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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트메어 앨리 #1 | '기인'을 만든 '중독시스템'

[중독은 두려움에서 기인한다.]

by 아닛짜
어린 시절부터 스탠은 계속 같은 꿈을 꾸었다. 그는 어두운 골목을 달리고 있었다. 길 양쪽의 텅 빈 건물들은 컴컴하고 위협적이었다.

저 멀리 길 끝에 빛이 있었다. 그러나 뭔가 등 뒤에서 바짝 붙어 점점 다가와, 결국 그는 빛에 도달하지 못한 채 부들부들 떨며 잠에서 깨곤 했다.

스탠은 관객에 대해서, 다른 모든 이들에 대해서 생각한다. '그들도 같은 꿈을 갖고 있었다 - 악몽의 골목.'

윌리엄 린지 그레셤, <나이트메어 앨리>, 유소영 옮김, 북로드, 2021, P15


'나이트메어 앨리'는 스탠의 꿈속에서 공포가 형상화되어 나오는 '악몽의 골목'이다.


나도 어린 시절에 자주, 성인이 되어서도 가끔 비슷한 꿈을 꾸었다. 발을 헛디뎌서 미끄러지기 시작하면 아무리 내려가도 바닥에 닿지 않는다. 그러다가 엄청난 가속도로 바닥에 발이 닿기 직전에 가위눌림으로 깬다. 어떤 때는 아무리 도달하려 해도 도착할 수 없는 집을 찾아 헤맨다. 분명히 길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끝없이 막다른 골목에 부딪힌다.


어린 시절의 악몽은 아이의 무의식 깊은 곳에 도사리고 있는 불안과 공포가 표면으로 드러나는 통로이다. 성인이 되면서 점차 줄어들기 마련이지만, 이것이 마음속의 불안과 공포가 사라졌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더 깊은 곳으로 효과적으로 억눌렸다고 할 수 있다.


<나이트메어 앨리(Nightmare Alley)>는 마음 깊은 곳에 숨겨진 불안과 공포를 마치 오래된 장판을 들췄을 때 우글우글 나오는 벌레 떼처럼 아주 불편하게 묘사한다.


나는 <나이트메어 앨리>를 2021년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영화로 먼저 만났다. 그리고 윌리엄 린지 그레셤의 동명의 원작 소설(1940)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영화와 소설 모두 흥미롭게 보았기에, 영화와 원작 소설을 넘나들며 리뷰를 작성해보려고 한다.


책의 서문에 실려있는 그레셤의 명함을 보는 순간, 나는 저자의 삶에 관해 궁금해졌다. 이런 명함을 가지고 다니는 사람은 과연 어떤 삶을 살았을까? 솔직히 탐나는 명함이다.

윌리엄 린지 그레샴-명함.jpg 그레셤은 53세 생일이 지나고 나서 한 호텔 방에서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자살로 판명되었으며, 소지품 중에 이런 명함이 있었다.


목차는 다음과 같다.

1. 기인(Geek)의 탄생 설화
2. 중독으로 가는 길은 선의로 포장되어 있다.
3. 두려움과 욕망의 관계




1. 기인(Geek)의 탄생 설화


<나이트메어 앨리>는 독심술에 소질이 있는 스탠턴 칼라일(브래들리 쿠퍼)이라는 인물이 벗어나지 못한 채 헤매고 있는 '악몽의 복도'를 따라가는 이야기이다. 이 복도에는 기인, 카니발, 타로, 정신분석, 심령쇼, 속임수, 알코올 중독, 욕망과 추락 등 다양한 이야기가 펼쳐져 있다.


저자인 그레셤은 한 편지에서 이렇게 썼다. "스탠이 저자다."


그레셤은 스페인 내전에 참전했을 때, 한 술집에서 만난 어떤 남자가 들려준 이야기를 잊을 수 없었다고 한다. 술을 얻으려 닭과 뱀의 대가리를 물어뜯었다는 알코올 중독자의 이야기이다. 그는 이 '기인 이야기(The story of the geek)'가 뇌리에서 떠나질 않아서, 결국 그 생각을 떨치기 위해 글을 쓰게 되었다.


