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속 에니어그램 #1] 두려움과 성격의 감옥 형성과정
나이트 샤말란 감독의 <빌리지(Village)>(2004)는 어떤 특별한 마을에 관한 이야기이다.
<빌리지>는 보통 반전(plot twist) 영화로 분류되지만, 반전을 중심으로 보면 오히려 좀 심심하게 느껴질 수 있다. 영화 중반에 이미 몇 가지 힌트가 나올뿐더러, 감독의 전작인 <식스 센스> 정도의 충격을 주는 것도 아니다.
<빌리지>는 마을 주민들보다 마을 자체가 주인공처럼 느껴지는 영화다. 마을을 하나의 인격체로 본다면, 마을은 '두려움'과 '성격의 감옥'에 관한 은유로 해석할 수 있다.
다음 목차에 따라 이 마을의 정체성에 관해 에니어그램 이론을 적용하여 설명하고자 한다.
1. 성격의 감옥이 만들어지는 과정
2. 두려움과 자유의 관계
3. 두려움에서 비롯된 믿음과 인지 왜곡
4. 순수를 지키는 두 가지 방식
5. 세 가지 본능적 에너지(장형, 가슴형, 머리형)
성격은 단지 ‘좋다’, ‘나쁘다’, ‘부드럽다’, ‘강하다’, ‘고약하다’와 같이 형용사적으로 정의되는 것만이 아니다. 성격은 오랜 시간에 걸쳐 형성된 견고하고 총체적인 개인적 틀이다.
아이가 태어나서 자라는 과정은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한 갑옷을 만들어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 갑옷은 체화되어 자신에게 없어서는 안 될 조건이 된다. 이렇게 조건화(conditioning)된 틀이 확고해지면 자기의 정체성이 된다. 이것이 성격이다. 성격은 태도와 행위뿐 아니라 사고와 감정을 포괄하는 것으로, 개인마다 일정한 패턴을 가진다.
성격은 양면성을 가진다. 성격은 나를 지키기 위한 갑옷이며 동시에 나를 구속하는 감옥이다.
아이는 세상에 삼켜지지 않기 위해 자신만의 방어막이 필요하다. 이때 성격은 자기를 보호하는 갑옷이며, 그 안에서 세상에 대해 안정감과 통제력을 느낄 수 있게 해 준다.
동시에 '성격의 갑옷'은 자기를 구속하는 틀이 되어 세상을 특정한 방식으로 인식하도록 작동한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세상과 유리된 '성격의 감옥'에 갇히게 된다.
이 틀은 사람마다 다르며, 에니어그램에서는 크게 아홉 가지 유형으로 나뉜다.
그러면 성격이라는 구조물을 떠받치는 근원은 무엇일까?
두려움이 성격의 뿌리이며, 두려움을 다루는 방식이 성격이다. 인간은 여러 가지 두려움을 가지고 있지만, 모든 두려움의 근원은 결국 죽음에 대한 공포이다. 에니어그램에서는 죽음이라는 근원적 공포를 해석하고 다루는 방식에 따라 인간의 유형을 아홉가지로 나눈다.
모든 자아의 뿌리에는 죽음이라는 절망이 있다. 죽는 것은 두렵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이는 죽음을 피상적으로 보기 때문에 나올 수 있는 말이다.
인간이 죽음이라는 근원적 공포를 해결하는 방식은 이 거대한 공포를 자신이 다룰 수 있는 정도의 크기로 분해하는 것이다. 우리는 각자의 타고난 감각과 에너지를 통해 근본 두려움에 대한 가짜 공포를 만들어내는데, 가짜 공포도 죽음의 공포처럼 똑같이 작용한다. 정말 죽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래서 우리는 만들어진 거짓 공포를 해결하느라 분주해지는 것이다.
공포 뒤에는 언제나 욕망이 있다. 두려움과 욕망, 공포와 쾌락은 동전의 앞뒷면처럼 한 덩어리로 되어 있다. 자신을 정밀하게 관찰한다면, 모든 욕망의 뒤에는 두려움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성공의 욕망 뒤에는 자신이 무가치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다.
욕망은 우리의 삶의 태도와 행동을 구체적으로 결정한다. 이러한 가짜 해결책이 고착된 것이 성격 유형이다.
