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위기에 처한 공주와의 만남

by 현상

페로는 부드러운 날개짓으로 라크를 태우고 하늘로 솟구쳤다.

얼마 지나지 않아 페로는 산 입구로 내려왔다.

라크가 산을 바라보니 산이 점점 밝아지기 시작했다.

웅장하고, 아름다웠다.

마치 수백 년을 잠들어 있던 진짜 모습이 깨어난 듯했다.


“페로, 이제 이 산의 마법이 풀린 거야?”

라크가 감탄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페로는 고개를 살짝 돌리며 말했다.

“아니에요. 라크의 눈에만 이 산의 진실이 보여요.

다른 사람들은 여전히 어둡고 무서운 산으로 보일 거예요.

하지만, 이 땅의 진정한 주인은 이 세계가 안정되고 난 후 마법을 풀 수 있어요.”


“라크 집을 알려주세요. 모셔다드릴게요.

저는 이 대륙 어디든 하루면 갈 수 있어요.”

“그리고 저랑 얘기할 때 제 눈을 보고 저의 머리를 쓰다듬으면 마음속으로 소통할 수 있어요.

사람들이 있을 때 우리가 얘기하는 것을 보면 기절초풍할걸요.

물론 별 언어로 얘기하고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겠지만요…

자, 해보세요.”


라크는 페로의 눈을 쳐다보고 머리를 쓰다듬었다.

‘라크, 들리시나요?’

‘어…. 들려! 페로도 내 말이 들려?’

‘그럼요!”


라크는 지도를 펼쳤다.

그리고 에스마와 카이르와 함께 지냈던 위치를 알려주었다.

“하루면 넉넉히 가겠네요.

조금 천천히 날 테니 구경하세요.

그리고 식사 때가 되면 숲에 내려드릴게요.”


“페로, 집에 가기 전에… 꼭 가보고 싶은 곳이 있어.”

라크가 조심스레 말했다.


페로는 귀를 살짝 쫑긋 세웠다.

“어디인가요?”


라크는 지도를 펼쳐 손가락으로 한 지역을 가리켰다.

“바로 이곳, 비토르.

이 산에 오기 전, 잠깐 들렀는데… 그때 마음먹었었거든.

돌아갈 때 자세히 보고 가자고.”


페로는 미소 짓듯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날아가는 우리 모습이 사람들 눈에 띄지 않으려면, 이 협곡에서 내려서 가는 게 좋겠네요.”

페로는 앞발로 라크가 집을 떠나 비토르로 올 때 지나쳤던 협곡을 가리켰다.

“빨리 가면 반나절이면 갈 거예요.

중간에 한 번만 쉬면 돼요.

자 타세요.”


라크가 페로의 등에 올라타자, 페로는 힘찬 날갯짓을 하며 하늘로 날아올랐다.

이번엔 처음처럼 수직으로 솟구치는 것이 아니라, 남동쪽을 향해 부드럽게 비스듬히 날아올랐다.


아래로 내려다본 산과 들판, 작은 집들은 점점 점처럼 작아졌고, 사람들은 이제 눈에 보이지도 않았다.


한참 동안 바람을 가르며 날아가던 라크가 문득 궁금한 듯 물었다.

“페로, 있잖아…

내가 두 번째 시험에서 얻은 책, ‘별의 병법’ 말이야.

잠깐 펼쳐봤는데 뒤쪽에 무기 그림들이랑 마법 주문 같은 게 보이던데…

혹시 그게 뭔지 알아?”


페로는 날개를 한 번 크게 퍼덕이며 말했다.

“아! 라크… 그건 말이죠…

아마 당시 쓰였던 무기들과, 그 무기들을 움직이기 위한 마법일 거예요.

모든 무기가 마법으로 움직였던 건 아니지만, 일부는 마법의 힘을 통해 원격으로, 혹은 특수한 방식으로 작동했어요.”


라크는 눈을 반짝이며 페로의 말을 들었다.


“그 책을 쓴 사람의 이름은 ‘에르마 루멜’이에요.

제국 역사상 가장 뛰어난 장군으로 평가받죠.

그가 장군직에서 물러난 뒤,

자신이 남긴 모든 지식과 전술, 무기 비밀을 한 권의 책에 담았어요.”


페로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조용히 덧붙였다.

“책 마지막 부분에는…

세 개의 별, 즉 노바르, 세르카, 에일런을 자유롭게 오고 갈 수 있는 방법도 적혀 있다고 해요.

저도 얘기로만 들었지, 그 책을 직접 본 적은 없었어요.

원래 그 책은 왕실 서고 깊숙이 봉인되어 있었고, 왕가의 후손만 펼칠 수 있도록 강력한 마법이 걸려 있어요.”


