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헤어짐, 그리고 스승 님들과의 재회

by 현상


행렬이 수도의 성벽 가까이 다가서자, 성벽 위의 나팔수들이 일제히 나팔을 불었다.

“뿌—웅~”

길게 울리는 소리는 공중을 가르며 도시 전체에 메아리쳤다.


그 소리에 맞추어 무겁고 두꺼운 성문이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마침내 행렬이 성안으로 들어서자, 새로운 기마병들이 나타나 라크와 그 일행의 양옆으로 줄지어 호위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이전의 호위병과는 달랐다.

번쩍이는 금색 갑옷과 붉은 망토, 정교한 문양이 새겨진 투구를 쓴 채 위풍당당했다.

그들의 손에는 라크가 책에서 보았던 벨사레인 왕국의 문장이 새겨진 깃발이 들려 있었고, 행렬의 속도는 점점 느려지더니 마침내 걷는 속도가 되었다.


도시 사람들은 행렬이 지나가는 길 좌우로 엎드려 고개를 숙였고, 숨죽인 채 이 장엄한 행렬을 지켜보았다.


행렬은 좁은 돌길을 지나 조금 더 전진했다.

그러자 시야 너머로, 수도에서 가장 높은 언덕 위에 우뚝 솟은 왕궁이 모습을 드러냈다.


회색과 은빛으로 빛나는 성벽은 거대한 산처럼 웅장했고, 탑과 첨탑들은 구름을 뚫을 듯 높이 솟아 있었다.

빛을 받은 왕성의 깃발들이 찬란하게 펄럭이며, 왕국의 위엄을 뽐냈다.

행렬이 가까이 다가가자, 은색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이레나를 태운 마차는 어디론가 갔다.

단정하게 옷을 입은 여인이 라크의 앞에 와서 공손하게 말했다.

“공주님의 목숨을 구해 준 용사님.

접견실에서 조금만 기다려 주시겠어요.

제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라크는 여전히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녀를 따라갔다.


접견실에는 온 갓 먹을 것이 가득했다.

하지만 라크는 아무것도 먹지 않고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는 아직도 자신이 이레나에게 느끼는 감정이 무엇인지, 그 마음의 정체를 명확히 알지 못하고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조용히 열리는 문소리에 고개를 든 라크는, 예전과는 전혀 다른 모습의 이레나를 바라보았다.

이전의 여행자 같은 모습이 아니라, 화려한 드레스와 장신구로 꾸민, 누가 봐도 ‘왕국의 공주’로서의 위엄을 갖춘 모습이었다.


이레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라크… 정식으로 인사드리겠습니다.

저는 벨사레인 왕국의 공주, 이레나 벨사레인입니다.

저를 구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그녀는 잠시 말을 멈추고 숨을 고르더니, 약간 떨리는 손으로 치맛자락을 꼭 쥐었다.


“그리고… 속였던 것은 정말 죄송해요.

고의는 아니었지만, 어머님의 이름을 말한 것도요.

그 부분은… 용서해 주세요.

사실 그게… 계속 제 마음을 아프게 했어요.”


이레나는 울음을 참으려 애쓰는 듯 보였다.

하지만 라크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그런 것은 이제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잠시, 어머니의 얼굴이 떠올랐다.

라크의 어머니도 무척 아름다운 분이었다.

문득, 어머니가 젊었을 땐 이레나와 닮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이레나는 주변 시녀들을 물렸다.

이제 접견실에는 오직 라크와 이레나, 둘만 남았다.

조용히 다가온 이레나는 라크에게 두 장의 종이를 내밀었다.

“라크… 하나는 다음 달, 정확히 삼십 일 뒤에 시작되는 왕국 내 최고의 인재를 뽑는 대회의 초청장이에요.

이 초청장을 가져오면 참가할 수 있어요.

부탁이에요… 약속해 줘요.

그날, 그곳에서 라크를 다시 볼 수 있을 거라는 걸.”


라크는 잠시 생각하더니,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레나는 또 하나의 문서를 내밀며 말했다.

“그리고… 이건 어디든 벨사레인 왕국의 관련 영지에 계실 땐 편히 숙박하실 수 있고, 모든 국경을 자유롭게 통과하실 수 있는 증서예요.

다음 달 대회에 오실 때, 국경에서 이걸 보여주세요.”


“저를 속인 것은 신경 쓰지 마세요.

저는 그때 누군가를 지키고 싶었고 저의 신념을 따른 것뿐입니다.”

라크의 말에 이레나는 결국 흐느끼며 라크를 와락 끌어안았다.