성격은 공포에 기반하여, 에너지의 자연스러운 흐름을 포기한 대가이다. 그래서 어떤 심리학자는 '성격은 일종의 정신병'이라고 말한다.
영화의 첫 장면은 어린 아들의 관을 붙잡고 우는 아버지를 보여준다. 아들의 비석에는 '1890~1897년'이라고 새겨져 있다. 19세기 말의 어느 마을에서 고작 일곱 살의 나이에 죽었다.
깊은 숲에 둘러싸여 있는 이 작은 마을은 평범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겉으로 보기에는 지극히 평화로운 공동체이다.
영화의 중반부를 지나면 마을의 숨겨진 진실이 드러난다. 마을의 설립자들은 모두 살인, 강도 등의 비극적 사건으로 가까운 사람을 잃은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다. 이들은 인간의 사악함과 잔인함에 질린 나머지 자신들이 생각하기에 ‘순수’의 시대였던 19세기로 회귀하기로 결심한다.
이들은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포기하고, 과거의 모습을 완벽하게 구현한 폐쇄된 마을을 설립한다. 그리고 다시는 이 마을을 떠나지 않기로 맹세한다. 19세기말의 시대상을 철저하게 따른 나머지, 복장, 관습 등만 따르는 것이 아니라, 현대의 간단한 의약품만으로 치료가 되는 병도 그냥 죽게 만들어 버린다.
마을의 구성원은 마을의 비밀을 알고 있는 구세대 장로들과 마을에서 태어나 아무것도 모른 채 그 안에서만 살아가는 상황을 숙명처럼 받아들이는 신세대 그룹으로 나뉜다.
신세대의 주요 인물이 세 명 등장한다.
루셔스 헌트(와킨 피닉스)는 너무나 많은 걱정과 생각, 책임을 짊어진 심각한 젊은이다. 아이비 워커(브라이스 댈러스 하워드)는 어린 시절 병을 제때 치료하지 못해 장님이 되었으나 명랑하고 대범하다. 노아 퍼시(에이드리안 브로디)는 아이비를 짝사랑하는 지적장애인이다. 아이비는 늘 노아를 돌봐준다.
루셔스와 아이비는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고, 이들 사이를 노아가 질투하면서 조용했던 마을에 커다란 파란이 일어나게 된다.
<식스 센스>에서 콜(헤일리 조엘 오스먼트)은 말콤(브루스 윌리스)에게 말한다.
"난 죽은 사람들이 보여요(I see dead people)..."
이것은 영화 사상 가장 유명한 대사들 중 하나일 것이다.
나는 <빌리지>를 보고 나서 이렇게 말하고 싶어진다.
"나는 죽음의 부정을 본다(I see the denial of death)."
나는 희극이든 비극이든 모든 영화의 밑바탕에 흐르는 정서에는 두려움과 불안이 있다고 생각한다. 모든 인간의 근원에는 어찌할 수 없는 죽음의 두려움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 의미를 부여하는 모든 행위와 그 부산물은 모두 죽음을 부정하는 것에 기초를 둔다."
어니스트 베커,『죽음의 부정』
두려움은 자유를 기꺼이 억압하도록 허용한다. 따라서 성격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자유를 억압하는 각자의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영화 속의 마을 전체를 한 사람의 의인화라고 보면, 마을은 거대한 ‘성격의 감옥’이다. 두려움을 뿌리로 하여 지어진 집은 고통을 막아내기 위한 폐쇄적 공간이 된다. 마을 사람들은 외부 세계와의 소통을 포기하고 단절함으로써 세상의 악으로 인해 발생하는 고통은 회피할 수 있었으나, 그 대가로 또 다른 고통과 문제점들에 직면하게 된다.
두려움과 자유는 동전의 앞뒷면처럼 붙어 있다.
그러나 우리는 한 번에 동전의 앞면만 보거나 뒷면만 볼 수 있을 뿐, 동시에 앞뒤면을 다 볼 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두려움을 볼 때는 자유를 보지 못하며, 자유를 볼 때는 그 뒤에 있는 두려움을 보지 못한다.
하지만 동전을 앞면만 보고 선택하더라도 뒷면이 자동적으로 따라오게 된다.
위치 에너지가 높아지면 불안정해지는 물리 원칙처럼, 우리가 삶을 살아갈 때 자유가 높아지면 그것과 같은 레벨로 두려움도 상승한다. 그러나 낮은 두려움에서 안전하게 살면 동시에 낮은 자유를 누릴 뿐이다.
