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속 타로 이야기] 두려움과 욕망은 샴쌍둥이처럼 서로 붙어 있다.
카니발 쇼가 한창 진행 중인 어느 날 경찰이 들이닥친다. 위기 상황에서 스탠이 난데없이 앞으로 나선다.
스탠은 경찰을 재빨리 훑어본다. 그의 신발굽이 오른쪽이 높은 것을 보고, 그가 어린 시절 소아마비를 앓았으며 아마도 군대도 못 간 마마보이일 거라고 추론한다. 목에 걸린 성 크리스토퍼 메달을 보고 성경과 어머니를 들먹이며 즉석 심령쇼를 감행한다. 영장을 낚아채며 흘깃 본 경찰의 이름까지 보태니, 카니발을 폐쇄하려고 작정했던 경찰은 완전히 속아 넘어가서 그에게 오히려 감사하며 물러난다.
이 승리의 경험은 스탠의 삶의 방향을 바꾼 결정적 계기가 된다. 자신의 특별한 잠재력을 깨달은 스탠은 두려움에 움츠렸던 과거의 모습을 떨치고 자신감 있는 독심술사로 거듭난다. 그는 내면의 욕망이 끓어오름을 느낀다.
<나이트메어 앨리>의 전반부가 두려움에 대한 이야기였다면, 후반부는 욕망에 대한 이야기이다.
카니발에서의 잔잔하고 느린 1부가 지루하다는 평이 있는데, 2부의 몰아치는 충격을 위한 축적 과정이라고 보면 꼭 필요한 지루함이다. 마치 물이 99도까지 지루하게 데워지다가, 순간 100도를 넘어가서 기화되는 것처럼.
이제 스탠의 '운명의 수레바퀴'가 빠르게 돌기 시작한다.
# 이 글을 읽기 전에 <나이트메어 앨리>의 첫 번째 리뷰를 먼저 읽고 오실 것을 추천합니다.
목차는 다음과 같다.
1. 독심술쇼와 심령쇼의 아슬아슬한 경계에 머물다.
2. '운명의 수레바퀴'는 빠르게 굴러가기 시작한다.
3. 두려움과 욕망에 삼켜진 '기인'이 탄생하다.
4. 그칠 때를 알면 위태롭지 않다.
스탠은 카니발에서 독심술쇼를 하는 부부인 지나와 피트에게 호감을 얻는다. 이 부부는 왕년에 파리와 같은 대도시에서 자신들의 쇼로 명성을 날렸다. 스탠은 공연을 보조하면서 이들의 노하우를 습득하게 된다.
피트는 특정 단어에 정보를 매칭하는 '단어 교신법'을 개발하여, 비밀 노트를 만들었다. 이것은 눈을 가린 공연자에게 보조자가 독심술 대상자의 정보를 암호로 흘려주는 일종의 사기술이다.
그러나 이 기술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중요한 양념이 들어가야 한다. 스탠이 급습한 경찰에게 했던 것처럼 대상자의 동작, 말투, 옷차림 등에서 문제를 읽어내야 한다.
모든 사람은 문제가 있기 마련이다.
누구든 미워하는 사람이 있고, 과거의 그림자가 있다. 젊은 사내에게는 대개 아버지이다. 그는 아버지를 미워하기도 하고 사랑하기도 한다. 늙은 사람에게는 최근에 떠난 가족이 있다.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뻔하다. 건강, 재물, 사랑, 이 셋의 조합이다. 이 세 가지 중 어느 하나가 결여되어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알아내면 누구든지 조종할 수 있다.", "공포는 인간의 본성으로 이어지는 열쇠다." - 이것이 피트의 가르침이다.
피트 : "사람들은 자기가 누구인지 말하려고 안달하지. 알아봐 주길 바라고. 그게 그들의 본성이지."
스탠 : "그들이 완전히 넘어온 것을 어떻게 알죠?"
피트 : "뜸을 들여봐. 애태우는 거지... '잠깐만 실례하죠. 목이 좀 말라서.' 또는 기절하는 거지. 힘을 너무 썼다고."
