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그을린 사랑 | 올드보이와 피에타 사이의 그리스 비극

[때로는 진실이 폭력이 된다. 어디까지 진실을 드러낼 것인가?]

by 아닛짜

'진실'의 힘은 크다. 거짓은 진실을 이길 수 없다.

그러나 진실을 파헤치는 것, 더 나아가 그 진실이 아무리 참혹하더라도 낱낱이 드러내는 것은 늘 옳은 일일까?


드니 빌뇌브 감독의 <그을린 사랑(Incendies)>(2010년)은 '진실을 어디까지 드러낼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영화이다.

<그을린 사랑>에는 전쟁의 비극과 종교적 명분에 기댄 무의미한 증오의 사슬이 진실과 함께 뒤엉켜 있다.


나는 거시적인 배경은 잠시 놔두고, 세 아이의 엄마가 겪은 심리적 파탄 과정을 미시적으로 따라가 보려고 한다. 왜냐하면 영화를 본 후 뭔가 해소되지 않은 답답함을 느끼며 한동안 고민에 빠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쌍둥이 남매는 어떡하지?'


이 의문이 실마리가 되어 <그을린 사랑>의 리뷰를 쓰게 되었다.

(* 리뷰를 위해서 결정적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영화를 먼저 보시기를 권장합니다.)



목차는 다음과 같다.

1. 진실은 무엇인가?
2. 화염에 휩싸인 그을린 모정
2-1> 세 통의 편지
2-2> 그을린 모정
3. 진실과 폭력이 결합하는 과정
3-1> 오이디푸스와 이오카스테
3-2> 사랑과 공포라는 두 개의 머리를 가진 뱀




1. 진실은 무엇인가?


'진실이 중요하다'라고 말하기 전에 우리가 '진실, 진실'이라고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을 정리하는 것이 먼저다.


내 삶을 이끄는 두 축인 요가와 불교 철학을 빌어 '진실'을 규명해 보고자 한다.


요가와 불교를 포함한 모든 수행 체계는 계율을 기반으로 성립된다. 수행의 목적은 마음의 변혁이므로, 먼저 마음을 깨끗하게 하는 계율이 본격적 수행의 조건이 된다.


마치 천을 잘 염색하기 위해서 깨끗하고 하얀 천을 준비해야 하는 것과 같다. 계율은 단지 도덕적 의미만 가지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정화하는 역할을 한다.


요가의 열 가지 계율 중 두 번째인 '사띠야(satya)'는 '진실, 정직, 불망어(不妄語)'를 의미한다. 이것은 불교의 오계 중에 하나이기도 하다.


요가의 소의 경전인 <요가 수뜨라(Yoga Sutra)>에서는 사띠야를 확립했을 때의 결과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진실을 세운 사람에게는 그의 모든 행위와 결과가 그 자신에게 종속된다."

<요가 수뜨라> 2-36


<요가 수뜨라> 2장 36절은 진실을 확립한 사람이 말하는 대로 행위가 이루어지고 그 행위에 따른 결과가 돌아온다는 뜻이다. 즉, 그가 말하는 내용이 그대로 실현된다.


사띠야가 확립된 수행자의 마음은 거울처럼 깨끗하여,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과 일어날 모든 일이 마치 거울에 비치듯이 그의 마음에 그대로 반영된다. 미래의 일은 인과율에 따라 과거와 현재의 행위를 기반으로 일어나게 되므로, 앞으로 일어날 일도 그에게는 선명하게 보인다.


결국, 그가 말하는 바에 따른 행위와 결과가 그에게 의지하므로, 진실은 큰 힘을 갖게 된다. 이 구절은 소망이 성취되는 원리이기도 하다.


그러나 욕망과 두려움, 어리석음에 사로잡힌 마음은 먼지가 두껍게 쌓인 거울과 같아서 아무것도 반영할 수 없다. 그의 말은 행위나 결과를 가져올 수 없는 가벼운 솜털과 같은 것에 불과하다.


우리의 소망은 대체로 욕심에 기반한 것이며 진실과는 관련 없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의 소망과 행위(業)의 결과는 서로 독립되어 있다.