자유란 '내가 원하는 대로 삶을 사는 것'과 동시에 '삶의 모든 결과에 책임을 지는 것'을 포함한다. 즉, 행복과 고통을 모두 동등하게 누리는 것이다. 극심한 트라우마를 겪은 마을의 설립자들은 고통에 대한 두려움이 모든 것을 압도하여, 고통을 겪지 않을 수만 있다면 기꺼이 자유도 포기할 수 있었다.
장로들은 적어도 그들 자신은 그 결과를 감수하며 스스로 자유를 포기하였지만, 그들의 아이들에게는 선택 없는 삶이 주어진다. 아이들은 행복을 누릴 자유도, 고통을 감내할 자유도 박탈된 채 ‘부자연스러움이 가득한 평화’ 속에 놓인다.
불에 덴 사람이 불만 보면 놀라듯, 트라우마를 겪은 뇌는 조그만 자극에도 활성화되기 쉽다. 특정한 고통에 대한 트라우마는 그 고통과 관련된 모든 상황을 회피하게 한다. 이는 역설적으로 계속 그 기억을 마음속에 떠오르게 해서 현재화시킨다. 그것은 마음속에 점차 큰 공간을 차지하게 되며, 자연스러운 에너지의 흐름은 점차 부자연스럽게 흘러가기 시작한다.
시간이 지나면서 회피하고 싶었던 두려움은 오히려 삶을 유지하는 원동력이 된다. 이제는 이 동력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 갖가지 비효율과 무익한 노력이 수반되며, 필연적으로 믿음의 시나리오가 필요하게 된다. 부자유한 것을 유지하는 것이 바로 믿음이기 때문이다.
각 성격 유형에도 자신의 두려움에 어울리는 서로 다른 믿음의 시나리오가 쓰이게 되며, 그 결과 성격 유형별로 각자의 또 다른 고통과 부작용이 발생하게 된다.
믿음의 시나리오에 갖가지 전설과 금기와 의식과 비밀이 늘 포함되어 있다. 영화 속 마을에도 여러 가지 믿음의 시나리오가 구비되어 있다.
마을 바깥을 둘러싼 커다란 숲은 ‘금기의 숲(forbidden woods)’으로 명명되며, 숲에는 해리포터의 볼드모트처럼 ‘입에 올려선 안될 그들(those we don't speak of)’이 살고 있다. 마을과 숲 간에는 서로 침범 불가 협정이 맺어져 있어서, 침범하면 안 되는 '그들의 숲'과 '우리의 마을'로 구분된다. 마을 둘레에는 경계가 세워지고, 숲의 존재들을 달래기 위해 희생 제물을 바치는 의례를 행한다. 자연히 사람들은 섣불리 마을의 경계 밖으로 나갈 생각을 하지 못하게 된다.
주기적으로 일어나는 불길한 사건은 장로들이 교묘하게 조작해 놓은 장치들이다. 심지어 자연적으로 일어나는 사건들까지 이 믿음 체계를 더욱 확고하게 하는 증거로 사용된다. 마을에는 '숲의 괴물들'이 정기적으로 출몰하고, 마치 우리가 민방위 훈련을 하듯이 종이 울리면 사람들은 겁에 질려 방공호로 대피한다.
빨간색은 금기시되며, 노란색은 그들을 보호해 주는 색이다. 마을 사람들은 빨간색을 연상시키는 빨간 꽃이나 산딸기를 보아도 불길한 징조를 느끼며 두려움에 떤다. 마을의 경계 울타리는 노란색을 칠하고, 보초를 설 때는 노란색 망토를 입는다.
어린아이들은 초등학교에서부터 이 날조된 믿음 체계를 배운다. 어린 시절부터 배운 믿음 체계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기 시작하면, 평생 여기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된다. 한 번 믿음이 형성되면 눈앞에 사실이 펼쳐져 있어도 믿음을 바꿀 수 없다. 마을 사람들은 강도의 차이는 있으나 모두 이런 '인지 왜곡'의 상태에 놓인다.
