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속 에니어그램 #8] 5번 유형 탐구하기
예술 작품을 감상한다는 것은 참으로 개인적인 행위인 것 같다. '아는 만큼 보인다'라는 말처럼 객관적인 감상의 기준은 대뇌피질에 쾌감을 주지만, 개인적 경험과 맞닿아서 생기는 감동은 존재 전체에 스며든다.
나는 영화를 보다가 좀 이상한 장면에서 눈물이 터지는 경향이 있다. 소위 신파라고 불리는 장면들에서는 저항감을 느끼며 버티다가, 나만의 눈물 포인트에서 혼자 쏟아진다. 그래서 가끔 영화관에서 난감한 경우가 있다.
그런데 <샤도우랜드(Shadowlands)>는 줄거리만 보면 로맨스와 불치의 병 등이 버무려진 전형적인 멜로적 신파인데도 내가 펑펑 울면서 본 몇 안 되는 영화다. 아, 내가 싫어하는 류의 이야기인데 왜 울었지?
변명을 해보자면, 나는 영화의 스토리가 아니라 앤서니 홉킨스의 캐릭터 자체에 감정이입이 많이 되었다. 상대역인 데브라 윙거도 연기는 좋았지만 그다지 주의가 안 갔다. 전에 쓴 <밀양>의 리뷰에서도 전도연의 모노드라마 같다고 했는데, 여기서도 오직 앤서니 홉킨스만 홀로 빛나고 있었다.
나는 확실한 에니어그램 5번 유형이다. '5번 전문가'의 시점에서 봤을 때, <샤도우랜드>는 최고의 5번 영화라고 생각한다. 5번 유형의 특성이 아주 잘 묘사되었으며, 5번의 함정과 성장 과정까지 그야말로 5번을 위한 종합 선물세트 같은 영화다.
<샤도우랜드>는 신학자이자 <나니아 연대기>의 작가로 잘 알려진 C.S. 루이스(Clive Staples Lewis, 1898-1963)의 자전적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다.
영화는 1952년의 영국에서 시작한다. 루이스(앤서니 홉킨스)는 옥스퍼드 대학교의 영문학 교수이며, 동시에 신학자이며 판타지 아동 문학가이기도 하다. 가까운 친구들은 그를 '잭'이라 부른다. 그는 이성과의 교류도 없으며, 형 워니와 평생을 같이 사는 독신남이다. 명석하고 이성적인 잭은 지적 토론에서만 생동감을 느끼며, 자신의 생활 반경을 거의 벗어나지 않으며 조용히 살아간다. 그런 잭의 삶에 나타난 감성 풍부한 미국인 조이(데브라 윙거)는 잭의 안정된 삶을 뒤흔들어 놓는다.
목차는 다음과 같다.
1. 5번 유형의 견고한 성(城)
2. '아픔을 겪는 것'과 '아픔의 의미를 아는 것'의 차이
3. 5번 유형의 변화와 성장
4. 전체적인 시각을 가질 때 삶은 변화한다. That's the deal.
그는 왜 자신을 '잭(Jack)'이라고 부르게 했을까?
영미권에서 잭은 우리나라의 '철수' 정도로 흔히 쓰이는 이름이며, 단순히 일반적인 남자의 대명사처럼 사용되기도 한다. '철수와 영희'처럼 '잭 앤 질(Jack and Jill)'로 등장하거나, 뚜껑을 열면 인형이 튀어나오는 깜짝 상자인 '잭 인 더 박스(Jack-in-the-box)', 신원 미상의 연쇄 살인범을 가리키는 '잭 더 리퍼(Jack the Ripper)' 등 많은 남성 의인화에 사용되는 이름이다.
5번 유형은 자신만의 성 안에서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며 안전하게 세상과 거리를 두고 사는 것을 원하는 사람들이다.
루이스에게 대학교와 서재는 자신만의 성이다. 그 성채에서 영문학과 신학을 강의하고 판타지 소설을 쓰는 일이 그가 가장 좋아하는 일이며, 세상과의 다른 관계는 그를 성가시게 할 뿐이다. 자신과 세상 사이에 '잭'이라는 일반명사를 걸어두고 관계하는 것이 그에게 안정감을 주었을 것이다.
