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속 에니어그램 #9] 8번 유형 탐구하기
요즘 사람들의 입에 자주 오르내리는 분노조절장애는 단지 현대 사회의 문제만은 아닌 것 같다. 2500년 전에 붓다는 분노가 인간의 세 가지 치명적인 독 중의 하나라고 말했다. 인간이 무리 지어 살게 된 이래로 분노는 늘 골칫거리였다.
세 가지 독(三毒)은 인간이 가진 갖가지 고뇌의 뿌리를 탐욕(貪), 분노(瞋), 어리석음(癡)으로 요약한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것이 계속 지속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탐욕이며, 내가 싫어하는 것이 없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분노이다. 탐욕과 분노는 상황에 따라 교대로 등장하는 환상의 콤비와도 같다. 이 콤비는 어리석음이라는 공통 기반을 가지고 활동한다.
분노는 내면의 불(火)이다. 불은 중립적인 에너지이지만, 불을 통제하고 다루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다.
에니어그램 유형 중 분노조절장애가 가장 친숙한 번호는 8번일 것이다. 8번 유형은 거대한 불을 다루는 제사장과도 같다.
화염에 휩싸인 8번을 위한 영화로 마틴 맥도나(Martin McDonagh) 감독의 2017년 작품 <쓰리 빌보드(Three Billboards Outside Ebbing, Missouri)>를 가져왔다. 8번 영화답게 불이 여러 번 등장한다.
목차는 다음과 같다.
1. 분노의 기원
2. 8번의 정의 : 눈에는 눈, 이에는 이
3. 분노는 분노를 낳을 뿐이다.
4. 분노의 대안이 있는가?
분노는 밖으로 표출되느냐 안에 머물러 있느냐의 차이만 있을 뿐 인간의 기본 특성이다. 우리는 세상이 존 레넌의 <이매진>처럼 평화롭기를 바라지만 역사상 한 번도 실현한 적이 없다. 투쟁적인 에고들이 모인 것이 바로 세상이기 때문이다. 역사책을 한 장만 넘겨봐도 바로 피비린내 나는 전쟁이 나온다.
심리학적으로 보면, 모든 에고는 자아 경계(ego boundary)를 통해 '나인 것'과 '내가 아닌 것'을 구분한다. 자아경계는 세상과 나를 나누는 정신적 선이며, 분쟁 지역의 국경처럼 항상 긴장이 흐르고 걸핏하면 싸움이 일어나는 곳이다. 그래서 에고의 본질로부터 긴장과 분노, 폭력과 투쟁(爭)이 나온다.
아무리 평화롭고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사람이라도 자아 경계에 갇혀있는 한 폭력을 내재하고 있다는 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분노는 바로 에고에서 기원한다.
#에고의 또 다른 이름인 '성격'이 형성되어 감옥이 되는 과정은 다음 링크를 참조하세요.
세 가지 본능적 힘 중 장형은 이 자아 경계에 가장 민감한 유형이다. 이들은 통제당하는 것과 침범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크다. 장형 중 8번은 이 두려움을 분노라는 방식으로 밖으로 표출한다. 8번의 '선빵(first blood) 심리'는 바로 두려움에서 생겨나는 것이다.
8번은 외부의 딱딱한 갑옷 안에 두려움을 감추고 있는 유형이다. 소위 '외강내유'라고 할 수 있다.
사실 모든 유형은 외유내강 아니면 외강내유이다. 한없이 강하기만 한 사람도 없고, 한없이 부드럽기만 한 사람도 없다. 음양(陰陽)과 강유(剛柔)는 단지 배열의 문제일 뿐이다. 여성 속에는 아니무스가, 남성 속에는 아니마가 안팎을 바꿔서 있는 것과 같다.
이 심리적 배열을 이해하면 속성으로 상담의 달인이 될 수 있다. 강한 인상을 가진 사람에게는 내면에 부드러움을 언급하면 십중팔구 고개를 끄덕인다. 반대로 유한 인상을 가진 사람에게는 속에 강한 심지가 있다고 하면 된다.
외강내유인 8번은 갑각류나 선인장 같아서 겉은 매우 딱딱하지만 안에는 부드러운 속살이 있다. 혹은 '갑옷 입은 소녀'라는 별명도 있다.
밀드레드 헤이즈(프랜시스 맥도먼드)는 선물 가게를 운영하고 있는데, 그녀 자신도 가게에 진열된 도자기 인형처럼 겉은 단단해 보이지만 툭 건드리면 맥없이 깨지는 사람이다.
