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어두워지고 있었다.
오늘은 길을 떠나기 힘들 것 같았다.
라크는 페로에게 다가가 눈을 보고 머리를 쓰다듬었다.
‘페로 오늘은 여기서 하룻밤 자야 할 것 같아.’
‘라크, 그러면 저는 저녁 먹으러 다녀올게요.’
페로가 떠나려던 그때, 이레나가 다가와 페로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털을 만졌다.
“라크 정말 좋은 말이네요.
이렇게 좋은 털을 가진 말은 찾기 쉽지 않은데.
이름이 뭐예요?”
“이 친구의 이름은 페가팔로스, 페로라고 불러요.”
“음… 페가팔로스… 페로… 잘은 모르겠지만 좋은 이름 같네요.”
왠지 라크의 말을 알아듣는 것 같기도 하고…
페로 앞으로 친하게 지내자.”
하면서 페로의 등을 툭툭 쳤다.
페로는 살짝 얼굴을 찡그렸다.
‘명색이 용인 나를 인간이 툭툭 치다니…’
‘우리 착한 페로. 많이 화가 났구나.’
하면서 라크는 살짝 안아주었다.
이레나는 그 말을 들을 수 없었다.
그들은 별 언어로, 마음속으로 대화했기 때문이었다.
페로는 다시 기분이 좋아져 ‘라크, 나 금방 다녀올게요’라고 하면서 저녁을 먹으러 숲속으로 들어갔다.
“아니 페로가 어디로 가는 거예요? 숲은 말에게 위험해요.”
이레나가 놀라서 물었다.
“걱정하지 말아요. 페로가 알아서 할 거예요.” 라크는 살짝 미소 지으며 말했다.
“우리는 여기서 하룻밤 머물고 내일 아침 일찍 출발해야 할 것 같아요.
내가 저녁을 준비할 테니 텐트 안에서 쉬고 있어요.”
라고 말하며 냇물로 갔다.
이레나는 텐트 안에서 문을 살짝 열고 라크를 지켜보았다.
라크는 물고기 몇 마리를 잡았다.
그리고 불을 피워 굽기 시작했다.
페로가 오면 줄 물고기도 남겨놓았다.
페로는 동물, 물고기, 과일 등 가리지 않고 잘 먹었다.
잠시 뒤 페로가 왔다.
입에는 토끼 한 마리를 물고 있었다.
‘이것도 요리해서 드세요.’
‘페로 정말 고마워. 여기 물고기 페로 먹으라고 두었어.’
‘라크 고마워요. 지금은 배가 불러서 나중에 밤참으로 먹을게요.’
‘그리고 숲 안으로 조금만 가면 과일들이 있어요. 먹어보니 꽤 맛있어요.’
‘아 그래…’ 하면서 라크는 발걸음을 숲으로 옮겨 과일을 따서 가져왔다.
배낭에서 작은 칼을 꺼내 토끼를 손질하고 불에 굽기 시작했다.
생선과 토끼 굽는 냄새에 이레나는 배고픔이 몰려왔다.
당장 달려가서 먹고 싶었지만, 왕궁에서는 시녀가 부르기 전에 절대로 식당에 가지 않는 것이 습관이 되어 침을 삼키며 기다리고 있었다.
라크가 텐트로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
이레나는 얼른 문을 닫았다.
텐트 밖에서 라크의 소리가 들렸다.
“이사벨 저녁 준비가 다 되었어요. 나와서 같이 먹어요.”
이레나는 문을 열고 나와 라크를 따라갔다.
이레나는 ‘이렇게 맛있는 음식은 처음이야’라고 속으로 생각하면서 허겁지겁 먹었다.
라크와 페로는 서로 놀라 쳐다보았다.
식사가 끝난 후 이레나는 라크에게
“정말 맛있었어요. 내 생애 최고의 음식이었어요.”라고 하며 미소를 보였다.
“내일 아침엔 간단히 과일과 빵을 먹고 일찍 출발해요.
피곤할 텐데 들어가서 쉬세요.”
라크는 텐트까지 이레나를 데려다주며 말했다.
이레나는 피곤했지만 잠이 잘 오지 않았다.
라크가 어떻게 하고 있는지 궁금해서 텐트 밖을 나가 보았다.
라크는 텐트 옆에 모닥불을 피우고 무엇인가를 읽고 있었다.
‘전쟁은 정치의 연속이다.’
‘별의 병법’ 책 앞에 나와 있는 구절에 멈춘 라크는 그 의미를 생각하고 있었다.
페로도 그 옆에 서 있었다.
“라크 무엇을 하고 있어요? 안 자요? 그리고 잠은 어디서 자요?”
그 말에 라크는 이레나를 쳐다보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직 안 잤어요?”
“잠이 안 와요.”
이레나는 약간 투정을 부리듯 말했다.
“저는 여기서 잘 거예요.
밤사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 여기서 자는 게 편해요.
숲에서 동물들이 내려올 수도 있고… 도적들이 나타날 수도 있고.”
라크의 말에 이레나의 눈이 살짝 떨렸다.