단순히 겸손하기 위해서 평범한 이름을 쓴 것이라는 해석은 표면적인 것이다. 그는 겸손하지 않다. 자신의 지적 영역에서는 엄청난 자신감과 오만함을 가지고 있다.
잭은 자신이 논쟁에서 진 적이 없다고 자부하며, 대학 강의에서 학생들에게 자신만만하게 말한다.
"내 말에 동의할 수 없다면 말해보게. 나에게 주장을 펴봐. 받아주겠네(Fight me. I can take it back.)."
"아무튼 내가 이길 것 같군."
토론이나 논쟁, 전문가 역할은 5번이 파이팅 할 수 있는 영역이다. 집필과 강연은 5번 유형이 전형적으로 세상과 소통하는 방식이다. 이들은 세상과 직접 소통하고 부대끼는 것을 어려워하기 때문이다.
간접 소통, 간접 경험, 거리 두기는 5번의 천성이라서, 다들 힘들어했던 코로나 시국에도 많은 5번들은 평소 생활과 별로 달라진 것을 못 느꼈을 것이다.
잭은 독자들과도 편지로만 소통하는 것이 편하다. "나는 별로 대중적인 사람이 아니라서…"라고 말하는 그가 조이와 만나는 것은 예외적인 사건이다. 처음에는 독자와의 일회성 만남으로 생각하고, 부담스럽지만 한 번만 그 자리를 견디면 된다는 생각이었을 것이다.
잭 : "1시간 정도 예의를 차려 대화한 후 집으로 돌아가서 예전처럼 살면 돼"
잭이 커피숍에서 기다리고 있을 때, 거침없는 조이가 큰 소리로 그의 이름을 불러서 사람들의 주목을 받게 된다. 이목 집중은 5번들이 '불편'해하는 상황이다. 잭의 얼굴에 나타나는 순간적으로 당황하는 표정을 나는 놓치지 않고 보았다.
잭은 점차 조이에게 끌리는 자신에 대해 스스로도 놀란다. 조이가 이혼 문제로 영국과 미국을 오가는 동안 잭은 조이에 대한 자신의 감정이 얼마나 간절한 것인지를 깨닫게 된다. 그러나 잭은 가슴에 묻어둔 감정을 쉽게 표현하지 못한다.
둘 사이는 가까워질 듯하면서도 계속 일정한 거리감이 유지된다. 답답한 조이는 화가 나서 말한다.
조이 : "당신은 의혹, 두려움, 고통, 공포 같은 것은 없을 거예요. 아무도 당신에게 접근 못해요."
잭 : "왜 그래요. 나는 이해를 못 하겠어요."
조이 : "당신은 이미 이해하고 있어요. 받아들이기 싫은 것뿐이죠. 나도 이런 건 싫어요."
5번이 철벽 수비하는 방식은 상대방의 영역을 존중하는 전략이다. 5번의 대화 스타일은 상대에 대해 캐묻지 않는다. 이것은 서로 간의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기 위한 것이다. 만약 1번이라면 상대방에게 무례하지 않기 위한 에티켓일 수 있지만, 5번은 나에게도 캐묻지 말라는 의도가 숨어있다.
잭이 "사랑도 일종의 우정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사랑이라는 위험한 감정을 우정이라는 안전한 관념 속에 넣는 것이다. 사랑만큼 상대의 영역을 침범하여 얽혀드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감성이 풍부하며 잭 못지않게 지성적인 조이는 이런 잭의 방어기제에 대해 돌직구를 날리며 떠난다.
그렇다고 해서 5번이 감정이 없는 것은 아니다. 감정형들은 머리형들이 감정이 메말랐다고 생각하지만, 감정이 메마르는 것은 불가능하다. 인간의 본질은 감정 덩어리이기 때문이다. 모든 경험은 자동적으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단지 그 감정이 직접적으로 표출되는가, 억압되는가, 우회로를 타고 변형되는가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5번은 자신의 감정을 분리하여 객관화시켜 버린다. 그러면 살아있는 감정은 한낱 형이상학적이며 상징적인 개념이 되어서, 내가 초연하게 다룰 수 있는 하나의 대상이 된다.