이윽고 협곡의 입구에 다다랐다.

라크가 처음 넓은 세상을 보게 되었던 곳 그곳이었다.


페로는 협곡을 따라 조금 더 안으로 들어갔다.

숲에 내리고는 페로는 살짝 숨을 고르며 날개를 접었다.

날개는 감쪽같이 사라졌고, 평범한 말처럼 보였다.


“그런데, 페로…”

라크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날개가 없다 해도, 지금 모습도 너무 눈에 띄지 않을까?

너처럼 멋진 털과 갈퀴를 가진 말은 이 대륙 어디에도 없을 것 같은데.”


페로는 머리를 살짝 흔들며 대답했다.

“라크, 그렇게 칭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고는 주문을 속삭였다.

순간, 몸에서 미세한 푸른 빛이 일더니, 페로는 정말로 평범한 갈색 말로 변해 있었다.

단, 이마 한가운데 붉은 점만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하하… 넌 참 재밌는 재주가 많구나.”

라크가 웃으며 말하자, 둘은 잠시 눈을 맞추며 웃었다.


그러던 찰나, 숲 너머에서 날카로운 금속음이 들려왔다.

칼과 칼이 부딪치는 소리, 여인의 날카로운 비명이 이어졌다.

라크와 페로는 소리가 나는 쪽으로 이동한 뒤 나무 뒤에서 상황을 살펴보았다.


여인의 것으로 보이는 마차는 부서져 있었고, 여인의 경호원으로 보이는 사람들은 모두 죽어 있었다.

두 명의 남자가 여인을 끌고 가려 하고 있었다.


“야… 이거 놔… 내가 누군지 알고…”

여인은 끝까지 발버둥 치며 소리쳤지만, 남자들은 비웃듯 말했다.

“얌전히 따라오면 다치지 않을 거야.”

그녀 주위엔 다섯 명의 사내가 빙 둘러서 있었다.


라크는 조심스레 지팡이를 살짝 돌리고 칼을 뽑았다.

숨을 고르고, 순간 몸을 앞으로 날렸다.

그리고 가장 라크와 가까이 있는 사람을 향해 달려갔다.


달려오는 기척을 느낀 남자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그들이 검을 뽑기엔 너무 늦었다

그들이 칼을 뽑기 전 라크는 목표로 했던 사람을 먼저 배었다.

그리고 그 옆에 있던 한 사람이 검이 뽑히는 찰나 라크의 검이 그의 가슴을 갈랐다.


여인을 붙잡고 있던 두 남자도 마침내 여인을 놓고는 칼을 뽑았다.

여인은 뒤로 조금 달려가더니 상황을 살폈다.

세 명의 남자가 라크를 에워쌌다.

서늘한 긴장감이 공기를 팽팽하게 당겼다.


대장으로 보이는 남자가 이를 드러내며 말했다.

“넌 누구냐?”

“나? 나쁜 놈들을 혼내 주는 사람이다.

너희 같은 자들은 내 이름을 알 가치도 없어.”

라크는 눈을 번뜩이며 대답했다.

남자는 헛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미친놈이군… 여기가 네 무덤이 될 줄 알아라.”


순간, 그들은 달려들었다.


라크는 눈 깜짝할 사이 왼쪽의 가장 약해 보이는 남자를 찔렀다.

뒤따라 동시에 머리 쪽으로 날아드는 두 개의 칼날을 교차로 막아냈다.

그리고 재빠르게 몸을 틀며 대장 쪽으로 달려들어 그의 오른팔을 깊게 베었다.


“아아악!!!”

대장은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그의 손과 칼은 팔과 함께 바닥에 굴러떨어졌다.

남은 한 명은 충격에 휩싸여 뒷걸음질 쳤지만, 라크는 거침없이 다가가 단 한 번의 일격으로 그를 제압했다.

라크는 숨을 고르며 팔을 잘린 대장에게 다가갔다.

피로 범벅된 칼끝을 그의 목에 들이밀었다.

“너는 누구며, 왜 이런 짓을 벌였느냐?”

대장은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걸 말하는 순간… 나도 죽는다.”

그러더니 왼손으로 품 안을 뒤졌다.


순간, 라크의 눈에 번뜩이는 단검이 보였다.

“안 돼…!”

라크가 소리치려는 순간, 남자는 단검을 자신의 배에 꽂았다.

피가 솟구치며 그의 몸이 축 늘어졌다.

라크는 잠시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지독한 놈이군…”

칼을 천천히 칼집에 집어넣으며 낮게 중얼거렸다.


놀란 눈으로 서 있는 여인에게 다가가며 라크는 부드럽게 물었다.

“괜찮습니까? 많이 놀라셨죠… 어디 다치신 데는 없으신가요?”