밀드레드가 죽은 딸의 토끼 슬리퍼를 신고 자신의 마음을 다독이는 모습이나, 딸이 죽은 자리에서 나타난 어린 사슴을 보고 위로받는 모습은 상처받고 지친 그녀의 마음을 드러낸다. 남들에게는 아귀처럼 달려들지만, 혼자 있을 때는 여린 여자일 뿐이다.
영화에는 또 한 명의 분노조절장애인이 등장한다. 제이슨 딕슨(샘 록웰)은 인종주의자이며 폭력성을 지닌 경찰이다. 터무니없는 가짜 뉴스를 믿는 반공주의자이기도 하다.
밀드레드와 딕슨은 서로를 거울처럼 마주 보며 사사건건 대립하고, 상대를 무시하고 모욕한다. 이들은 서로에게 자신의 보기 싫은 모습을 투사한다. 그러나 무시하고 모욕하는 기술은 밀드레드가 훨씬 뛰어나서 딕슨은 어버버 하며 당하기 일쑤다.
밀드레드는 자신의 분노와 폭력이 정당하다고 생각한다. 그녀가 생각하는 정의는 단순하다. 무언가를 빼앗으면 그에 동등한 것을 내놔야 한다. 눈을 빼앗으면 눈을 내놔야 하고, 목숨을 빼앗으면 목숨을 내놔야 한다.
밀드레드는 딸 안젤라를 강간 살해한 범인이 7개월이 지나도록 잡히지 않자, 도시 외곽 도로변에 있는 세 개의 광고판에 대문짝만한 광고를 싣는다.
Raped while dying(죽어가는 동안 강간당함)
And still no arrests(그리고 아직 체포하지도 못했는데)?
How com chief Willoughby(윌라비 소장은 어떻게 된 거야)?
영화의 원제인 '미주리주 에빙 외곽의 광고판 세 개'는 8번의 타협 없는 직진 스타일을 상징한다.
마을 사람들의 신망이 두터운 경찰 서장을 직격하는 이 문구는 지방 방송국의 취재까지 이어지며, 마을을 발칵 뒤집어버린다.
윌라비 서장(우디 해럴슨)은 목격자도 없고, 의심스러운 용의자들뿐 아니라 전국의 모든 범죄자와도 DNA가 일치하지 않는 힘든 사건이라고 설득하자, 밀드레드는 반박한다.
밀드레드 : "이 마을의 모든 남자와 8살이 넘는 소년들에게서 피를 뽑아낼 수 있잖아요."
윌라비 : "헤이즈 부인, 그건 민법에 저촉돼요. 게다가 만일 그 범인이 이 동네를 떠났다면..."
밀드레드 : "그럼 이 나라의 모든 남자의 피를 뽑아야죠."
이런 생각은 너무 단순하고 극단적이어서 누구의 공감도 얻지 못한다.
밀드레드의 정의는 즉각적이고 예외가 없다. 치과의사가 서장을 옹호하며 밀드레드를 설득하려 하자 바로 치료용 드릴을 빼앗아 의사의 손톱에 구멍을 낸다.
아이들도 그녀의 정의봉 앞에서 예외가 아니다. 한 학생이 자신의 자동차에 음식을 던지자, 즉시 내려 범인(?)의 정강이를 발로 차 처단한다. 그녀는 거의 반사신경이 반응하는 것처럼 행동한다.
밀드레드의 연이은 과격한 행동들은 그녀를 동정하는 마음 사람들마저 적대적으로 돌아서게 한다. 중재를 위해 마을의 신부가 찾아왔을 때도, 밀드레드는 "마을에서 일어난 범죄를 방관하고 있으니 당신도 범죄자다. 내 집에서 썩 나가라."라며 거칠게 그를 몰아낸다. 미국 영화에서는 아무리 막장 인물이라도 대체로 성직자에게는 예의를 갖추는 편인데 밀드레드에게는 통하지 않는다.
"그 범죄 사실을 몰랐더라도, 혹은 주변에서 방관했더라도 똑같이 죄를 저지른 것이므로 처벌되어 마땅하다. 그 죄인이 아니라 그 죄를 처벌해야 한다. 그것이 어디서 벌어졌건 동일하게 처벌돼야 한다. 자신의 딸을 죽인 범인뿐만 아니라, 이라크에서 강간을 저지른 자가 있다면 역시 똑같이 찾아서 처단해야 한다." - 이것이 밀드레드의 정의이다.
그러면 밀드레드는 실제로 정의로운가? 그녀가 정의를 구현하려면 어떤 것을 갖추어야 하는가?
정의는 공정에 기반해야 한다.
윌라비 서장은 어려운 사건이지만 최선을 다하고 있으며 피해자 가족을 진심으로 배려하고 있다. 게다가 말기 암으로 투병 중이다. 여기에 서장을 비난하는 광고판을 세워 미디어의 탐욕스러운 관심을 유도하며 모욕하는 것이 공정한 것인가?