지나와 피트는 자잘한 속임수를 쓰기는 하지만, 도를 넘는 '심령쇼(spook show)'는 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가지고 있다. 끝이 안 좋다는 것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피트가 지독한 술주정뱅이가 된 까닭에는 심령쇼와 관련된 죄책감이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피트 : "자신이 뱉은 거짓을 믿고 정말 능력이 있다고 믿기 시작하면 눈이 머는 거야. 전부 사실이라고 믿게 되니까. 거짓말을 하고, 또 거짓말을 하고. 거짓말이 끝나면 바로 그곳에서 신의 얼굴이 날 응시하고 있지. 아무리 발버둥 쳐도 인간은 신을 초월할 수 없어."
스탠은 카니발에서 만난 청순한 몰리(루니 마라)와 사랑에 빠진다. 그는 몰리를 설득하여 카니발에서 나와 대도시로 진출한다. 이들은 자신들의 독심술쇼를 개발하여 순회공연 하면서 실력, 다시 말하면 사기 노하우를 쌓아나간다.
스탠은 사람들이 무엇을 무서워하는지 알아내고 그걸 되파는 기술을 써먹지만, 그것을 부풀려 팔지만 않으면 된다는 지나와 피트의 원칙을 지킨다.
그러나 이 원칙은 릴리스 박사를 만나면서 무너지기 시작한다. 스탠과 릴리스는 상대방이 자신과 유사한 종류의 '선하지 않은 인간'임을 한눈에 알아보고 일종의 협업을 하게 된다. 심리상담가인 릴리스가 상류층 고객들의 내밀한 정보를 넘기면, 스탠은 그 정보를 바탕으로 그들 앞에서 유령을 부르는 강령회를 한다.
이제는 쇼를 보러 온 관객들의 푼돈이 아니라, 소수의 부유한 고객을 상대하며 큰돈을 만지게 되었다. 스탠은 자신의 거짓을 스스로 믿으며, 위에서 남들을 주무를 수 있다고 느낀다. 그는 인생의 정점에 올라선 것이다.
스탠이 올라선 것은 인생의 정점이 아니라 계속 돌아가는 '운명의 수레바퀴'의 꼭대기였다.
<나이트메어 앨리>의 원작자인 그레셤은 소설을 쓸 당시 타로에 매료되었다. 그가 소설의 소제목으로 스물두 장의 메이저 아르카나(Major Arcana)를 사용한 것은 색다른 시도였으나, 제목과 내용 사이에 유기적 연관성을 크게 확보하지는 못한 것 같다. 그러나 타로의 어둡고 불길한 분위기를 이야기 전체에 끼얹는 데는 성공했다.
영화와 원작 소설을 다 보고 나서 <나이트메어 앨리>가 형상화하고 있는 타로를 한 장만 뽑으라고 한다면, 내가 뽑은 카드는 바로 ‘운명의 수레바퀴(Wheel of Fortune)’일 것이다.
타로 마스터는 내담자가 '운명의 수레바퀴'를 뽑으면, 대체로 이사, 이직, 이변 등의 실질적인 변화가 생기거나, 사랑이든 재물이든 어떤 형태로든 인생의 전환 계기가 생길 것이라고 해석해 준다. 그리고 내담자의 심리를 읽어서 한두 마디 영적 충고를 덧붙여 주면 만족스러운 상담이 된다.
타로는 심심풀이용 상담의 도구이기도 하지만, 누가 사용하는지에 따라 나 자신과 세상의 심층 구조를 들여다볼 수 있게 도와주는 놀라운 도구가 될 수도 있다.
‘운명의 수레바퀴’ 카드에 나오는 거대한 수레바퀴는 자연의 순환, 시간, 끊임없는 재탄생(윤회), 운명(까르마)을 상징한다. 수레바퀴가 계속 움직인다는 것은 삶의 온갖 것에 대한 통제 불능을 의미한다.
사람들은 어떤 때는 수레바퀴의 가장 밑바닥에서 괴로워하고, 또 어떤 때는 수레바퀴의 꼭대기에서 세상을 내려다보며 기고만장하기도 한다.
우리는 자신이 인생에서 누리고 있는 것들을 스스로 의도하고 쟁취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우리는 수레바퀴에 매달린 채 그 거대한 흐름에 수동적으로 휩쓸려갈 뿐이다.