조이와 멀어지고 나서 잭은 이런 말들을 장황하게 늘어놓는다.
"지금은 노력하는 시간이야… 무의미한 시간, … 세상의 기다리는 방, … 황폐감을 느껴본 적 있어?"
5번 번역기를 돌려보면, "나 조이가 그리워 미치겠어! 돌아버리겠다규~"라는 뜻이다.
이런 식의 회피로는 현실에서 해소되어야 할 감정과 에너지가 단순히 사라지지 않는다. 그래서 5번들은 내용은 다르지만 자기만의 세계를 만들고, 그 상상의 세계 속에서 많은 에너지를 소비한다.
잭의 또 다른 세계는 나니아 연대기의 옷장 속 마법 세계이다. 옷장과 여러 물건들이 쌓여 있는 다락은 잭의 관념의 세계를 상징한다. 옷장 속에 마법의 세계인 '나니아'로 가는 문이 있다. 나니아는 현실보다 더 거대한 세계이다.
동료들은 잭이 아이들을 잘 모르면서 아동 문학의 대가인 것을 놀린다. “좀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나도 옛날엔 어린아이였어”라는 잭의 대답은 5번의 유머다. 시공을 초월한 상상과 관념의 세계에서는 무엇이든 가능하다.
영화에는 잭이 기독교 신학을 열정적으로 강의하는 모습이 자주 나온다.
그는 강연에서 버스가 해군 생도들을 덮쳐서 24명이 죽은 한 사건을 예로 들어서 고통의 의미를 말한다.
"하느님은 그 순간에 어디에 계셨나? 왜 막지 않았나? 우리가 고통받기를 원하시는가?"
"하느님은 우리가 철들기를 원한다.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에 고통의 선물을 준다. 우리는 어린아이의 방에서 나와 타인과의 세계로 나아가야 한다. 그렇게 만들어주는 것이 고통이다."
나는 여기서 <인 디 에어>의 강연이 겹쳐서 보였다. 안정과 정착을 두려워하는 라이언 빙헴은 동기부여 강연에서 자신을 억누르는 모든 것을 버리고 자유로워지라고 말한다. 청중들은 잭과 라이언에게 열광하지만, 정작 이들은 자신의 해법으로 구원받지 못한다.
라이언은 필요한 책임을 짊어지는 법을 배워야 하며, 잭은 고통을 직접 경험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잭은 단지 관념과 사유를 통해 자신이 철들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조각가가 인간의 형상으로 깎아내는 돌덩어리이다. 끌로 때리면 너무 아프지만, 우리를 완벽하게 해 준다. 고통은 귀머거리 세상에게 외치는 메가폰이다." 이것은 잭의 레퍼토리이다.
잭은 합리적 이유를 앞세우며 다가올지도 모르는 고통을 회피하고 있다.
진정으로 삶을 경험하는 것만이 5번 유형이 변화하는 길이다. 그 선행 조건으로 고통에 대한 ‘조직적 회피’를 알아차려야 한다.
영화에서 잭의 진실이 드러나는 결정적 순간(true moment)은 조이가 불치병으로 죽어간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이다. 대학 총장 해리와 대화하며 잭은 조이가 아니라 조이의 아들 더글러스가 남겨질 것을 걱정한다.
해리: "자네가 그 여자 가족은 아니잖아?" (그런데 왜 아들까지 걱정하는 거야?)
잭 : "내 아내는 아니라는 거죠? 그렇죠, 말도 안 되고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죠. 어떻게 조이가 내 아내겠어요. 그러면 그녀를 사랑해야 하고, 이 세상 누구보다 그녀를 더 아껴야 되잖아요. 잃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가슴이 찢어지는 고통도 느껴야 하잖아요."
해리 : "미안하네. 자네가 그 정도인지 몰랐네."
잭 : "나도 몰랐어."
잭은 자신도 모르게 처음으로 진심을 여과 없이 드러낸다. 그리고 달라진다. 5번의 거리 두기가 사라진 것을 조이는 가장 먼저 알아챈다.
조이 : <병실에서> "당신 달라 보이네요. 이제 나를 보네요."