<나이트메어 앨리>에서 닭을 씹는 기인은 전반부에서 잠시 등장하고 비참하게 퇴장하지만, 기인과 술의 이미지는 작품 전반을 지배하고 있다.


영화의 첫 장면에서 스탠은 아버지의 시체와 함께 집을 통째로 불태우고, 기차에 몸을 싣는다. 종점에서 내리게 된 스탠은 유랑 카니발단과 우연히 마주친다. 떠돌이 도망자 신세였던 스탠은 카니발단에 일꾼으로 합류하게 된다.


카니발에서 스탠이 처음 목격한 것은 생닭을 먹는 기인쇼였다. 카니발 단장인 클렘(윌리엄 데포)은 공연 천막 앞에서 호객을 한다.


"기인을 구경하실 마지막 기회입니다! 하지만 이번 공개는 과학적, 교육적 목적임을 명심해 주십시오. 그는 어디서 온 것인가? 인간인가, 야수인가? 들어오세요. 같이 확인하시죠."


공포와 호기심으로 가득한 구경꾼들은 기인이 푸드덕 날갯짓하는 닭을 낚아채서 이빨로 목을 물어뜯는 광경을 보기 위해 기꺼이 25센트를 지불한다.

기인1-기인과 만나는 스탠.png 스탠은 자꾸 기인에게 눈길이 간다. 철창에 갇힌 기인에게 측은지심을 느끼며 담배를 건넨다.


클렘은 새로 합류한 스탠이 마음에 들었는지 그에게 이것저것 말해준다.


"다들 우월감을 느끼려고 돈 내고 보는 거지. 저 비참한 놈이 닭 뼈 씹는 것을 보겠다고."


'우월감'은, 정확히 표현하면, '나는 저런 비참한 밑바닥에 있지 않다'는 안도감에 가깝다. 우리가 안전한 방 안에서 공포 영화를 보며 느끼는 감정과 비슷한 것이다.


스탠이 도대체 저런 기인을 어디서 구했는지 묻자, 클렘은 기인이 탄생하는 비밀을 말해준다.


"솔직히 말하면 쉽지 않아. 망가진 술꾼을 데려오는 거야. 하루에 한 병은 마셔야 하는 얼간이. 아편도 무시무시하지만 사람 주무르는 데는 술이 최고야.

이렇게 말하는 거지. '일자리가 있는데 임시직이야.' 그걸 강조해야 해. '다른 기인을 구할 때까지 임시로 하는 거야.' 아편액을 섞어서 마시게 하면 돼. 한 병에 딱 한 방울만. 천국에 와 있다고 생각할걸.

그리고 이렇게 말하는 거야. '진짜 기인을 구하러 가야겠군.' 그러면 '저 잘하고 있지 않아요.'라고 말하겠지. 그럼 받아쳐. '개뿔이 잘해? 가짜는 관객을 못 끌어. 넌 해고야.' 그리고 나가버려.

밤에 와서 한바탕 설교를 늘어놓으면, 이제 다시 술을 못 마신다는 생각이 덜컥 들면서 죽을 것 같은 경련과 공포에 비명을 지르지. 얘기하면서 생각할 시간을 주다가 그때 닭을 던져주는 거지."


모든 기이한 일들은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몰려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술주정뱅이에게 어쩔 수 없는 상황이란 술을 못 마시게 되는 상황을 의미한다. 그는 그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어떤 것도 할 수 있는 상태가 된다. 생닭을 씹는 기인이라도 기꺼이 될 판이다.


그러나 잠깐씩 이성이 돌아온 기인은 도망쳐서 구석에 웅크리고 "이건 내가 아니야!"라고 중얼거린다. 그러나 술을 마셔야 하는 그에게 탈출구는 없다. 이 말은 알코올 중독뿐 아니라 다른 모든 중독에 빠진 사람들의 관용구일 뿐이다.




클렘의 방에는 독특한 컬렉션이 잔뜩 전시되어 있다.


"우리를 이 땅에 나게 한 것과 똑같은 욕정과 강제에 의해 잉태되었으나 어미의 자궁에서 무언가 잘못되어 살기에 적합지 않으니! 대부분 출산 때 죽었거나 태중에서 죽었지."


클렘은 기형의 생명이나 태아를 방부 처리해서 유리병에 보관했는데, 그중 그가 가장 아끼는 것은 '에녹'이라 이름 붙인 기형아이다.