마을의 여러 가지 부자연스러운 장치들은 폐쇄적 종교 집단이나 독재 사회의 각종 도그마와 매우 유사하다. 사이비 종교와 독재도 인간의 두려움에 기초하여 쌓아 올려진 믿음 체계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믿음 체계는 비밀주의와 조작을 기반으로 한다. 무시무시한 전설, 이야기들, 천국과 지옥, 비극적 사건들, 밀실이 생겨나며, 마녀사냥, 역사책 날조, 본보기 처형 등이 이루어진다.
병든 성격이 집단화되면 하나의 종교 체계가 만들어질 수 있다. 에니어그램의 아홉 가지 유형은 그대로 아홉 가지의 종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두려움에 의한 인지 왜곡 현상’이 바로 성격의 본질이다. 우리는 각종 도그마에 세뇌되어 있지만, 모든 도그마를 떠받치는 가장 근본적인 것은 우리의 성격 구조에 내재된 도그마이다. 성격은 내가 어린 시절부터 경험적으로 쌓아온 것이기 때문에 그 어떤 도그마보다 알아차리기 쉽지 않다.
"억압의 요긴한 쓰임새는 압도적으로 기적적이고 불가해한 세계, 아름다움과 장엄함과 공포로 가득해 그것을 고스란히 인식한 동물은 마비되어 버릴 세계에서 버젓이 살아갈 수 있도록 해준다는 것이다."
어니스트 베커,『죽음의 부정』
루셔스와 아이비가 급작스럽게 결혼 발표를 하자 분노한 노아는 충동적으로 루셔스를 칼로 찔러 중상을 입힌다. 루셔스가 현대의 의약품 없이는 회복할 수 없는 상처를 입게 되었다.
장로들은 이제 결단을 내려야 한다. 그들이 입버릇처럼 말하는 것은 자신들이 본래 '순수(innocence)'를 지키려 했다는 것이다. 이들은 자신들은 상처를 한번 입었지만 다시는 같은 상처를 입지 않을 것이며, 자신의 아이들만은 순수한 상태로 살아갈 수 있게 보호하겠다고 결심했다. 이들이 말하는 순수는 ‘상처나 트라우마가 없는 깨끗한 마음(spotless mind)’인 것이다.
순수를 지키기 위해 장로들은 절대로 마을을 떠나지 않을 것, 그리고 마을의 비밀을 절대 발설하지 않을 것을 맹세한다. 그러나 이들은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자 결국 십여 년을 지켜온 맹세를 깨고, “고통도 삶의 한 부분이다(Heartache is a part of life). 상처받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감수해야 한다.”라는 것을 인정하게 된다.
'순수'를 지켜내는 장로들의 방식은 '두려움'에 뿌리를 둔 투쟁이었다. 그러나 이들의 투쟁은 사실은 회피였던 것이다. 하나의 고통을 회피하고자 하였으나, 또 다른 고통이 발생하게 되며, 결국 지키고자 한 순수도 잃고, 자기 자신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게 되었다.
장님인 아이비와 지적장애인인 노아 모두 어린 시절 약만 있었으면 치료할 수 있었던 병을 제대로 치료하지 못했음이 암시적으로 나온다. 두 사람 모두 마을의 폐쇄성의 피해자였던 것이다.
아버지로부터 진실을 듣게 된 아이비는 마을 밖으로 직접 나가서 약을 구해오겠다고 선언한다. 아이비는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이 이 일을 해야 한다면서 말한다.
"이것은 내가 짊어져야 할 짐이야(It's my burden)."
새로운 세대인 아이비가 순수를 지켜내는 방식은 '자신의 짐(my burden)'을 스스로 짊어지고 모험을 하는 것이다. 사랑의 달콤함과 사랑의 쓰라림과 고통을 모두 자신의 짐으로 감수하겠다는 선언이다. 순수에 대한 집착을 놓았을 때 비로소 순수가 완성되는 것이다.
마을이라는 성격의 감옥에 갇혀 있는 한, 두려움을 뿌리로 하여 왜곡된 욕망과 행동의 동기가 생겨나고, 그로 인해 태도와 경향성에 고착될 수밖에 없다. 마을에 계속 머무르는 것은 성격 구조에 고착되어 있는 것을 의미한다. 인지 왜곡을 수정하고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보기 위해서는 아이비처럼 마을을 나와 용감하게 숲을 건너야 한다. 아이비는 이성적으로는 진실을 다 알았지만, 그렇다고 세뇌되고 습관이 된 두려움은 그냥 없어지지 않는다. 숲을 건너가는 험난한 여정은 자기 자신을 극복하는 과정이 된다.