‘나를 위험에서 지켜주려는 거구나.’ 이레나는 든든한 마음이 들었다.
이레나는 라크의 옆에 앉았다.
따뜻한 모닥불에서 왠지 모를 안도감을 느끼며 이레나는 스르르 잠이 들었고 저도 모르게 라크의 어깨에 기대었다.
페로는 왠지 모를 미소를 지었다.
라크는 그녀를 안아 텐트로 데려다 뉘어 주었다.
다음 날 아침, 동이 틀 무렵.
간단히 요기를 마친 그들은 다시 길을 떠났다.
이레나는 페로 등에 올라타 있었고, 라크는 그 옆에서 천천히 걸었다.
이레나는 사실 마음이 꽤 들떠 있었다.
자유로운 성격을 가진 그녀는 틀에 박힌 왕궁 생활이 늘 답답했다.
어릴 적 왕궁 담장을 넘다 경비병에게 발각되어 아버지인 왕에게 크게 혼난 일도 있었을 정도였다.
그런 그녀에게 지금, 이 순간은… 어딘지 모르게 두근거리고 설레었다.
한편, 라크는 전날 밤 페로에게 이레나를 태워달라고 몇 번이나 사정해야 했다.
‘연약한 여자를 걷게 할 수 없잖니…
게다가 이사벨이 걸어가면 벨사레인 왕국 수도까지 몇 배나 더 걸릴 거야…’
라크는 온갖 이유를 대며 페로를 설득했다.
페로는 처음엔 단호했다.
‘저를 탈 수 있는 사람은 라크 당신, 그리고 아주 조금 더 양보하면 당신의 부인과 아이들 정도예요.’
그러나 결국 라크의 끈질긴 간청 앞에
‘이번에만 특별히 요청을 받아줄게요. 하지만 다음에는 절대 안 돼요.’
라고 투덜거리며, ‘끙…’ 하고 머리를 흙에 파묻었다.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약속은 약속.
페로는 묵묵히 이레나를 태워주며 걸어갔다.
속으로는 투덜거렸다.
‘하… 내가 공주도 아닌 시녀를 태우게 될 줄이야…’
그들은 협곡을 벗어났다.
“와!!!!” 하며 이레나는 탄성을 지었다.
라크가 데보르 산으로 가기위해 협곡에서 나와 처음 비토르를 보았던 그 광경 그대로였다.
라크는 더 멀리, 더 넓게 보기 위해 그때 그가 갔었던 그 언덕으로 이레나와 페로를 데리고 갔다.
끝없이 펼쳐진 푸른 평야, 그 사이를 꿈틀거리듯 흐르는 거대한 강줄기.
저 멀리에는 희미하게 산들이 둘러서 있었고, 그 산들이 만들어낸 품 안처럼 거대한 분지가 드러나 있었다.
그곳이 바로 비토르였다.
세 왕국이 맞닿은 대륙의 중립지대, 비옥함과 전략적 중요성을 동시에 가진 땅.
한참 동안 그들은 비토르의 멋진 풍경을 바라봤다.
이레나는 칼디아 왕국으로 가기 위해 이 지역을 지나긴 했지만, 그녀가 볼 수 있는 것은 마차 양쪽에 달린 자그만 창을 통한 것이 다였다.
좀 더 보기 위해 창밖으로 머리를 내미는 것도 허용되지 않았었다.
“자 이제 점심 먹으러 가요.” 이레나가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셋은 마을의 가장 큰 식당으로 갔다.
왠지 거기가 가장 맛있을 것 같았다.
페로는 라크에게 ‘라크, 저 점심 먹고 올게요.’ 하며 어디론가 혼자 걸어갔다.
이레나는 라크의 소매를 잡아당기며 말했다.
“페로 점심 먹으로 가는 군요. 우리 식당으로 들어가요. 저 배고파요.”
이레나는 메뉴를 보더니 이것저것 시켰다.
라크는 생전 처음 먹어보는 모두 값나가는 음식들이었다.
이레나는 식사하면서 “라크, 당신은 몇 살이에요?”라고 물었다.
“열여덟 살이요.”
“저보다 두 살이 적네요. 저는 스무 살이에요.”
하면서 손가락 두 개를 펼쳐 보였다.
“제가 나이가 많으니 ‘누나’라고 불러 봐요. 혹시 알아요. 제가 점심을 대접할지.”
라크가 당황한 모습을 보이자, 이레나는 깔깔하고 웃었다.
“농담이에요. 누나라고 안 불러도 돼요.”
이레나는 많이 먹지는 않았다.
라크는 남긴 음식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레나는 점원을 부르더니 남은 음식을 싸달라고 했다.
“우리 어제처럼 노숙해요. 이 음식이 있으면 오늘 밤 요리는 안 해도 되잖아요.”
계산하기 위해 계산대로 갔다.
벨사레인, 알두레스, 칼디아 국의 돈을 모두 받았다.
이레나는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수중에 돈이 한 푼도 없었다.
돈은 모두 경호대가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라크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지갑에서 칼디아 은화 몇 개를 꺼내 주었다.