에녹.png 클렘의 최애 컬렉션인 '에녹'은 성경에서 따온 이름이다. 에녹의 눈동자는 보는 이의 눈을 집요하게 따라간다.


스탠은 기인과 에녹에게 자꾸 눈길이 간다. 닭을 씹으며 술을 구걸하는 기인과 괴물로 태어난 에녹은 언제부턴가 스탠의 어둠의 복도에서 서성거린다.


아버지가 앙상하게 늙어서 침대에 누워있던 마지막 모습과 불타는 집의 형상이 이들과 합쳐져서 스탠의 반복되는 악몽이 완성된다.

아버지2.png 스탠은 애증 어린 눈으로 아버지의 마지막을 지켜본다.


기인, 알코올 단지에 잠겨있는 에녹, 늙은 술주정뱅이 아버지, 그리고 아버지를 죽인 스탠, 스탠의 스승 피트, 이들 사이에는 숨겨진 연결 고리가 있다.


이들은 모두 알코올 중독이라는 끈으로 연결된다.


스탠은 아버지의 피를 이어받은 자신의 중독 가능성을 알기에 절대 술을 안 마신다는 원칙을 고수한다. 누구나 초반에는 원칙을 지키는 법이다.

술-거절1-단장.png
술-거절2-릴리스.png
스탠은 어떤 상황에서도 '절대' 술을 마시지 않는다는 철칙을 고수했다. 그러나 '절대'라는 말은 절대적으로 깨지게 된다는 슬픈 전설이 있다.


스탠이 심리 상담가인 릴리스 박사(케이트 블란쳇)의 상담실에 처음 갔을 때, 릴리스는 위스키를 한 잔 따라서 권하지만, 스탠은 "술은 절대 안 해요."라고 말하며 거절한다.


릴리스는 '절대'라는 말을 듣는 순간 스탠의 문제를 꿰뚫어 본다. 스탠의 아버지는 술 문제가 심각했고, 스탠은 자신이 아버지의 전철을 밟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다는 것을.




2. 중독으로 가는 길은 선의로 포장되어 있다.


중독의 근원을 진지하게 보고자 한다면, 우리는 최소한 태어나는 시점까지 거슬러 올라갈 필요가 있다.


인간은 아무런 힘도 없이 취약하게 태어난다. 그러나 아기는 자기가 나약한 존재인 줄은 꿈에도 모르고 엄마 품에서 방긋방긋 웃는다. 이러한 좋은 시절은 금세 지나가고, 아이의 마음속에서 '나'와 '너'가 구분되기 시작하면 악몽이 시작된다. 거대한 세상에 비해 자신이 얼마나 약한 존재인지, 언젠가 죽을 수밖에 없는 필멸의 존재인지를 실감하며 무의식 속에 잠겨있던 공포와 불안이 드러난다.


아이에서 성인이 된다는 것은 표면의 성격(에고) 구조가 정착되면서 내면의 공포를 억누를 수 있는 효과적인 기술을 터득하는 과정이다. 이 관점에서 보면, 성격은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는 수단이자, 자기 자신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는 방패라고 할 수 있다.


# 성격의 형성 과정과 성격을 '감옥'이라 부르는 이유에 대해서는 다음 글을 참조하세요.


누구나 긴장을 완화하는 나름의 습관이 있다. 게임, SNS, 친구와 수다 떨기, 술 한잔하기, 혹은 산책이나 명상을 할 수도 있다. 어떤 활동이든지 루틴화되었다면 조금씩 중독의 여지를 가지고 있다.


우리의 가장 근원적인 긴장과 두려움을 완화하는 루틴은 바로 성격이다. 성격은 가장 근원적인 중독이다. 그러나 우리 모두 평생 성격 속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성격에는 중독이라는 말을 쓰지 않을 뿐이다.


중독은 나를 지배하며 통제력을 앗아갈 뿐만 아니라 나의 시간과 에너지의 대부분을 소모한다. 그 과정 중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성격은 일관된 태도, 행동양식, 사고방식, 취향, 말투 등으로 나를 일정한 프레임에 영구적으로 가두기 때문에 '성격의 감옥'이란 비유도 이상하지 않다.


