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의 빛. 그늘에 선 영혼
* 금산의 어느 겨울
1948년 매서운 바닷바람이 불어오는 겨울,
전라도 고흥 금산. 처가의 허름한 초가집에 숨어 지내던 강두석은 창문 틈으로 스며드는 새벽빛에 눈을 뜬다. 손등의 굳은살 사이로 번진 잉크 자국 그는 러시아 시인 알렉산드르 블로크 시집을 꺼내 들었다. "폭풍우 같은 시대, 시는 총알보다 강하다"는 구절 아래 붉은 밑줄이 흔들린다. 문짝이 들썩이는 소리. 포승줄이 차가운 손목을 감싼다.
"두석 씨, 해방 됐다며?
그런데 어째서 아직도 반딧불이처럼 숨어 다니나?"
경찰의 비웃음이 방 안을 메운다. 그의 등에 닿은 총구는 해방 후에도 변하지 않은 권력의 냉기를 전한다.
* 지하 감방의 기록
1941년, 광주 형무소.
철창 너머로 들려오는 고문 소리. 두석은 피투성이 손가락으로 벽에 글자를 새긴다. "독립". 일본으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하다 체포되었다.
간수의 채찍이 등을 때릴 때마다, 그는 농촌 야학에서 가르치던 아이들의 웃음소리를 떠올렸다.
"우리도 글을 알면 나라를 지킬 수 있겠죠?"
그는 아이들이 지어준 노래를 속으로 불렀다.
“말라버린 논밭에 단비 내리니, 뿌리 깊은 나무 흔들리지 않는다…”
옥중에서도 그는 바늘로 찢은 이불걸레에 한시를 적어 전했다.
‘겨울 강물이 언다 한들, 해는 동쪽에서 오리라.’
농어촌 경제 건설? 문맹 퇴치? 부국강병? 허황된 꿈이지!"
친일 경찰의 신음 같은 웃음. 두석은 입가에 피를 흘리며 중얼거린다.
"마른 나뭇가지에도 봄은 온다…"
<추억: 1937년, 전남 완도 마을 야학>
종이 대신 모래판에 글자를 쓰던 아이들이 두석을 둘러쌌다.
“선생님, 일본말 대신 한글을 가르치면 안 된다며요?”
두석은 허리춤에서 감춰둔 낡은 『맹자』를 꺼내 들었다. 표지는 뜯겨 나갔지만, 속엔 한글로 번역된 독립 선언문이 꼭꼭 접혀 들어 있었다.
“이건 비밀인데… 글자를 알면 세상을 읽고, 세상을 바꿀 수 있단다. 이 나뭇잎 보이지? 뿌리가 튼튼해야 잎이 푸르르다.”
아이들이 모래판에 ‘자유’를 써 내려갈 때, 마을 입구에서 친일파 순사의 그림자가 스쳤다. 두석은 재빨리 모래를 흩뿌렸다.
벽에는 꽃밭이 펼쳐져 있었다. 겨우내 피워낸 백장미, 진달래, 개나리… 그 아래 한 구절이 새겨져 있었다.
“뿌리가 있는 한 봄은 온다.”
*수리넘으로 가는 길
울포 부두. 군중의 물결이 두석을 에워싼다. 푸른 저고리에 흙이 묻은 그의 어깨 위로, 바다 내음이 스민다. 한 노인이 주먹을 쥐어 올리며 외친다. "선생님을 죽여서는 안 됩니다!" 두석의 눈가에 주름이 깊어진다. 그는 고개를 들어 저 멀리 수리넘 산등성이를 바라보았다. 어린 시절, 아버지와 함께 소나무 아래서 독립의 꿈을 이야기하던 그 산이다.
경찰의 총부리가 흔들린다. 두석은 천천히 입을 연다.
"세상이 혼란해도, 양심의 등불은 꺼지지 않소. 일본 놈 앞잡이들이 이 땅의 정의를 훔쳐갔지만… 내 영혼만은 팔지 않았소."
군중 속에서 한 여인이 훌쩍인다. 그녀는 두석의 아내 밤례. 해방 후에도 남편의 그림자를 쫓는 삶을 살아온 이다. 두석의 시선이 그녀에게 머물렀다가, 다시 수평선 너머로 흩어진다.
해방, 그리고 배신
1945년 8월 15일. 두석은 창문으로 쏟아지는 햇빛에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조선이 해방됐다!" 민족의 함성이 천지를 흔든다. 그러나 그 기쁨은 짧았다. 친일 경찰들은 새로운 이름으로 권력을 휘둘렀다.
"빨갱이"
러시아 시집 한 권이 그에게 던져진 누명이었다.