단지 거짓말하지 않는 것은 좁은 의미의 사띠야일 뿐이다. 마음의 의도가 먼저 있고, 그에 따라 나오는 것이 말이다. 넓은 의미의 사띠야는 맑고 깨끗한 마음이 전제되었을 때 확립되는 것이다.


탐진치로 오염된 마음으로는 '거짓말하지 않기'는 노력하면 가능하겠지만, 진실을 확립할 수 있는 능력은 얻을 수 없다.




나는 유아 세례를 받았다. 지금은 발길을 끊었지만 어린 시절부터 성당에 다녔다. 기독교 교리에서 내가 이해하지 못했던 것은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죄인이라는 원죄의 교리였다. 예전에 가톨릭에서 한창 '내 탓이오' 캠페인을 하며 스티커를 붙이고 다녔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지금은 '원죄'라고 하는 개념을 내 나름대로 이해하게 되었다.


예컨대 내가 먹는 음식이 나에게 도달하기까지의 과정을 내 눈으로 직접 본다면 나는 죄의식을 느낄 것이다. 공장식 축산업, 동물 학대, 환경오염, 전쟁, 폭력, 차별 등은 나와 상관없는 것이 아니다. 나는 그 결과를 향유하고 있다. 한순간도 평화롭지 않았던 인류 역사의 한 일족이라는 것이 바로 원죄라고 생각한다.


내가 태어나서 시간과 공간을 차지하고, 육체와 정신을 유지하기 위한 모든 것들은 민폐로 이루어진다. 다른 동식물들을 짓밟고 죽이지 않으면 내가 온전히 살아갈 수 없다. 우리가 모든 진실을 낱낱이 안다면 한순간도 죄책감을 느끼지 않을 방도가 없다.


태어난 것 자체가 폭력인 존재가 진실이라는 계율을 확립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폭력은 마음의 대표적인 오염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요가의 첫 번째 계율은 비폭력을 뜻하는 '아힘사(ahimsa)'이며, 두 번째 계율이 진실을 뜻하는 '사띠야'이다. 아힘사가 토대가 되어야 사띠야도 가능하다.


아힘사가 없는 사띠야는 진실이란 이름으로 또 다른 폭력을 정당화하는 것이며, 인간이 자주 빠지는 함정이다. 우리는 진실함과 솔직함을 오해하는 경우가 많다.


많은 진실 남용의 폐해는 대부분 사띠야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다. 자신의 감정에 솔직하겠다는 이유로 상대방에게 상처 주는 말을 하는 사람들은 사띠야를 실천하는 것인가?


이들은 자신의 감정을 무기로 상대방에게 일종의 폭력을 행하는 것이므로, 요가의 제1 계율인 아힘사를 위반한 것일 뿐 사띠야와 관련이 없다.


아힘사는 '폭력적이지 않은 것' 뿐만 아니라, '어떠한 해로운 의도도 없는 것'이다. '생각 없이 말하는 것'을 솔직한 것이라고 여기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감정이란 특정한 견해에 의해 비롯된 것이며, 일순간의 파도나 바람과 같은 현상이다. 감정이 지나갈 때까지 잠시 침묵하면 될 일이다.


사띠야는 모든 사실에 대해 말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우리는 어떤 사건에 대해 진실을 알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므로 대체로 침묵하는 것이 진실에 가까워지는 길이다. (*물론, 사회적 정의를 실현해야 하는 경우에도 침묵해야 한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사띠야는 꼭 필요한 말을 꼭 필요한 때에 친절하게 하는 능력이다.


잔느는 어머니의 수감 생활을 15년간 감시했던 관리인을 찾아내어 당시의 진실을 캐묻는다. 관리인은 잔느에게 말한다.


"꼭 그 진실을 알아야만 하겠소? 때로는 모르는 게 더 나은 진실도 있는 법이오."



# '아힘사'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다음 리뷰를 참조하세요.




2. 화염에 휩싸인 그을린 모정


2-1> 세 통의 편지


<그을린 사랑>은 중동계 캐나다인 나왈 마르완의 죽음으로 시작된다. 유언 공증인은 쌍둥이 남매 잔느와 시몽에게 어머니의 충격적인 유언과 편지를 전한다.