아홉 가지 에니어그램 유형은 세 가지 본능적 에너지에 기초한다. 머리형은 사고 중심 유형이며, 가슴형은 감정 중심 유형이고, 장형은 행동 중심 유형이다. 영화의 주요 캐릭터들을 세 가지 본능적 에너지 중심으로 살펴보자.
◎ 루셔스 헌트 : 머리형(사고 중심 유형)
루셔스는 미래에 대한 너무나 많은 생각과 걱정, 고려 때문에 늘 행동할 타이밍을 놓친다. 초반에는 큰 역할을 할 것 같이 많은 계획을 하지만, 결국 결정적인 행동은 하지 못한다.
나는 루셔스가 장로들 앞에서 발표할 때 미리 정리해서 종이에 쓴 것을 읽어 내리는 것을 보고 머리형이라고 확신했다. 말하기 전에 미리 요점 정리해 놓고 말하는 것이 머리형들의 전형적인 특징이다.
루셔스는 마을을 계속 나가려 하지만 결국 실행하지 못했고, 사랑 고백도 먼저 하지 못해서 아이비는 답답해한다.
아이비와 루셔스의 다음 대화는 두 사람의 유형을 잘 보여준다.
아이비 : "넌 왜 속마음을 솔직히 못 털어놔?(Why can you not say what is in your head?)"
루셔스 : "넌 왜 속마음을 다 드러내는 거야?(Why can you not stop saying what is in yours?)"
◎ 아이비 워커 : 가슴형(감정 중심 유형)
아이비는 따뜻한 가슴을 가지고 있으며, 주변 사람들을 잘 돌본다. 아이비가 장님으로 설정된 것은 의미심장하다. 눈은 가장 지성적인 감각 기관이며 지혜를 상징하지만, 인지 왜곡의 원천이 되는 기관이기도 하다.
아이비는 물리적인 눈이 아닌, 마음의 눈을 통해서 감각 너머의 진실을 볼 수 있다. 그녀는 사람들의 오라를 보며, 마음 상태를 아는 재능을 가지고 있다.
"나는 세상을 볼 수 있어. 단지 네가 보는 것과 다른 것을 볼 뿐이야.(I see the world. Just not as you see it.)"
시각이 사고 중심형이 주로 쓰는 감각이라면, 촉각이나 미각은 감정 중심형이 주로 쓰는 감각이다.
◎ 노아 퍼시 : 장형(본능 중심 유형)
지적장애인인 노아를 통제할 수 있었던 유일한 사람은 아이비였으며, 노아는 아이비와 특별한 연결을 느끼고 있었다.
노아는 아이비와 자신만의 특별한 영역이 루셔스에 의해 침해당했다고 느껴졌을 때, 바로 공격성을 드러낸다. 노아는 행동이 앞서는 사람이다. 본능적인 눈치도 빠르고, 기회가 찾아오면 바로 행동한다. 자신의 영역에 대한 방어는 장형의 특징이다.
많은 청년들 중 지적 장애를 가진 노아 퍼시만이 마을의 진실을 감지하고 있었다. 노아는 사람들이 거짓 소동으로 두려워할 때 재밌어 죽겠다는 듯이 웃고 손뼉 친다. 마을의 믿음 체계를 받아들일 지적 능력이 없기 때문에, 오히려 진실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것이다.
노아는 세뇌되지 않은 순수함을 지닌 동시에 질투, 폭력, 욕구가 가득한 원초적 본능 또한 지니고 있다. 해맑은 어린이이면서 동시에 사악한 아이인 양면성을 보여준다. 그는 칼을 준비해서 가져가서 루셔스를 칼로 찌른 후, 확인하듯이 두 번 세 번 더 찌른다. 마치 사악한 아이가 잔인하게 동물을 죽이듯이.
“‘선’은 새로운 가능성과 선택을 향한 열림이요 불안을 직면하는 능력이며, 닫힌 것은 개인을 새로운 것과 더 넓은 인식과 경험으로부터 돌아서게 하는 '악'이다. 닫힘은 드러냄을 차단하고 개인과 그의 세계 내 상황 사이에 장막을 친다.(키에르케고르)”
어니스트 베커,『죽음의 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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