수레바퀴는 계속 회전하지만, 그 움직임이 너무 거대하여 타고 있는 사람들은 자신이 정지해 있는 것처럼 느낀다. 그래서 지금 있는 자리가 영원히 계속될 것처럼 생각하여, 두려워하고 욕망하고 몸부림친다.
<나이트메어 앨리>의 등장인물들도 수레바퀴 위에서 다양한 위치에 자리 잡고 있다. 가장 아래쪽에는 생닭의 목을 물어뜯는 '기인'이 있다. 수레바퀴를 얼마나 많이 돌았는지 알 수 없지만 현재 그가 멈춘 위치는 가장 밑바닥이며, 여기서 그의 현생이 마감된다.
태어나자마자 운명의 수레바퀴가 멈춘 기형아 에녹, 카니발에서 힘든 쇼를 하며 근근이 살아가는 단원들, 추위에 떨며 비참한 죽음을 맞이한 스탠의 아버지, 주변 사람들의 우려대로 술 마시다 죽은 피트, 겉으로는 우아하고 오만하지만 속은 공허하고 불안한 릴리스 박사와 상류층 사람들. 이들도 운명의 수레바퀴 위에서 서로 다른 시간과 공간상에 있을 뿐이다.
롤러코스터가 서서히 상승하며 위치 에너지를 모은 후 정점에서 굉장한 속도로 하강하는 것처럼, 이제 관객은 스탠이 수레바퀴의 정점에서 날개 없이 추락하는 것을 보게 된다. 스탠이 정확히 기인의 자리에 도달하여 복잡 미묘한 웃음을 터뜨리는 마지막 장면은 운명의 수레바퀴가 오차 없이 한 바퀴 돌아서 멈췄음을 보여 준다.
운명의 수레바퀴를 돌리는 연료는 무엇인가? 두려움과 욕망이다.
수레바퀴의 밑바닥에서는 '욕망이 감춰진 두려움'이 주된 추진력이다. 두려움과 공포, 좌절과 수동성으로 가득한 이들의 내면에는 타오르는 욕망이 감춰져 있다. 수레바퀴가 서서히 위쪽으로 움직이면서 '두려움이 감춰진 욕망'이 엔진이 된다. 꿈과 희망, 자신만만함과 능동성의 이면에는 다시 떨어질 것에 대한 공포가 숨어 있다.
음과 양이 갈마드는 태극의 운동처럼 두려움과 욕망은 서로 얽혀서 운명의 수레바퀴의 영원한 추진력이 된다.
<나이트메어 앨리>의 시대 배경은 미국이 2차 대전 참전을 결정하던 1940년대 초반이다. 개인들의 수많은 운명의 수레바퀴가 돌아가고, 그들을 다 덮는 거대한 수레바퀴가 배경으로 돌아가고 있는 모습을 상상해 보라.
이때는 스탠과 같은 개인뿐만 아니라, 미국이라는 나라의 운명의 수레바퀴가 정점을 향해 가는 시기이다. 미국은 양차 대전을 거치고 명실상부한 넘버원이 된다. 미국이라는 공간은 인간의 들끓는 욕망을 상징하게 된다. 많은 사람이 '아메리칸 드림'이라는 이름의 수레바퀴에 탑승하고자 기회와 풍요의 땅으로 몰려온다.
몰리가 걱정되었던 지나와 카니발 식구들이 스탠과 몰리가 머무는 도시의 호텔로 찾아온다. 촉이 좋은 지나는 스탠의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읽고 타로를 뽑게 한다.
스탠이 뽑은 세 장의 카드는 '추락(downfall), 임박한 위험(impending danger), 급박한 선택(urgent choice), 매달린 남자(hanged man)'와 같은 명백한 경고를 한다.
그러나 스탠은 지나가 옛날에 했던 말을 되돌려 준다. "나쁜 카드는 없어."
스탠은 마지막으로 크게 한탕하려고 계획 중이다. 에즈라 그린들이라는 권력과 돈이 있는 거물이 타깃이다. 그린들은 불안정하며 폭력적이어서 릴리스도 두려워하는 위험한 인물이다.
릴리스는 자신의 가슴 중앙을 가로지르는 끔찍한 상처를 보여주며 스탠에게 경고한다.