어머니의 유언을 듣고 쌍둥이 남매는 놀라고 황당하여 서로를 쳐다볼 뿐이다. 유언은 자식으로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정도의 고인을 모독하는 장례를 요구하는 것이다.

잔느와 시몽은 어머니의 유언을 읽고 멘붕에 빠진다.


"시체를 관에 넣지 말고 세상을 등질 수 있도록 나체로 엎어놓아라. 할 일을 하고 나면 제대로 기도문과 묘비를 써서 장례를 치러라."


살아있을 때도 나왈은 자식들에게 그렇게 살가운 엄마는 아닌 듯했다. 쌍둥이는 엄마를 잘 이해하지 못했고 다소 원망도 있었던 것 같다. 특히 시몽은 강한 반발심을 가지고 유언을 거부한다. 잔느는 이때 시몽의 말을 들었어야 했다!


남매에게 각각 할 일이 주어진다. 딸에게는 죽은 줄로만 알았던 아버지를 찾아서 편지 한 통을 전하라고 하고, 아들에게는 있는지조차 몰랐던 형을 찾아서 또 한 통의 편지를 전하라는 것이었다. 그 일을 완수하면 쌍둥이에게 전하는 엄마의 편지를 뜯어볼 수 있는 자격이 생긴다.


남매는 이제 선택의 여지없이 아버지와 형을 찾아 나설 수밖에 없다. 이 여정에서 엄마의 충격적인 과거가 드러난다.



2-2> 그을린 모정


<그을린 사랑>의 원제인 'Incendies'는 프랑스어로 '화염, 넓게 퍼진 붉은 광채, 큰 불, 전란'을 의미한다.


'화염'이 한 인간을 삼켜버린 분노, 복수, 애증 그 자체의 생명력을 시각화하였다면, '그을린 사랑'은 그 화염에 휩싸인 사람에 초점을 둔다. 두 제목 모두 좋다.


드니 빌뇌브 감독은 이 영화로 '캐나다의 박찬욱'이라는 명성을 얻었다고 한다. 15년간의 감금, 근친의 비극 등은 <올드보이>가 떠오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자식을 다치게 할 수 있는 진실이 드러났을 때, <올드보이>의 오대수의 선택과 <그을린 사랑>의 나왈의 선택은 사뭇 다르다.


오대수는 진실이 드러났을 때 딸이 알지 못하게 하려고 자해를 서슴지 않는다. 나왈은 오히려 자식들에게 충격적인 방식으로 진실을 알린다. 동양적 정서로는 오대수의 방식이 좀 더 이해가 가능하다.


나왈은 자식들에게 편지로 "함께 있는 것만큼 아름다운 것은 없단다."라고 하며 사랑과 용서를 말한다. 과연 자식들이 서로 만나서 함께 하면 모든 것이 눈 녹듯이 사라질 수 있는 것인가? 이미 깨진 접시 조각들을 한데 모아놓고, 같이 있으니 아름답다고 말하는 것처럼 부질없다.


나는 문득 김기덕 감독의 <피에타>가 떠올랐다. 2012년에 피에타를 보고 며칠간 후폭풍을 겪으며 괴로웠던 기억이 난다.


<피에타>의 악당은 피도 눈물도 없이 채무자의 돈을 받아내는 강도(이정진)라는 남자다. 그에게 접근한 미선(조민수)은 자기 아들을 잃은 복수를 하기 위한 목적이 있었다. 미선이 사용한 방법은 모성애를 이용한 것이었고, 매우 성공적이었다. 강도는 완전히 파괴되었다.


나는 많은 리뷰에서 나왈의 행동을 '어머니의 위대한 사랑, 용서, 용기' 등으로 말하는 것을 읽고 좀 괴리감을 느꼈다.


나는 나왈에게서 미선의 그림자를 슬쩍 본 것 같다. 그리고 사랑으로 포장되기에는 조금 더 복잡한 '화염에 휩싸인 그을린 모정'을 느꼈다.