여정 동안 거의 돈을 쓰지 않아 지갑에는 돈이 넉넉히 남아 있었다.
식당 앞에는 페로가 이미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페로가 라크에게 다가와서는
‘라크, 나 책 사줘요. 이 별의 언어를 공부하고 싶어요.
대화 위주이고 쉽게 쓰인 소설책이면 제일 좋아요.’
라고 마음속으로 전달했다.
“이사벨, 나 책을 사야 할 것 같아요. 혹시 책을 파는 곳을 알아요.”
“서점에 가면 돼요. 이곳은 비토르의 중심 마을이라 서점이 있을 거예요.”
이레나는 식당에 다시 들어가서 서점의 위치를 물어보고 다시 나왔다.
라크와 이레나는 서점에 함께 들어갔다.
페로는 들어가고 싶었지만, 말의 모습이라 들어갈 수가 없었다.
물론 용은 더더욱 들어갈 수 없었을 것이다.
“뭘 사려는 거예요?” 이레나가 묻자.
“소설책이요. 대화가 많고 쉽게 쓰여 있는….”
“어디에 쓰려 구요?”
“아… 집에 선물할 사람이 있어서요.”
이레나는 이리저리 책을 보더니 세 권을 들고나왔다.
“이 두 권이 좋을 것 같아요. 그리고 이것은 저에게 선물로 사주세요.”
이레나가 책을 쭉 내밀며 배시시 웃었다.
라크가 보니 이레나가 사달라는 책의 제목은 ‘갈릴로스 제국, 그 전설의 이야기’라고 적혀 있었다.
“아주 오랜 옛날, 세 별을 다스리던 갈릴로스라는 제국이 있었다고 전해져요.
이 책은 에일런 대륙에 남아있는 전설들을 모아서 정리한 책이에요.
오늘 밤 모닥불 앞 당신 곁에서 이 책을 볼 거예요.”
라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계산하고서는 서점을 나왔다.
그들은 오늘 밤 노숙을 할 수 있는 장소를 찾아 이동하였다.
다음 날 점심 전 그들은 벨사레인 국경에 도착하였다.
칼디아 왕국의 위협으로 인해 국경 검문은 매우 삼엄했다.
신분증이나 통행증이 없으면 통과하기 힘들었다.
그리고 제때 오지 않은 공주 때문에 왕국 안은 발칵 뒤집혀 있었다.
할 수 없다는 듯 이레나는 한숨을 크게 쉬고는 페로를 내려서 국경 수비대에 가서 무엇이라 말했다.
갑자기 그들이 분주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조금 있으니, 마차와 함께 여기서 가장 높아 보이는 사람이 허겁지겁 달려와서 이레나 앞에 공손히 인사를 하였다.
라크를 돌아보고는 “라크 저를 따라와요. 누나가 맛있는 거 사줄게.”라며 살짝 웃으며 말했지만, 그 표정은 슬퍼 보였다.
그리고 페로의 목을 안으며, “여기까지 태워줘서 고마워.”라고 말했다.
페로는 속으로 ‘역시 시녀가 아니라 공주였군.’이라고 말했다.
라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호위대와 마차는 달리기 시작했고 라크도 페로를 타고 그 뒤를 따라갔다.
라크의 뒤에도 두 명의 기마병이 있었다.
라크는 국경에서 집으로 바로 가고 싶었으나 페로가 벨사레인의 수도를 보고 싶다는 말에 따라나서게 되었다.
가는 내내 들은 식당에서는 끼니마다 진수성찬이 나왔고 숙소의 침실은 매우 크고 잘 정돈되어 있었다.
페로를 위해서도 신선한 고기, 생선, 과일이 항상 준비되어 있었다.
페로는 ‘보통이 아닌 공주님이구먼!!!’ 하는 생각이 들었다.
따뜻한 목욕물이 항상 준비되어 있었지만, 라크는 찬물에서 몸을 씻고 나와서 책을 읽었고 검술 훈련을 하였다.
이레나의 얼굴이 떠오를 때마다, 라크는 마음속 어딘가에서 끓어오르는 알 수 없는 감정을 눌러내듯 검을 더욱 세차게 휘둘렀다.
아마 하이델을 떠난 후 라크는 하루에 세 시간 이상을 자본 적이 없었다.
이레나의 생각은 뒤로 하고 라크는 항상 수련하고 책을 읽었다.
시중을 드는 사람들의 말에 따르면 이런 곳은 여행 중인 왕가 또는 고위 귀족만이 이용할 수 있는 곳이었다.
하지만 이레나는 더 이상 볼 수 없었다.
이레나는 가는 동안 마차 안에서 가끔 눈물을 왈칵 쏟았다.
그녀의 손에는 라크가 사준 책이 항상 들려 있었다.
그 책은 이레나의 눈물로 점차 젖어 갔다.
그녀는 왜 이러한 눈물이 나오는지 자신도 알지 못했다.
오일 정도 지나자, 빠른 속도로 움직인 그 행렬은 왕국의 수도에 도착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