누가 이 광경을 보았다면 왕국 전체가 뒤집힐 만큼 큰 사건이었다.


이레나는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은 채, 조용히 떨리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제가… 차라리 시녀였으면 좋겠어요.”

라크는 살짝 놀란 듯 그녀를 바라보다,

조심스레 손을 들어 이레나의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주었다.


그리고 부드럽게, 그러나 단단한 목소리로 말했다.

“세상에 정해진 운명 같은 건 없습니다.

그러니… 스스로를 가두지 마세요.”


다음 날 아침, 라크와 페로는 왕성을 떠났다.

이레나는 며칠 더 머물다 가라고 말했지만, 라크는 그녀에게 알리지도 않은 채, 새벽의 차가운 공기를 가르며 길을 나섰다.

성문에 다다르자, 경비병들이 고개를 숙여 경례하며 조용히 문을 열어주었다.


아무도 없는 언덕으로 향한 라크와 페로는, 거기서 함께 하늘로 날아올랐다.

왕국 수도 익사트레가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해상 무역 중심지의 위용답게, 도시는 바닷가를 따라 길게 뻗어 있었고, 바다 쪽을 제외한 외곽은 깊은 해자가 성을 둘러싸고 있었다.

바닷가 쪽도 단 하나의 항만 외에는 깎아지른 절벽이라 배의 접근이 거의 불가능했다.

가장 높은 언덕엔 웅장한 왕성이 자리하고 있었고, 큰 항구에서는 수많은 배들이 닻을 내린 채 사람들과 물자들이 분주히 오갔다.

왕성에서 항구로는 좁은 길 하나가 이어져 있었고, 극단의 경우 왕실 가족이 그 길로 탈출할 수 있어 보였다.

‘하지만 완벽해 보이는 곳에도 항상 약점은 존재한다.

그리고 그 약점은, 때로는 더 치명적으로 작용할 수 있다.’

라크는 ‘별의 병법’에서 읽었던 구절이 떠올라 살짝 미소 지었다.

익사트레의 모습을 기억에 새긴 라크는 페로에게 말했다.

“페로… 이제 집으로 가자. 스승님들이 계신 곳으로…”

페로는 힘차게 날갯짓하며 라크의 집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협곡 막다른 골목의 바위벽 앞, 라크와 페로는 조용히 섰다.

페로는 이 지역 말의 모습에서 용에서 바로 변신했었던 검은 털과 붉은 털을 가진 말의 모습으로 돌아가 있었다.


라크는 에스마가 가르쳐줬던 대로, 낮고 빠른 목소리로 별의 언어 주문을 읊조린 뒤, 지팡이 끝의 별 장식으로 바위를 ‘톡, 톡, 톡’ 세 번 두드렸다.

순간, 바위벽 중앙에 가느다란 금빛 선이 나타나며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라크는 페로와 함께 그 안으로 조용히 걸어 들어갔다.

식탁에서 이야기를 나누던 에스마와 카이르는 고개를 들고 놀란 눈으로 라크를 바라보았다.


마치 유령을 본 듯한 얼굴이었다.

그들의 예상보다 한 달 이상 일찍 라크가 돌아왔기 때문이었다.

매일 날짜를 세며 라크의 안부를 걱정하던 두 사람은, 혹시 소식이 없으면 데보르 산으로 라크의 시신을 찾으러 가야 하나 고민까지 하고 있었다.

“라크… 정말 너니?”

에스마와 카이르는 동시에 외쳤다.

라크는 환하게 웃으며 두 사람을 향해 달려갔다.

“스승님, 저예요! 제가… 돌아왔어요.”


세 사람은 서로를 껴안았다.

에스마와 카이르는 믿기지 않는 듯, 라크의 얼굴을 몇 번이고 쓰다듬으며 바라보았다.

“라크야… 정말 잘 돌아왔다… 우리가 너를 보내 놓고 얼마나 걱정했는지 모른단다.”

에스마는 눈가로 흐르는 눈물을 손등으로 훔치며 웃었다.

“배고프지? 얼른 밥을 차려주마. 오늘은 네가 좋아하는 걸로 가득 차려 줄게.”


그러자 라크가 밝게 웃으며 말했다.

“스승님들, 저… 친구를 데려왔어요.”

라크의 말에 에스마와 카이르는 동시에 고개를 돌려 라크 옆에 선 말을 바라보았다.


“제 이름은 페가팔로스, 보통은 페로라고 불러요.

라크가 이름을 지어 주었어요.”

페로가 고개를 살짝 숙이며 말했다.


