었다.


‘루벤하르와 칼디아 왕국의 불안정한 정세로 인해 왕국의 무역은 많이 감소하고 있으며, 이에 따라 왕국의 재정에 큰 영향을 주고 있다. 이를 해결할 방안을 제시하라.’


답안을 작성하기 위해 주어진 시간은 세 시간.

하지만 두 시간이 지나자, 라크는 제일 먼저 답안을 제출하고 시험장을 나섰다.


간단히 점심을 먹은 라크는 곧바로 검술 시합장으로 이동했다.

그곳에서 목검을 받았다.


라크는 대회 내내 화제의 중심이었다.

상대방은 늘 날을 세우며 공격 태세로 다가왔지만, 라크는 목검을 아래로 내린 채 차분히 기다렸다.

상대가 달려들면 단 한두 번의 동작으로 그대로 제압했다.

라크는 대륙 최고의 검술사인 카이르로부터 배웠고 거기다 별의 병법서에 나온 검술까지 더해져 상대가 될 사람이 없었다.


라크는 시합에서 이기면 세리머니도 취하지 않았고 상대방의 손을 잡고 일으켜 준 뒤 조용히 경기장을 떠났다.

사람들은 점점 그의 경기를 보기 위해 몰려들었고, 한 달 전 공주의 마차 뒤를 따르던 남자라는 소문까지 퍼지면서, 라크가 출전하는 경기장은 전날 밤부터 사람들이 몰려들어 자리싸움이 벌어졌다.


시녀들은 매일 이레나에게 경기 결과를 보고했다.

평소 같으면 전혀 관심도 보이지 않던 공주가, 이번에는 귀족 경기 결과는 던져놓고 평민 경기 결과만 찾아보았다.

그리고 그 승자 명단에서 라크의 이름을 발견하면, 이레나는 감추지 못한 기쁨에 소리 내 웃거나 팔짝팔짝 뛰어올랐다.

평민부 최종 두 명에 라크가 선발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때, 이레나는 기쁨을 감추지 못한 채 방 안을 돌며 환호성을 질렀다.


팔 강전, 즉 준준결승부터는 왕국에서 가장 큰 경기장에서 경기를 치렀다.

최대 오천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이 경기장은 이미 전날부터 사람들로 붐볐고, 팔 강전 당일 아침에는 발 디딜 틈조차 없을 만큼 관중들로 꽉 채워졌다.


이번 경기부터는 왕가를 위한 특별관람석도 마련되었다.

중앙에는 국왕 고드림 벨사레인 2세와 공주 이레나가 나란히 앉았고, 양옆으로는 주요 귀족 가문의 수장들과 고위 관리들이 자리했다.


과거에 왕가는 준결승부터 참관하였으나, 이번에는 이레나가 국왕을 팔 강전이 열리는 며칠 전부터 졸랐다.

이레나는 관람석에 앉아 긴장된 표정으로 경기장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심장이 두근대는 것을 느끼며 라크의 등장을 기다렸다.


팔 강전 전날 저녁, 왕궁에서는 특별한 행사가 열렸다.

평민부 최종 두 명에게 기사 작위를 수여하는 행사였다.

이는 전통이자 관례였다.

귀족들이 평민과 공식적으로 칼을 맞대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평민이 준준결승에 오르면 기사 작위를 주어 신분을 귀족 계급으로 끌어올렸다.


라크는 단정한 검은 제복을 입고 왕궁에 섰다.

그의 곁에는 또 다른 평민부 준결승 진출자가 함께 서 있었으나, 사람들의 시선은 거의 모두 라크에게만 쏠렸다.

그의 또렷한 이목구비, 차분한 눈빛, 그리고 무언가 사람을 끌어당기는 기품이 귀족들조차 자꾸 그를 눈여겨보게 만들었다.


국왕 고드림 벨사레인 2세는 대리인을 통해 공식 절차를 진행했다.

먼저, 기사의 검과 문장이 수여되었다.

라크는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고, 국왕의 대리인은 검의 평평한 면을 라크의 양어깨에 번갈아 얹으며 선서문을 읽었다.

“라크, 너는 이제 벨사레인 왕국의 기사로서 왕국의 명예와 정의를 위해 검을 드는 자다.

왕국과 왕실, 백성을 지키기 위해 힘을 쓸 것을 맹세하는가?”

라크는 조용히, 그러나 분명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맹세합니다.”


귀족들은 형식적으로 박수 쳤지만, 속마음은 달랐다.

‘저런 이름 없는 놈이 기사 작위를?’

‘얼굴은 그럴싸하지만 어디 출신인지도 모르는 자잖아.’

‘얼굴값 하나로 사람들 주목을 받는군. 말괄량이 어린 공주도 그에게 마음이 있는 게 아닐까?’

‘저런 평민 주제에 결승에라도 올라간다면… 어림없는 소리지.’

귀족들 사이에는 저마다의 속마음과 불만, 그리고 은근한 경계심이 퍼져갔다.


특히 몇몇 유력 가문은 눈에 띄게 시선을 좁히며 서로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지금까지 대회에서 평민 출신이 최종 승자가 나온 적은 한 번뿐이었다.

그것도 귀족들의 강한 반발 끝에 규칙이 바뀌면서 더 이상 반복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이상하게 분위기가 묘했다.

사람들은 내심 라크가 그 ‘두 번째’가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결혼할 나이에 있는 딸을 가진 귀족들은 다른 시선으로 라크를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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