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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텀 스레드 #2 | 사랑처럼 보이는 '관계중독'

[영화 속 에니어그램 #7] 2번과 4번의 치명적인 '길들이기' 과정

by 아닛짜

나는 알마와 레이놀즈의 이야기를 '사랑'이라고 쉽게 단정 짓지 않으려고 한다. 이들의 관계 속에는 사랑뿐만 아니라 복잡한 여러 가지 심리적 문제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애초에 '사랑'이라는 말처럼 모호하고 폭넓은 개념도 없다. 인생의 특정한 어떤 시기에만 나타나는 남녀 간의 열정적인 연애 관계만을 지칭하기에는, 사랑은 인생 전체에서 걸쳐서 너무나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의존, 집착, 소유, 독점, 중독, 폭력 등도 사랑으로 쉽게 통칭한다. 많은 사랑의 본질은 서로 의존되는 과정이며, 관계중독의 과정이다. 이들은 '유사 사랑'이다.


낭만주의 이래로 너무나 많은 사랑 이야기들이 모든 예술 분야에 범람한다. 많은 소설, 영화, 드라마에서 그리는 사랑은 대부분 병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다. '순애보', '치명적 사랑', '천년의 사랑', '사랑의 유통기한은 만년', '삼생삼세에 걸친 사랑'과 같은 것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성숙한 사랑은 밋밋하고 이야깃거리가 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누군가가 나를 삼생삼세(三生三世)에 걸쳐 쫓아다닌다고 생각하면 무서울 것 같다. 다시 태어나서까지 찾아온다면 '시공을 초월한 스토킹' 아닌가?


<팬텀 스레드>의 사랑도 관계 중독이 숨어 있는 '유사 사랑'으로 뒤집어서 볼 근거가 충분하다.


# 이 글을 읽기 전에 다음 링크의 글을 먼저 읽고 오시기를 추천합니다.




1. 중독 시스템


'중독'은 우리가 좀체 포기하려 들지 않는 어떤 것이다. 이것은 '기꺼이' 하는 것과는 좀 다르다. 중독이란 자신이 아무런 힘도 행사하지 못하는 어떤 과정을 말한다. 오히려 중독이 자신에게 통제력을 행사한다.


중독에 빠지면 사람들은 자신의 개인적 가치관과 맞지 않는 일조차도 쉽게 행하게 된다. 우리는 그 대상에 관해 뭔가 거짓말을 해야 하는 유혹을 강하게 느낀다. 그리고 그것에 대해 정당화하고 방어하기 위해 많은 논리와 근거를 마련하려고 한다.


내가 어떻게든 술을 먹기 위해 거짓말을 한다거나 술을 숨겨놓는 습관이 있다면, 이미 알코올 중독으로 들어가 있는 것이다.


중독은 알코올, 마약, 니코틴, 카페인, 음식, 설탕과 같은 물질 중독(섭취 중독)뿐 아니라, 일련의 특정한 행동이나 상호작용들과 같은 과정 중독(행위 중독)도 포함한다. 돈 모으기, 도박, 섹스, 일, 종교, 걱정 등과 같이 거의 모든 삶의 과정이 일종의 중독 매개자가 될 수 있다.


사회적으로 비난받지 않는 일, 심지어 권장되고 칭찬받는 일일 경우에는 중독 자체를 인식하기 힘들다. 우리가 그 행위에 붙여주는 이름도 긍정적이기 때문이다. 즉, 우리는 세상 모든 것에 중독될 수 있다.


# 중독에 관해서 임상심리학자인 앤 윌슨 섀프의 <중독 사회>를 참조했습니다. 일독해 볼 것을 추천합니다. 현재 종이책은 절판 상태인데, 다행히도 이북이 나와 있습니다.


<중독 사회>에서는 '중독 시스템'이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중독 시스템은 중독적 행위를 불러일으키는 시스템이며, 일종의 닫혀 있는 폐쇄적 시스템이다. 일단 그 시스템에 들어가면 개인은 행위나 역할에 있어서 거의 선택의 여지가 없다.


나는 에니어그램의 성격 유형이야말로 가장 근원적인 중독 시스템이라고 생각한다. '성격의 감옥'에 들어가면 선택의 여지가 없다. 성격 자체가 중독이라면, 모든 사람은 '성격 중독자'다. 따라서 성격 시스템이 선호하는 여러 가지 하위 중독 시스템에 들어가는 것은 오히려 자연스러운 일이다.




2. 관계 중독


성격 중독자끼리 만났을 때 두 개의 중독이 서로 화학작용을 일으켜서 만들어내는 것이 관계 중독이다. 불건강한 두 성격이 만들어내는 시너지 효과 같은 것이다. 지구에 만연해 있는 ‘진정한 사랑’에 대한 환상이 둘 사이에 아교처럼 결합하면 관계 중독은 더욱 확고해진다.