3. 진실과 폭력이 결합하는 과정


3-1> 오이디푸스와 이오카스테


영화의 첫 장면은 어린 시절 니하드의 강렬한 눈빛과 라디오 헤드의 강렬한 음악으로 시작한다. 드니 빌뇌브는 첫 시작부터 관객들에게 이제부터 강렬한 주의 집중을 할 수밖에 없음을 선언한다.

니하드-첫장면.jpg 니하드는 기독교 민병대에 끌려가 십자군 전사로 키워진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강렬함이 다 빠져나간 니하드가 나왈의 무덤 앞에 서 있는 것으로 끝난다.


(*이제 가장 강력한 스포이다.)




니하드는 나왈의 잃어버린 첫째 아들이자 쌍둥이의 아버지이다. 쌍둥이가 찾아야 하는 아버지와 형은 동일 인물이었던 것이다. '1(아버지) + 1(형) = 2'가 아니라 '1 + 1 = 1'이었다.


영화의 가장 큰 외피는 그리스 비극의 주인공 오이디푸스 신화를 차용한 니하드의 이야기다. 그 프레임 안에서 오이디푸스의 엄마이자 아내인 이오카스테를 차용한 나왈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첫 장면과 마지막 장면의 사이에는 나왈의 이야기로 채워져 있다. 관객이 따라가는 이야기는 나왈의 죽음으로 시작되어, 나왈의 과거가 밝혀지고, 다시 현재로 돌아와 나왈의 죽음으로 마무리된다.


영화는 1970년대의 레바논 내전을 배경으로 한다. 당시 레바논은 기독교도와 이슬람교도가 섞여 불안정하고 혼란스러운 상태였다. 기독교인인 나왈은 기독교인 집성촌 같은 마을에 살았으나, 이슬람 난민인 와합과 사랑에 빠져 임신까지 한다. 격분한 나왈의 오빠들은 나왈의 아마도 첫사랑인 와합을 그녀의 눈앞에서 사살한다.


나왈은 사람들의 질시 속에서 아들 니하드를 낳았으나, 바로 고아원으로 보낼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간신히 고아원을 찾았을 때는 이미 공격을 받아 폐허가 되어 있었다.


아들이 죽었다고 생각했을 때 나왈은 분노의 화염에 휩싸일 수밖에 없었다. 이 분노가 '복수의 화염'으로 옮겨 붙은 결정적 사건은 버스 테러 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1975년에 실제 일어난 일을 배경으로 한다. 기독교 민병대가 무슬림이 타고 있던 버스를 공격한 사건이 도화선이 되어 레바논 내전이 발발하게 된다.

화염에 휩싸인 버스.jpg 무슬림이라는 이유만으로 불태워진 버스 앞에서 나왈의 심장에도 화염이 치솟는다.


우연히 그 버스에 탔던 나왈은 자신이 기독교인임을 증명하고 간신히 목숨을 구한다. 그녀는 버스에 같이 타고 있던 한 무슬림 여인의 딸을 구하고자 했으나, 기독교인들은 소녀를 무참히 총살한다.


나왈은 남편을 기독교인인 오빠들에게 잃고, 아들도 기독교 민병대에게 무참히 죽었다고 믿는다. 나왈은 소녀가 쓰러지는 모습을 보며 자신의 죽은 아들과 동일시했을 것이다.


남편 와합, 아들 니하드, 무슬림 소녀의 죽음은 나왈의 분노를 점층적으로 타오르게 하는 도화선이 된다. 이때 나왈은 기독교인들에게 복수를 하겠다고 다짐한다. 눈에는 눈, 총에는 총이다.

총이 겨눠진 나왈.jpg
총을 겨눈 나왈.jpg
기독교인에 의해 총구가 겨누어진 나왈은 똑같이 기독교인에게 총구를 겨눈다.


나왈은 기독교 민병대의 지도자를 죽이고 15년간 처참한 감옥 생활을 한다. 감옥에서 온갖 고문을 당해도 나왈은 굴복하지 않고 견뎌낸다. 핍박이 강하면 강할수록 분노와 증오의 힘은 더 커진다.