릴리스 : "이건 명심해요. 사람을 잘못 보고 건드리면, 세상이 순식간에 당신을 궁지로 몰죠."
스탠 : "무슨 일을 겪은 거예요?"
릴리스 : "인생(Life). 인생을 겪은 것뿐이에요."
"인생. 인생을 겪은 것뿐이에요." 이 장면에서 왠지 <캐롤>에서의 케이트 블란쳇이 겹쳐서 보인다. 나는 릴리스의 이 대사를 유치하지 않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케이트 블란쳇뿐이라고 확신한다. (공교롭게도, 캐롤에서 상대역으로 나왔던 루니 마라가 몰리 역으로 나온다.)
스탠은 자신이 운명의 수레바퀴를 굴릴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타로의 불길한 예언과 릴리스의 섬뜩한 경고는 스탠의 내면의 공포를 끄집어낸다.
거사를 앞두고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두려움은 그의 봉인을 해제한다. 스탠은 '절대' 마시지 않는다고 공언했던 술잔을 들어서 마신다.
첫 잔이 어려울 뿐이다.
스탠은 처음에는 심령쇼를 안 한다고 했지만, 심령쇼를 조금씩 시작한다. 그리고 합리화한다. "내담자의 상처받은 마음을 위로하고 희망을 주는 일이니 괜찮아. 목사들도 주말마다 하는 일인데 뭘." 그런 식으로 술도 합리화된다.
모든 합리화와 거짓이 깨지고 파국에 이르렀을 때 릴리스는 스탠에게 말한다.
릴리스 : "당신이 사람들을 속이는 게 아니야. 사람들이 스스로를 속이는 거지. 당신이 평범한 사람보다 우월한 것 같아? 입만 살아있는 촌뜨기에 불과해."
스탠은 첫 장면과 동일하게 다시 도망자가 된다. 그는 증오하고 동시에 사랑해 마지않았던 아버지의 단 하나의 유품인 손목시계를 망설임 없이 끌러주고 술을 한 모금 얻어 마신다.
이렇게 기인의 탄생 설화가 마무리된다.
스탠의 삶은 선을 하나씩 넘는 과정이었다. 그는 자신의 경계를 규정하는 물리적인 선, 심리적인 선, 도덕적인 선을 하나씩 밟아간다. 하나하나의 선은 구별이 잘 안 될 정도로 작은 것이었기 때문에 그는 파국이 오기 전까지 심각성을 인식하지 못한다.
중독의 진행 과정도 똑같다. 처음에는 아주 작은 선, 그러다 점점 굵은 선으로 간다. 처음에는 선의의 작은 거짓말, 그러다가 도를 넘는 사기, 마지막에는 범죄로 발전한다. 처음에는 한 모금, 그러다가 한 잔, 한 병, 종국에는 머릿속에 술 생각뿐이다.
<도덕경>에서는 '그칠 때를 알면 위태롭지 않다.'라고 말한다. 스탠은 왜 그칠 때를 알지 못했는가?
知止不殆 可以長久 (지지불태 가이장구)
그침을 알면 위태롭지 않아서, 오래도록 지속할 수 있다.
- 도덕경 44장 -
이 구절의 바로 앞에 있는 말은, "족함을 알면 욕되지 않는다(知足不辱)."이다.
이 말은 스탠이 제때 멈추지 못한 이유를 알려준다. 스탠은 족함을 아는 능력이 없는 사람이다. '만족'을 안다는 것은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자질이다. 행복한 사람만이 멈출 수 있다.
스탠과 몰리는 서로 사랑을 느꼈지만, 둘은 다른 종류의 사람이다. 오히려 스탠과 릴리스가 서로 닮았다.
몰리는 어떤 사람인가? 몰리는 카니발에서 '뇌우가 쏟아지고 대기가 전기로 가득한 날 태어났기 때문에 수천 볼트를 견디는 체질'을 가진 여자를 연기했다.
나중에 몰리는 자신의 비밀을 스탠에게 이렇게 말한다.