관계 중독은 일종의 '밀착 관계'이다. 두 사람이 서로 관계 중독에 빠지면, 그들은 모두 그런 밀착 관계 없이는 절대 존재할 수 없다고 여긴다. 결혼은 가장 안전하게 관계 중독이 될 수 있도록 사회적으로 마련된 대표적인 장치이다.


결혼이 만들어내는 가족은 사회 시스템의 기초 단위이다. 친목 모임, 학교, 회사, 국가, 종교 등 다양한 규모의 집단들은 근본적으로 가족 형태를 모델로 해서 작동한다. 그렇다면, 모든 사회 시스템은 중독을 기반하여 운영된다고 볼 수 있다.


인간 사회는 중독 관계를 북돋우고 강제할 수밖에 없다. 많은 사람이 수시로 이혼하고 퇴사하고 결별하고 개종하며 쉽게 관계를 끊어버리는 것은 사회 안정에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관계 중독에 빠진 결혼은 공적인 모습과 사적인 모습의 두 얼굴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다.


공적인 얼굴에서는, 예를 들어, 여성은 어린이에 불과하며 남성은 어른이다. 남성은 여성에게 경제를 포함한 모든 면에서 보호자 역할을 한다. 그러나 사적인 얼굴에서는, 그 역할이 완전히 뒤바뀌어서, 남성은 어린이가 되고 여성은 어른이 된다. 물론, 반대로 예를 들 수도 있다. 아무튼 이렇게 되면, 그 어느 쪽도 자기 짝을 떠날 가망성은 없다.


알마와 레이놀즈의 관계도 겉으로는 알마가 레이놀즈에게 완전히 종속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겉모습과는 상반된 내부의 모습이 점차 드러난다.


알마는 레이놀즈에게 자신의 이상형에 대해 말한다.


"나는 당신이 쓰러져 주기를 바라요. 힘없이, 연약하게, 무방비하게, 내 도움만 기다리며(I want you flat on your back.. helpless, tender, open, with only me to help)"


레이놀즈를 간호하는 알마2.jpg 무방비하게 쓰러져 있는 레이놀즈를 간호하는 알마


알마는 레이놀즈가 자신에게 쉽사리 중독되지 않자, 독버섯을 요리에 섞어서 실제로 중독시켜 버린다. 그리고 무방비하게 쓰러져 버린 레이놀즈를 극진히 간호한다.


여기서 나는 전설적인 2번 유형 영화 <미저리>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물론 병적인 2번을 말하는 것이다. 건강하고 성숙한 2번은 절대 그렇지 않다.


레이놀즈는 환각 상태에서 엄마의 모습과 알마의 모습을 겹쳐서 보게 된다. 이때 알마는 늘 엄마에 대한 애증에 시달려온 레이놀즈의 진짜 엄마가 된다. 2번 알마는 무방비한 상태의 두려움에 가득 찬 연약한 영혼을 다루는 정석을 보여준다.

알마와 돌아가신 어머니 유령.jpg 아픈 레이놀즈에게 신부복을 입은 어머니의 유령과 알마의 모습이 겹쳐서 보인다.


폴 토머스 앤더슨 감독은 자신이 아팠을 때 아내가 그 상황을 내심 즐기는 것을 보고 이 영화를 구상하게 되었다는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 감독의 아내가 무슨 유형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2번 유형이 아닌 많은 여자가 2번의 역할을 내재화해 왔다.


이것은 모성 본능이기도 하고 사회적인 현상이기도 하다. 전통적으로 여자가 사회적, 개인적 관계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기 힘들었기 때문에, 많은 여자가 무의식 중에 2번 유형의 우회적이고 간접적인 전략을 채택했을 것이다. 이제는 시류가 달라졌기 때문에 많은 남자가 관계 속에서 2번 역할을 넘겨받게 될 것이다.


레이놀즈는 알마에게 말한다.


"사랑해. 당신이 나를 이 어둠에서 건져줘. 저주를 깨줘."


레이놀즈는 중독으로 인한 환각 속에서 깊숙이 숨어있던 엄마에 대한 애증과 죽음의 공포를 깨우친다. 그는 알마의 따뜻한 보살핌으로 맛본 모성과 내맡김의 달콤함에 빠져들어, 결국 알마에게 청혼하게 된다.


그의 개인적 가치관에 전혀 어울리지 않은 이런 행동은 '사랑에 빠졌다'라고 할 수도 있지만, 더 정확하게 말하면 '관계중독에 빠졌다'라고 할 수 있다. 레이놀즈는 물리적인 중독에서 정신적인 중독으로 나아간 것이다.


나는 결혼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결혼이 맞는 사람이 있고, 맞지 않는 사람이 있는 것이다. 레이놀즈는 예술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사람이며, 어둠과 저주는 그의 창조성의 근원이기도 하다. 레이놀즈 같은 극도의 '개인주의자'는 결혼에 부적합하다.


반면, 알마는 헌신하는 사람이며, 자신이 보살펴 줄 사람이 필요하다. 자기 전부를 희생할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는 알마 같은 유형은 결혼에 최적화되어 있다.