미국 흑인 노예들이 고통 속에서 부른 노래가 소울 음악이 되었듯이, 나왈도 노래를 불렀다. 나왈은 '노래하는 여인'으로 불렸다.

감옥.jpg 나왈은 한 평도 안 되는 감옥에서 노래를 하며 15년을 버틴다.


3-2> 사랑과 공포라는 두 개의 머리를 가진 뱀


나왈은 아부 타렉이라는 악랄한 고문 기술자에게 강간당하여 쌍둥이를 낳고, 감옥에서 풀려나 쌍둥이를 데리고 캐나다로 이주한다.


나왈은 아부 타렉이 자신이 그토록 그리워하던 아들이라는 진실이 밝혀졌을 때가 감옥에 갇혀서 온갖 고통을 당했을 때보다 더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감옥에서는 분노와 증오의 대상이 확실했지만, 이제는 자신의 분노를 어디에 돌려야 할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나왈은 세상과 연결된 문을 닫고 생을 마감하기로 한다.


나왈에게 아부 타렉이 아닌 아들로서의 니하드는 어떤 존재일까?


나왈은 말한다. 니하드는 와합과의 사랑으로 탄생했고, 쌍둥이는 공포 속에서 탄생했다고. 그 공포의 원인은 사랑의 결실인 니하드이다.

마치 자신의 꼬리를 물고 있는 뱀, 우로보로스처럼 나왈에게 사랑과 공포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


끔찍한 감옥 생활과 그 공포와 증오의 후유증을 견디도록 나왈을 지탱해 준 것은 와합과의 사랑과 그 증거였던 아들에 대한 짧은 기억일 것이다.


나왈은 감옥에서 임신했음을 알자 절망하여 자신의 부푼 배를 미친 듯이 두들겨 팼다. 그 증오는 모성 속에 잠입해 들어간다. 나왈은 쌍둥이를 사랑하지만, 동시에 쌍둥이는 공포와 증오를 상기시키는 존재이다.


나왈은 사랑과 공포의 위태로운 균형을 유지한다. 그러나 자신이 견뎌낸 공포의 기억과 유일한 사랑의 기억이 서로 부딪혀 처참하게 깨졌을 때, 그녀가 택한 것은 자신의 유일한 아들을 감싸 안고 자폭하는 것이다.


나왈은 이오카스테가 자살한 것처럼 죽음을 맞이했고, 니하드는 오이디푸스처럼 눈을 찌르고 절망해서 죽게 될 것이다. 여기서 쌍둥이는 니하드에게 죽음의 불꽃을 붙여주는 역할이다.


쌍둥이는 정상적 삶을 살게 될까? 나는 쌍둥이가 나왈과 니하드 사이를 오가는 비극적 매개체일 뿐이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나왈은 정신적 붕괴가 너무 커서 쌍둥이까지 배려하지 못한 것이 아닐까.


엄마가 모든 자식을 동등하게 사랑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없다'라는 말은 대체로 허구이다.

신화적으로 부풀려진 모성의 왕관을 감당하기에는 인간의 한계가 너무 뚜렷하다.

애정의 총량은 한계가 있어서, 한곳에 집중되면 다른 곳에 갈 여력이 남지 않는다.


보통 첫째 아이, 특히 첫째 아들에 대한 엄마의 집착은 매우 크다. 간혹 첫째가 아니더라도 엄마의 애착 자식이 늘 있기 마련이다.


아들러의 자식 서열에 따른 심리학은 매우 현실적이어서 프로이트의 형이상학적 이론보다 많은 사람이 공감한다. 자식들이 엄마의 사랑을 두고 벌어지는 경쟁은 실로 치열하다.


나왈에게 진정한 자식은 첫째 아들 니하드뿐이다. 첫 번째 남편이자 아마도 첫사랑인 와합의 비극적 죽음으로 인해 나왈은 그와 연결되는 유일한 혈육인 니하드에게 더 집착했을 것이다.