"옛날 공연 기억나? 내 몸에 전기를 흘리던 공연. 어떻게 견뎠는지 알아? 그냥 견디는 거야. 처음 몇 번은 근육이 며칠씩 경련했어. 정말 아팠어. 그런데 느끼지 말자고 스스로 다짐했어. 아무것도 느끼지 말자고. 하지만 어느 순간 내가 더 이상을 견딜 수 없다는 것을 알아. 나는 그 지점을 정확히 알 수 있어. 난 더는 못 견디겠어."
몰리는 견디고 받아들이는 수동적인 사람이다. 세상과의 관계도, 인간관계도, 사랑도 전기충격을 견디는 것처럼 한다. 자신이 견딜 수 없는 한도로 몰리기 전까지는 받아들이려고 한다. 그래서 오히려 어디쯤에서 그쳐야 하는지를 본능적으로 알게 되었다.
반면, 스탠과 릴리스는 견디기보다는 공격하고 쟁취하는 쪽을 선호한다. 이들은 물러나야 할 때 오히려 공격하여 성과를 얻은 경험을 가지고 있다.
타고난 기질 외에도 이들의 마음속에 펼쳐진 정서적 풍경도 다르다.
몰리의 아버지는 경마에 빠지고 여자들과 놀기 좋아하는 한량이었으나 딸에 대한 사랑은 진심이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몰리는 어린 시절에 받은 아버지의 사랑을 기반으로 힘든 삶을 이겨낼 수 있었다.
스탠은 아버지의 사랑을 갈구하였으나 결국 아버지를 증오하게 되었으며, 나이 든 아버지뻘의 남자들과의 관계에 늘 문제가 있다. 어머니와의 관계에 문제가 있는 릴리스는 세상에 복수심을 가지고 있다. 프로이트식으로 말하자면, 스탠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이며, 릴리스는 엘렉트라 콤플렉스라고 할 수 있다.
모든 욕망의 뿌리에는 사랑받고 싶은 충동이 잠재해 있다. 스탠과 릴리스의 애정 결핍은 이들의 욕망을 더욱 팽창시키고 멈출 수 없게 만든다.
욕망이 적고 수동적인 몰리는 욕망이 많고 공격적인 스탠과 릴리스에 비해 좀 더 노자적 인간상인지도 모른다.
스탠은 카니발에서 몰리를 만났을 때 첫눈에 반한다. 스탠은 노트에 몰리의 얼굴을 그리고, 그녀의 쇼를 돋보이게 할 무대장치를 만들기도 한다. 이때 스탠의 재능은 순수하게 반짝였다.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스탠은 지나와 피트에게 독심술쇼를 배우고, 카니발의 식구들과도 익숙해졌다. 경찰이 급습하여 카니발이 폐쇄될 위기에 처했을 때, 스탠은 최선을 다해 카니발을 구해냈다. 아마도 이때 스탠은 난생처음 순수한 보람과 만족감을 느끼지 않았을까?
그러나 스탠은 그 일을 운명의 수레바퀴를 굴리는 계기로 삼는다. 스탠이 심령쇼 사기술에 성공했든 못했든 관계없이 그는 그 후로 더는 순수한 만족을 느끼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몰리는 그칠 '때(時)'를 아는 사람이다. 그녀는 스탠의 운명의 수레바퀴에 동승하였지만 마지막 순간에는 내려올 수 있었다. 스탠은 몰리에 의해 구원받을 기회가 여러 번 있었음에도, 그 동아줄을 잡지 못했다.
정신분석적 관점에서 보면, 스탠의 몰락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극복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스탠이 아버지와의 관계가 원만했다면 달라졌을까? 그레셤은 실제로 오랜 기간 정신분석을 받았지만, 중독 문제에는 아무 도움도 받지 못했다고 한다.
운명의 수레바퀴를 회전시키는 두려움과 욕망의 힘은 의지로는 어찌할 수 없을 만큼 그렇게 거센 것이므로, '운명(運命)'이라고 하는 것 같다.
스탠이 반복해서 꾸던 꿈 속에서 나오는 골목. 출구처럼 보이는 빛을 향해 달려가도 영원히 그 빛에 닿지 못하는 악몽의 골목은 바로 모든 존재의 '운명의 수레바퀴'이다.
스탠은 결국 꿈에서도 현실에서도 악몽의 골목길을 벗어나지 못한다.
윌리엄 린지 그레셤과 기예르모 델 토로의 잔혹 동화는 이렇게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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