레이놀즈는 결혼 후 예전만큼 일에 몰입하기가 힘들어지는 것을 느끼며, 점점 결혼이라는 밀착된 관계를 견디기 힘들어한다. 그는 아침 식사 시간에 알마의 식기 소리가 다시 혐오스러워진다. 어느 날 그는 시실에게 자신이 끔찍한 실수를 했다며 고백한다.


그때 알마는 레이놀즈 뒤에 서서 그가 하는 말을 묵묵히 다 듣고 있었다.


알마는 다시 한번 예전의 비법을 써보기로 한다. 이번에는 레이놀즈 앞에서 당당하게.


알마는 레이놀즈 앞에 목숨이 위태로울 수 있는 음식을 요리해서 턱 내놓는다. 보란 듯이 그가 싫어하는 버터까지 써가며.


알마는 레이놀즈를 바라본다. "내가 주는 따뜻하고 그리운 엄마의 품과 보호를 받아들이겠어요? 아니면 예전의 어둠과 저주로 돌아가겠어요?"라고 말하는 듯이.


레이놀즈는 알마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포크를 들어 비장하게 음식을 먹는다.


그들의 줄다리기는 끝났다.

독버섯 먹는 레이놀즈.jpg 레이놀즈는 죽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면서도 알마의 음식을 먹는다.


불건강한 관계에서는 항상 권력이 생겨난다. '보이지 않는 실'은 권력의 이동 과정이기도 하다. 물론, 당사자를 포함해서 아무도 이 '권력의 실'이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결혼 생활의 권력은 레이놀즈에게서 알마에게 넘어간다. 그리고 우드콕 하우스의 권력도 시실에게서 알마에게 넘어간다.

식탁의 세 사람.jpg 우드콕 하우스의 권력은 세 사람에게 차례차례 넘어간다.


두 사람은 앞으로 행복할까? 아마도. 레이놀즈는 그 후로도 여러 번 쓰러져야 할지도 모른다.


우드콕 하우스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 안타깝게도 시대의 물결을 타지 못하고 변방의 의상실로 밀려나게 될 가능성이 커 보인다.


이것은 전적인 불행도 행복도 아니다. 이들이 어떤 선택을 했다 해도, 모든 것은 그저 불안과 안정, 자유와 책임, 권태와 자극, 두려움과 무감각 사이의 트레이드오프일 뿐이다.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는 사막여우에게 '길들여진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배운다. 그리고 깨닫는다. 자신이 장미 한송이에게 길들여졌었다는 것을. 장미와 어린 왕자의 관계는 일종의 관계 중독 상태였다.


어린 왕자는 수천수만의 장미가 피어있는 정원을 보고 절망하여 운다. 내가 <어린 왕자>에서 가장 가슴 아프게 보았던 장면이다.


어린 왕자가 사랑의 중독에서 벗어나는 이야기는 어떻게 진행될까? 나만의 어린 왕자 후속편을 한번 그려보았다. 알마와 레이놀즈도 중독에서 벗어나 성숙한 사랑을 이루길 바라며.



<새로 쓰는 어린 왕자>


어린 왕자는 자신만 존재하는 자그마한 행성에서 하루하루를 자기 자신과 보내면서도, ‘외로움’이란 단어를 머릿속에 떠올린 적이 없었다. 그런 개념 자체를 몰랐다.


어느 날 아름다운 꽃 한송이와 만나게 되어, 어린 왕자의 삶에는 급작스러운 변화가 일어난다. 그동안 어린 왕자에게는 자기 자신이 곧 세계였다. '나'라는 개념이 별다른 쓸 데가 없었다. 나를 소개할 누군가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어린 왕자에게 다가온 장미꽃 한송이는 새로운 하나의 세계였다. 세계와 세계의 만남. 완전히 다른 두 세계를 연결하기 위해서는 많은 새로운 도구들이 필요하게 되었다. '나', '너', '관계', '사랑'...


사랑이 찾아오는 순간 호박이 넝쿨째 들어오듯 많은 것들이 순차적으로 딸려 온다. 처음에는 '설렘', '기쁨', '희망'이, 시간이 지날수록 '의존', '두려움', '미움', '책임감' 등이.


이러한 관계에 능숙했던 꽃은 어린 왕자를 쉽게 사로잡는다. 꽃은 달콤한 감정의 대가로 자신의 온갖 변덕스러운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한 많은 요구 사항을 내걸었다. 어린 왕자는 장미꽃의 가시에 찔려 난생처음 달콤한 아픔을 경험한다.


날카로운 첫사랑의 키스를 뒤로하고, 어린 왕자는 꽃을 떠난다. 본격적으로 세상 속으로 뛰어들기로 마음먹는다. 어린 왕자는 사막여우를 만나고 나서야 자신이 한송이의 장미꽃에게 ‘길들여졌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여행 중에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면서, 이 ‘길들여짐’이 얼마나 아슬아슬하고 정밀한 줄타기 곡예와 같은 것인지도 깨닫는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아무런 준비도 없이 관계라는 외줄 위에 올라가서 술 취한 듯 비틀거리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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