<그을린 사랑>은 <올드보이>와 <피에타> 사이의 어딘가 놓여 있는 그리스 비극과 같은 이야기이다.


드니 빌뇌브 감독은 선악을 말하지 않는다. 이야기가 끝나고 나면 선악은 모호해지고, 결론적으로 누구를 비난해야 할지 알 수 없다. 다만 혼란과 혼돈 속에서 사투를 벌이는 인간들이 존재할 뿐이다.


모든 일의 기원을 찾는 것도 불가능하다. 우로보로스의 뱀처럼 서로 꼬리를 물고 영원히 반복될 뿐이다.


나왈은 이 비극의 기원을 찾는 것이 가능하다고 믿고, 시작을 알면 모든 것이 마법처럼 행복해지리라고 믿었는지도 모르겠다.






동양과 서양의 진실을 대하는 자세는 미묘하게 다르다.

서양은 진실을 발견했을 때 회피하는 것을 죄악시한다. '회피'라는 말부터 부정적 의미를 강조한다.


나왈은 복수를 다짐하고 학교 신문사에서 일하며 진실을 알리는 투쟁을 했다. 캐나다에 이주해서는 공증인 장 르벨의 비서로 일했다. 나왈의 유언 집행자이기도 한 장 르벨은 "공증은 신성한 일이다."라고 여러 번 말한다.


나왈의 세계관에서는 진실을 만천하에 드러내는 것이 옳은 일이다. 문제는 진실이 수학처럼 '1+1=2'와 같이 논리적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다는 것이다.


나왈과 니하드는 기독교 집단과 이슬람 집단을 교차하여 왔다 갔다 한다. 기독교인인 나왈은 이슬람 투사가 되고, 이슬람 고아원에 있던 니하드는 기독교 살인병기가 된다.


기독교인 나왈은 십자가 목걸이를 빼고 머리에 스카프를 두르는 것만으로 간단히 이슬람인이 되어 이슬람 버스에 쉽게 탄다.

그리고 다시 스카프를 벗고 기독교 민병대에게 십자가 목걸이를 보여주어서 학살을 면한다.

기독교니 무슬림이니 하는 것을 대단한 진실처럼 여기지만, 여기에 무슨 논리와 실체가 있는가?


전쟁과 같이 논리가 통하지 않는 세계일수록 정의와 명분을 앞세운다. 공증받은 편지 몇 통으로 회복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을까?

편지 두통은 모두 한 사람에게 간다.jpg 나왈이 니하드에게 남긴 두 통의 편지


동양에서 진실을 대하는 자세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말은 공자가 말한 '부자상은(父子相隱)'이다.


아버지와 아들은 지극한 정이 있어서 서로의 잘못을 덮어주고 감싸주어야 한다는 말이다.

공자는 양을 훔친 아버지의 잘못을 고발한 자식이 '곧은 사람'이 아니라고 평가한다.

현대적 관점에서 보면 이 말은 공사 구분을 못 하고 '정(情)'에 치우친 미개한 논리로 치부되기 쉽다.


인간의 타고난 본성이 바로 '인()'이며, 인은 인간으로서 차마 하지 못할 일들의 경계를 설정한다.

그 경계의 속을 채우는 것이 '정(情)'이라는 에너지이다. 이것이 국가의 원리가 되는 것이 공자가 주장한 덕치주의(德治主義)이다.


현대 국가에는 덕치주의는 실종되고 법치주의만 남았다.

법치주의(治法主義)의 심각한 폐해는 현대 사회에서 속속 드러나고 있다.

분명 법대로 했는데 왜 일반인들의 상식에 어긋나는 괴상한 결과가 나오는가?

왜 인간으로서 차마 못할 짓들이 벌어지는가?


'법치'와 '덕치'의 화합, 서양과 동양의 만남이 이루어질 때 '비폭력'과 '진실'의 계율은 완성될 것이다.




#그을린사랑 #Incendies #레바논내전 #올드보이 #피에타 #오이디푸스콤플렉스 #이오카스테 #그리스비극 #satya #진실 #아들러 #부자상은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스틸 라이프 | '기인'들을 위한 진혼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