정의는 사실에 기반해야 한다.
밀드레드는 자신의 광고판이 불타자 경찰 놈들의 짓이라고 단정하고, 바로 경찰서를 방화한다. 또 하나의 분노의 축인 딕슨 경관은 자신이 존경하는 윌라비 서장의 죽음의 원인을 밀드레드와 웰비의 광고판으로 간주하고 폭주한다. 이들의 빗나간 폭주는 또 다른 결과를 만들어낸다.
8번은 본능이 발달한 장형이기 때문에 직감적인 판단이 뛰어난 편이다. 이들은 사냥 본능을 가진 맹수처럼 직감적으로 행동에 돌입한다. 이들은 설사 자신의 심증이 틀렸다 해도 인정하거나 사과하는 것을 어려워한다.
그러나 진실은 언제나 숨어 있으며, 뒤늦게 나타난다. 광고판에 불을 놓은 것은 전남편이었고, 윌라비 서장의 죽음은 광고판 때문이 아니었다.
8번의 이러한 분노 표출 습관은 결국 자기 자신에게 가장 큰 해를 끼친다. 한 번 폭발한 분노는 주변 사람에게 되돌릴 수 없는 상처를 주며 관계 파탄을 가져온다. 많은 8번이 사소한 갈등을 일으켜서 자신의 자질과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는 경험을 한다. 밀드레드는 동정을 받아 마땅한 비극을 겪었음에도, 스스로 주변 사람들의 반감을 불러일으킨다. 심지어 테러의 위협에 노출되기도 한다.
그러면 분노를 '잘'하는 방법은 없을까? '이성적 분노'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따뜻한 아이스 아메리카노와 같은 '차가운 불'이라는 것을 실현할 수 있을까?
많은 영화에서 선한 주인공이 부당한 핍박을 받다가 악당에게 분노에 찬 응징을 할 때, 우리는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이런 연출의 대가는 단연 타란티노 감독이다. <장고 : 분노의 추적자>는 폭력의 쾌감을 극대화한다. 악당의 빌드업된 서사가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 우리는 정당하게 폭력을 만끽할 수 있다.
그러나 현실은 영화와 다르다. 영화는 2시간 내외에서 마무리가 된다. 그러나 현실은 마무리되지 않고 계속 이어진다. 분노의 불은 계속 여기저기로 옮겨 붙어서 타오른다.
분노는 타오르는 불과 같아서 걷잡을 수 없이 휘몰아칠 뿐이다. 눈먼 장님과 같이 분노의 불은 정확한 표적을 찾지 못한다. 밀드레드와 딕슨의 분노는 표적을 잃고 이리저리 분출되며 여러 사람에게 상처를 준다.
산불이 한번 번지면 몇 달 몇 년을 타오르듯이, 분노는 또 다른 분노로 전염된다.
영화에서 세 번의 불이 타오른다. 안젤라의 시신이 불태워졌고, 광고판이 불태워졌고, 경찰서가 불태워졌다. 물리적 불과 내면의 불에 의해.
영화에서는 단지 세 번 불타올랐지만, 세상은 끊임없이 불타오르고 있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이해할 수 없는 분노와 폭력은 이전의 눈먼 분노의 씨앗들이 차례로 발아한 것이다.
흑인 노예를 핍박한 역사가 LA 폭동으로 이어졌고, 과거 제국주의 역사가 이슬람 급진주의를 만들었고, 수천 년간의 여자들의 억압된 분노가 현재의 급진적 페미니즘을 탄생시켰다. 전남편의 폭력성은 밀드레드에게로, 엄마의 과격한 성향은 딕슨에게로 전이되었다. 과거의 불에 의해 정작 엉뚱한 사람들이 피해를 보고 있는 것이다.
분노의 이러한 속성은 전남편의 19살 철부지 애인의 입으로 말해진다.
"무슨 책이더라. 어디선가 읽었는데, 분노는 분노를 낳을 뿐이래요."
어린애도 알 만큼 자명한 것을 밀드레드와 딕슨은 모른다.
서로를 증오하던 밀드레드와 딕슨은 마지막에 극적인 연합을 이룬다. 안젤라를 죽인 범인을 찾는 데는 실패했지만 또 다른 강간 살인범을 처단하러 무작정 간다. 이들은 행동주의자들답게 "일단 가면서 생각하자."라고 말한다.
이들은 또 다른 분노의 불을 일으킬 것인가? 분노의 대안을 찾을 것인가?