여인은 떨리는 손으로 옷자락을 움켜쥐며 말했다.

“괜찮아요…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고개를 깊이 숙이며 공손히 인사했다.


라크는 주변을 둘러보다 말했다.

“저기에 작은 냇물이 있어요. 가서 씻고 잠시 쉬어요.”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안내했다.


“아… 잠시만요.”

여인은 부서진 마차로 달려가, 옷가지 몇 개를 챙겨왔다.


라크, 페로, 여인은 함께 조용히 냇물 쪽으로 걸어갔다.

조금만 가자, 라크의 말대로 맑은 물이 졸졸 흐르는 작은 냇물이 나타났다.


라크는 무릎을 꿇고 손과 얼굴에 묻은 피를 씻어내었다.

그리고 품에서 물병을 꺼내, 냇물로 가득 채운 뒤 여인에게 건넸다.

“마시세요. 조금은 괜찮아질 거예요.”


여인은 놀란 듯 라크를 바라보다, 이내 살짝 미소를 지으며 물병을 받았다.

“저… 이름이 어떻게 되시나요?”

여인이 수줍게 물었다.

“라크라고 합니다. 성은 없어요.”

여인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말했다.

“저는 이… 이… 이사벨이라고 해요. 저도 성이 없어요.”

그녀는 사실 벨사레인 왕국의 공주, 이레나 벨사레인이었다.

굳이 신분을 밝히고 싶지 않았다.


“이사벨… 예쁜 이름이군요. 돌아가신 저의 어머니 이름도 이사벨이예요.”

이레나는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바보같이 골라도 하필… 그의 죽은 어머니의 이름이라니…’


그 순간, 이레나의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들렸다.

라크는 모르는 척하고 품속에서 빵을 꺼내 이레나에게 건네주곤, 냇가로 가서 물을 마셨다.


이레나가 빵을 다 먹었을 때쯤 다시 이레나에게 다가와서 라크는 그녀에게 다가와 말했다.

“집이 어디인가요? 제가 모셔다드리겠습니다. 잠시 쉬었다가 출발하지요.”


이레나는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벨사레인 왕국의 수도 익사트레에서 왔어요.

저는 벨사레인 왕국의 공주 이레나 벨사레인의 시녀예요.

공주님의 명을 받고 비토르 남쪽에서 일을 보고 마차의 말이 협곡으로 우연히 들어왔는데 저들을 만났어요.

저를 지키려다 죽은 사람들은 왕실 경호대 소속이에요.”

이레나가 흐느끼며 말했다.


이레나는 칼디아 왕국의 영주인 에르말 라짐이 비토르를 침략하려고 한다는 소식을 듣고 직접 사실 확인을 위해 에르말 라짐을 만나고 돌아가던 중이었다.

이레나를 살려 두었다간 비토르를 점령한 후 칼디아 왕국의 왕이 되려는 자신의 계획이 물거품이 될 것 같아 에르말은 부하들을 산적으로 위장시켜 이레나를 죽이려 한 것이었다.


이레나가 두리번거리며 주변을 살폈다.

“왜 그러시죠?” 라크가 묻자

“옷을… 갈아입어야 할 것 같은데, 마땅한 장소가 없어서요.”

이레나는 당황해하며 말했다.

이레나의 옷은 그 남자들과의 실랑이로 인해 군데군데 찢어져 있었다.


“음… 잠시만요.”

라크는 그 옆에 마법으로 텐트를 만들어 주었다.


“당신 사제처럼 보이는데 마법사신가요?”

“아니요. 그냥… 작은 재주가 있을 뿐입니다. 별거 아닙니다.”


이레나는 텐트로 들어가더니 곧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그리고 냇물로 가 손과 얼굴을 씻고 냇물을 거울삼아 헝클어진 머리를 다듬었다.

라크를 쳐다보며 빙그레 웃을 때, 그녀의 얼굴은 한층 환해져 있었다.

정말 아름다운 미소였다.


“라크님, 텐트 안에 당신 옷도 있어요.

갈아입으세요.

알두레스 왕국의 사제는 살인하지 않아요.

그리고 여인과 함께 다니지도 않아요.

당신의 그 피 묻은 겉옷과 저를 보면 누구라도 의심할 거예요.

왕국의 경호대는 때론 신분을 숨겨야 하는 경우도 있어요.

그래서 사복도 항상 가지고 다녀요.

당신에게 맞을 만한 옷을 텐트 안에 두었어요”


라크는 “저를 그냥 라크라 불러요.” 하면서 텐트 안으로 가서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페로는 여인의 행동과 기운에서 왕가의 혈통을 느꼈으나, 정체에 대한 확신이 없어 이 모든 상황을 묵묵히 지켜만 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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