이전의 잭은 자기 방어적 합리화의 대가였다.
잭 : “간접 경험도 경험이죠.”
조이 : “독서는 아프지 않게 하니까 안전하죠.”
잭 : “아픔을 준다고 해서 더 진실되고 중요한 것은 아니죠. 고통은 수단입니다.(Pain is a tool.)”
잭은 조이와 늘 이런 티키타카를 했지만, 이제는 고통의 의미에 대한 진정한 성찰을 하게 되었고 피상성을 탈피하게 된다.
해리 : “자네가 기도를 열심히 한 것을 아네. 하느님이 응답하시는 거야”
잭 : “그래서 기도하는 게 아닙니다. 어찌할 바를 몰라 그러는 거죠. 제 자신이 무기력해서요. 기도로 하느님이 변화되지 않아요. 제가 변화하죠.”
잭은 신의 머리 위에 올라앉아서 어떤 명분을 가지고 기도할 수 없음을 체험한다. 기도란 그저 물에 빠진 절박한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것임을 고백한다.
조이의 장례식을 치르고 나서, 진짜 현실의 고통을 맛본 잭은 마치 불에 덴 것처럼 폭주한다.
동료 교수: "왜 이런 일이 생겨야 하는지는 하느님만이 아시네."
잭 : "하느님이 신경이나 쓰실까요? 우리는 창조물일 뿐이죠. 실험실의 쥐 같은 신세죠."
잭 : (동료들이 계속 위로하자 소리를 지르며) "No!!! 지독히도 끔찍한 일이었어요. 그뿐이죠."
"고통은 결국 고통일 뿐이었어. 명분도 목적도 없고 본보기도 아니었지."
잭은 자신이 신학 강의에서 역설하던 정과 끌로 완벽해지는 고통의 의미는 그렇게 쉽게 얻어지는 것이 아님을 비로소 알게 된다.
잭은 조이가 죽고 나서 조이의 아들 더글라스와 다락방에 나란히 앉아서 아이처럼 엉엉 운다. 무기력한 두 아이는 서로 기대고 우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더글러스 : "엄마를 다시 보고 싶어요."
잭 : "나도 그렇단다."
늘 대답이 준비되어 있던 잭은 더글러스에게 아무 말도 해줄 수 없었다.
예전에 잭은 자신과 너무나 닮은 제자 휘슬러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혼자가 아님을 깨닫기 위해 읽는다."
그러나 이 모든 아픔을 온전히 겪고 나서 새로운 신입생에게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혼자가 아님을 깨닫기 위해 사랑한다."
5번 유형에게 '읽는 것'이 '사랑하는 것'으로 바뀌는 것은 혁명이다.
최소주의자인 5번은 아무것도 주지도 받지도 않고, 세상과 거래하지 않으려 한다. 그러나 잭은 엔딩 내레이션에서 말한다.
“내 인생에서 선택할 기회가 두 번 있었다. 한 번은 소년으로서, 다른 한 번은 남자로서. 처음에는 안전한 길을 택했고, 나중에는 고통스러운 길을 택했다. 지금 내가 겪는 고통은 그때 누렸던 행복의 일부이다. That’s the deal.”
우리는 선택에 의해 인생이 좌우되는 줄만 알고, 현명한 선택을 하려고 부단히 노력한다.
우리는 세상의 일부분만을 보기 때문에 수많은 선택을 한다.
아홉 가지 유형은 저마다 자기가 보는 세상의 일부분을 근거로 선택을 한다.
그러나 어떤 선택을 하든 조삼모사처럼 삶의 배열을 바꿀 뿐, 전체 합은 언제나 동일하다.
즐거운 것은 아침에 네 개를 받으려 애쓰지만, 저녁에 받을 몫이 줄어들 뿐이다.
고통스러운 것은 아침에 세 개만 받으려고 발버둥치지만, 저녁이 되면 네 개로 늘어날 뿐이다.
이 진리를 아는 사람은 '선택하지 않음'을 선택한다.
'전체적으로 보는 사람'은 물 흐르는 대로 상황을 수용하고 받아들인다.
그것이 거래 조건이다.
That’s the de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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