열린 결말로 영화는 끝난다. 밀드레드와 딕슨이 가면서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결론을 내렸을지 우리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영화에서 분노와 복수의 고리를 끊을 수 있는 대안을 찾을 수 있다.
영화에는 밀드레드와 딕슨이라는 분노 콤비에 반대되는 인물로 경찰서장 윌라비와 광고회사의 웰비가 나온다. 광고판이 사각형인 것처럼 이 영화도 네 명의 인물이 각 꼭짓점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윌라비는 인생의 아이러니를 잘 알고 있으며, 약간 자조적이기도 하고, 유머 감각도 있는 참 매력 있는 캐릭터이다. 그는 성숙한 9번 유형의 포용력과 인내심을 보여준다.
그는 죽기 전에 돈에 쪼들려 있는 밀드레드의 다음 달 광고비를 몰래 내준다. 자기를 디스하는 광고를 지지해 줌으로써 밀드레드의 외로운 싸움에 힘을 실어 준 것이다.
웰비는 자신을 죽도록 구타한 딕슨을 용서하고 화해한다. 화재 현장에서 화상을 입고 얼굴을 붕대로 칭칭 감은 채 누워있는 딕슨은 웰비가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을 경계하며 바라본다. 웰비는 오렌지주스를 따라서 빨대까지 꽂아서 딕슨에게 건넨다. 만신창이가 된 두 사람은 서로 마주본다. 딕슨의 마음에는 동요가 인다.
우리는 어디에서 분노와 복수의 고리를 끊을 수 있을까? 팽팽한 분노의 연속체에서 누가 먼저 놓을 것인가? 이것은 죄수의 딜레마와 같은 것이다.
밀드레드와 딕슨의 끝나지 않는 분노를 멈춘 것은 윌라비와 웰비의 화해의 제스처와 용서이다.
딕슨은 윌라비 서장의 사후 편지를 받고 결정적인 심경 변화가 일어난다.
"너는 좋은 경찰이 될 수 있어. 깊은 곳에서 넌 참 괜찮은 남자야. 네가 형사가 되기 위해 필요한 건 사랑이야. 진정한 사랑은 차분해. 차분해야 생각할 수 있어. 뭔가를 찾아내려면 생각해야 해."
윌라비는 단지 약간의 유머와 침착함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유머와 침착함은 사랑에서 나온다.
참고로, 딕슨은 에니어그램 6번 중 공포 대항형이다. 이들은 다른 6번들과 달리 8번의 행동 방식과 너무 흡사하여 서로 구분하기 힘들다. 공포대항형 6번과 8번들은 행동하고 나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차분하게 생각해야 한다. 인간에 대한 동정심을 가지고 생각해야 한다.
성숙한 8번은 2번 에너지에 자유롭게 접속할 수 있게 된다. 2번의 핵심은 사람을 먼저 생각하는 '측은지심'이다. '인간적으로 그럴 수는 없지.'라는 기본적인 태도이다. 성숙한 8번은 약한 자를 보살피고자 하는 마음에 응답하여 자신의 힘을 다른 사람을 위해 사용한다. 이것이 진정한 '의로움'이다.
의로움과 정의는 인간에 대한 사랑을 기반으로 할 때만 바르게 실현된다. 이것이 공자가 말하는 '인(仁)에 기반한 의(義)'이다.
'견리사의(見利思義), 견위수명(見危授命) '
이익을 보면 의로움을 생각하고, 위태로움을 보면 목숨을 바친다.
<論語-憲問>
이 말은 안중근 의사의 서예로도 유명하다. 약자를 보호하고 나라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친 안중근 의사는 성숙한 8번의 준거라고 할 수 있다.
웰비가 등장하는 첫 장면에서 읽고 있던 책이 플래너리 오코너의 '선한 사람은 찾기 어렵다(A Good Man is Hard to Find)'이다. 선한 사람은 어떤 조건을 가진 사람인가?
소인은 눈앞에 보이는 자신의 이익(利)에는 번개처럼 빠르지만, 의로움(義)에는 눈을 감는다. 그러나 대인은 자신의 이익을 포기하고 의로움에 자신을 바친다. 자신의 모든 이익을 완전히 포기하는 최고의 행위는 바로 자신의 목숨을 바치는 것이다.
이익을 떨쳐내고 의로움을 지켜낸 사람이 진정으로 선한 사람이다. 이때 8번의 분노 에너지는 차가운 파란색 불꽃을 일으키는 '이성적 분노'로 변모한다.
마지막 장면에서 밀드레드와 딕슨은 서로에 대한 악감정을 털어낸다. 한 번도 웃지 않고, 누구한테도 좋은 말을 안 하던 빌보드 레이디가 처음으로 웃으면서 영화는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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