에스마는 깜짝 놀란 듯 입을 살짝 열더니, 이내 무언가 깨달은 듯 중얼거렸다.

“페가팔로스… 용의 용기… 갈릴로스의 유산이로구나…”

라크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스승님. 이 친구는 하늘을 나는 힘이 있어요. 덕분에 제가 예상보다 훨씬 빨리 돌아올 수 있었어요.”

카이르는 감탄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라크… 정말 대견하구나. 너는 우리 기대를 훌쩍 뛰어넘었구나.”


에스마는 따뜻한 미소로 말했다.

“이야기는 조금 이따 들려주렴.

우선 씻고 쉬고 있어라.

그동안 내가 맛있는 저녁을 준비할게.”


라크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스승님. 저, 우선 페로에게 여기를 소개해 줄게요.

이 친구는 별 언어로 저랑 대화할 수 있어요.

물론 스승님들이 별 언어로 얘기하시면 알아들어요.

요즘은 에일런 별의 언어도 열심히 공부하고 있어요.”

에스마와 카이르는 놀란 듯 다시 한번 페로를 바라봤다.


라크는 페로를 데리고 집 안을 천천히 둘러보며 설명했다.

먼저 오래된 책들로 가득한 도서관, 샤워장, 그리고 자신이 쓰는 아늑한 방을 보여주었다.

뒤뜰로 나가 작은 채소밭과, 페로가 자유롭게 뛰어놀 수 있을 숲도 가리켰다.

“여기는 내가 삼 년간 살던 곳이야.

밭에는 에스마 스승님이 직접 기른 채소가 있고, 숲은 네가 원하면 언제든 사냥하러 다녀도 괜찮아.”

페로는 기분 좋은 듯 콧김을 내뿜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라크는 씻고 새 옷으로 갈아입었다.

부엌으로 가서 스승님들의 식사 준비를 도왔다.

“그런데 페로는 뭘 먹니?”라는 카이르의 말에

“숲에서 알아서 먹고 올 거예요.”라고 라크는 대답했다.


그들은 오랜만에 식탁에 함께 앉았다.

따뜻한 불빛 아래 에스마, 카이르, 라크는 식탁에 함께 앉아 있었다.


라크는 스승님들에게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하나하나 이야기했다.

세 번의 시험, 갈릴로스 제국의 유산, 이레나와의 만남, 그리고 페로…

때론 웃음이 터지고, 때론 눈가가 붉어졌다.

에스마와 카이르는 그 어려운 시험을 통과한 것에 대해 대견해했다.


즐거운 식사가 끝나고 라크는 책, 칼, 그리고 방패를 식탁 위에 놓았다.

라크는 웃으며 말했다.

“방패는 그냥 선물이래요.”


에스마는 호기심 어린 손길로 책을 열어보려 했다.

그러나 책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라크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페로가 이야기하길 이건 갈릴로스 제국의 후손만이 열 수 있대요.

에스마가 저 이외에 이 책을 처음으로 열어보려 한 사람이에요.

죄송해요. 저도 이 책에 어떤 마법이 걸려 있는지는 정확하게 몰라요.”


“괜찮다. 라크… 이건 너만이 볼 수 있는 책이야.

우리는 네가 이사벨의 아들로서 갈릴로스 제국 왕가의 유일한 후손이라는 것과 세 가지 시험을 무사히 치르고 제국의 유산을 가져온 것만 하더라도 우리의 소원을 이룬 것 같구나.”

에스마의 눈가에 눈물이 살짝 맺혔다.


라크는 잠시 머뭇거리다 품속에서 두 개의 문서를 꺼냈다.

하나는 한 달 뒤에 있는 벨사레인 왕국 최고 인재를 뽑는 대회의 초청장이었고, 다른 하나는 어디든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왕실 문서였다.

“제가 여기에… 참석해야 할까요?”

라크가 조심스레 물었다.


“당연히 참석해야지.

갈릴로스 제국의 후손으로서 이 별을 먼저 통합하자면 너를 도와주는 강력한 세력이 있어야 해.

벨사레인 왕국은 이 대륙의 무역을 장악하고 있어.

라크 네가 아무리 혼자 강하다고 해도 이 지역의 유력한 가문의 도움이 없이는 절대 그 꿈을 이룰 수 없어.

우리가 강한 군대를 가지고 있다고 하면 이야기는 다르겠지만 너를 중심으로 이제 차차 힘을 모아 가야해.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라크, 네가 이레나 공주에게 약속한 것이야.”

에스마는 단호하게 말했다.

카이르도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전 11화10화: 이레나와의 동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