"해방이 뭔가? 너희 같은 좌우 갈등의 희생양만 늘어날 뿐이지!"
친일파 경찰의 얼굴에 광기가 떠돈다. 두석은 손에 든 시집을 움켜쥔다. "이 시가 총알보다 강한 날이 올 거요…"
최후의 연설
수리넘 산자락. 소나무 가지에 매달린 두건이 바람에 휘날린다. 두석은 군중을 향해 마지막으로 외친다. 금산 처가에서 잡힌 지 사흘이 지나자 경찰들이 포승줄을 가지고 들어왔다
두석의 손과 어깨를 포승줄로 감았고 금당지서 유치장에서 끌려 나왔다
울포 부둣가에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조용히 경찰들에게 말했다
'가족들과 주민들에게 마지막 인사할 시간을 주시오"
그럴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던 경찰이지만
가만히 두석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두석의 마지막 요청을 거부할 수 없는 알 수 없는 힘이 느껴졌다
'고맙소" 두석은 조용히 중얼거리듯 말했다
밖으로 나온 두석은 모인 군중들을 향해 입술을 열었다.
"세상이 혼란하고 아직 나라가 바로 서지 못해 법과 원칙이 통하지 않는 작금의 상황에 참담하고 비통합니다.
그러나 나는 지금까지 실낱같은 희망을 붙들고 우리의 가족과 우리의 형제와 이 나라의 독립과 번영을 위해 지금까지 달려왔고 내 마음에 양심의 거리낌 없이 살아온 사람이요
내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신념과 정의를 부정하고 비겁한 행동을 할 수 없었소
나는 우리 모두가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꿈꾸고 우리의 민족이 잘살고 번영하는 것이 내 소명이었는데 그것이 무슨 죄가 되겠소
나는 부끄러운 생명을 취하느니 차라리 죽음을 선택하겠소"
두석의 연설이 시작되자 울포 선창가 울음소리가 하늘을 찔렀다
"선생님 선생님"
군중들이 소리 질렀다
"이것들 보시오"
저 사람을 죽여서는 안 됩니다 "
"죽일 사람이 따로 있지 강두석 선생님을 죽여서는 안 됩니다"
두석이 다시 입을 열었다
"여러분
하늘이 정한 제 명이 여기 까지라면 겸허히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러나 분하고 원통한 것은 이 나라의 정의가 사라지고 간교한 저 기회주의자들이 날뛰는데 저 꼴을 보고 간다는 것이 더 분합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고 사람이 존중받는 세상이 내가 꿈꾸는 세상입니다.
이념이라는 이 악마 같은 문제로 사람이 사람을 죽이고 동족이 동족을 죽이는 이 비련 한 세상이 밉습니다
나의 영혼과 나의 신념을 저 버러지 같이 인간들에게 팔아먹을 수 없습니다
일본 놈 앞잡이들이 득세하고 일본 놈들에게 빌붙어서 호의호식하는 저 민족반역자들을 나는 죽어서도 결코 용서하지 않을 것입니다.
양심을 팔아먹고 나라를 팔아먹는 저들이 국권을 되찾기 위한 독립운동가들을 오히려 매도하고 죽음으로 내모는 저들과 나는 결코 함께하지 않겠습니다.
나를 나는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나의 목숨을 기꺼이 바칩니다.
나는 나의 죽음이 끝이 아닐 거라 생각합니다"
지금은 마른 작대기 같아 보이는 저 나무도 때가 되면 노란 개나리가 피어 나 세상을 노랗고 아름답게 바꾸어 갈 것입니다
"내 죽음이 끝이 아니리라! 마른땅 속에서도 노란 개나리는 피어난다!"
총성이 울린다. 그의 몸이 쓰러지자, 하늘에서 수리가 날개를 펼친다. 군중의 울음소리가 산골짜기를 메운다.
1949년 봄
두석의 묘비 앞에 노란 개나리가 피어난다. 아내 밤례가 시집을 펼쳐 놓는다.
"죽음아, 올 테면 와라. 나는 나의 길을 갔노라…"
바람이 페이지를 넘기며 알렉산드르 블로크의 구절을 읽어준다.
"영혼의 불꽃은 재가 되어도, 그 속에선 새로운 싹이 튼다."
# 작가의 말
강두석의 이야기는 단순한 순국이 아니라, "해방"이라는 이름의 새로운 억압에 맞선 인간 정신의 기록입니다. 그의 죽음은 해방 후에도 계속된 민족의 분열과 권력 투쟁을 비추는 거울이자,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양심의 가치"에 대한 질문입니다. 노란 개나리는 죽음 너머의 희망을 상징하며, 우리 시대의 모든 강두석들에게 바치는 문학적 헌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