성격의 감옥 속에 잠겨있는 모습은 유리병 속의 알코올에 잠겨있는 에녹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다만 보통 사람들은 겉으로는 멀쩡한 얼굴을 하고 있고, 에녹은 괴물의 얼굴을 드러내고 있을 뿐이다.


성격이 '넓은 의미의 중독'이라면, 우리가 보통 중독이라 부르는 알코올, 마약, 도박 등은 '좁은 의미의 중독'이다. 모든 사람에게는 성격이라는 중독의 기반이 이미 마련되어 있기 때문에 새로운 중독을 도입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특히 상처를 입은 존재들에게는 중독의 과정이 더 쉽다. 한번 상처받은 경험은 또 상처받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불러일으킨다. 두려움과 공포가 중독의 근원이다.


에녹, 기인, 스탠의 아버지, 스탠, 피트, 그리고 <나이트메어 앨리>의 저자 그레셤까지, 이들은 모두 두려움과 공포에 잠식된 '가여운 것들(Poor Things)'이 아닐까?


중독의 장점은 두려움과 불안, 공포를 가라앉히는 효과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옥으로 가는 길은 선의와 달콤함으로 포장되어 있다. 중독의 달콤함은 점점 희미해진다. 중독의 무서움은 주종 관계가 바뀌는 시점에 알게 된다.


<어린 왕자>에 나오는 술주정뱅이는 말한다.


어린 왕자 : 왜 술을 마셔요?

술꾼 : 잊기 위해서지.

어린 왕자 : 무엇을 잊고 싶은데요?

술꾼 : 부끄러운 걸 잊기 위해서지.

어린 왕자 : 뭐가 부끄러운데요?

술꾼 : 술을 마시는 게 부끄러워.


이제 사람이 술을 마시는 것이 아니라, 술이 사람을 마신다. 한 번 술꾼은 영원한 술꾼이다. '중독 시스템'이라는 폐쇄 회로에 갇혀버리기 때문이다.




3. 두려움과 욕망의 관계


나는 그레셤이 <나이트메어 앨리>에 왜 이렇게 여러 가지 주제를 꽉 채워 넣었을까 궁금했다. - 기인과 알코올 중독, 두려움과 공포, 아버지에 대한 애증, 심령쇼와 사기 행각, 욕망과 파멸, 정신분석과 타로, 그리고 2차 대전이라는 배경까지.


그런데 계속 이 키워드들을 쳐다보고 있자니, 직소 퍼즐처럼 서로 연결이 되어 각자의 자리를 찾아가는 듯 보였다. 이야기의 두 축은 '두려움''욕망'이다.


<나이트메어 앨리>는 전반부와 후반부가 확연히 다르게 구성되어 있다. 스탠이 시골의 카니발에서 머무는 전반부와 대도시로 진출해서 자신만의 독심술쇼를 하는 후반부는 분위기가 완전히 다르다.


전반부는 두려움을 다루고, 후반부는 욕망을 다룬다. 독자는 스탠의 '욕망이 감춰진 두려움'의 어둡고 초라한 민낯을 먼저 보고 나서, '두려움이 감춰진 욕망'의 화려하고 자신만만한 가면을 보게 된다. 그리고 종국에는 이 두 가지가 필연적으로 연결되는 것을 본다.


두려움과 욕망은 한 덩어리이지만, 샴쌍둥이처럼 두 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


사랑받지 못할까 봐 두려워하는 사람이 사랑에 대한 강렬한 욕망을 갖는 법이다. 강한 갈망이 페르시안 카펫의 화려한 무늬라면, 카펫을 뒤집어 보면 먼지를 뒤집어쓴 강한 두려움이 숨어있다.


이제 '넓은 의미의 중독'과 '좁은 의미의 중독'을 포함한 세상의 모든 중독을 뿌리 뽑기 위해서는 '두려움과 욕망의 관계'라는 주제로 한 걸음 더 들어갈 필요가 있다.



# <나이트메어 앨리>의 두 번째 리뷰에서는 스탠의 '욕망'의 관점에서 이야기를 좀 더 이어갑니다.






# '중독'이라는 주제에 관심이 있으시면, '중독 시스템'과 '관계중독'에 대한 또 다른 글을 참조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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