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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K. 증명하되, 공개하지 않는다

참고: 코인베이스 리포트

by 암호해독가

<낡은 금융 규제 속에서 나의 정보 주권을 되찾는 기술, 영지식 증명(ZKP>

은행 앱을 새로 설치할 때마다, 증권사 계좌를 열 때마다 우리는 당연하게 신분증을 촬영하고 온갖 개인정보를 입력합니다. 이 과정이 반복될수록 마음 한편에는 찜찜한 질문이 남습니다. ‘이렇게 여러 곳에 흩어진 내 민감정보는 과연 안전할까?’


이 반복적이고 불안한 절차의 뿌리는 50년도 더 된 법률, 이슈가 되고 있는 바로 미국의 ‘은행비밀법(Bank Secrecy Act, BSA)’에 닿아 있습니다. 1970년, 종이 서류가 금융의 중심이었던 시대에 만들어진 이 법은 오늘날 디지털 금융 환경과 충돌하며 비효율과 위험을 낳고 있습니다.


최근 Coinbase 가 펴낸 보고서는 이 오래된 문제를 해결할 열쇠로 현대 암호학 기술인 ‘영지식 증명(Zero-Knowledge Proofs, ZKP)’을 지목합니다. ZKP는 금융 시스템의 무결성을 지키면서도 우리의 프라이버시와 효율성을 극적으로 향상시킬 수 있는 대안을 제시합니다. 한 명의 ZKP 연구자로서, 이 보고서가 그리는 금융의 미래를 여러분과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우리의 민감정보가 파편처럼 흩어지는 이유

현재 금융 시스템의 고객확인(KYC) 절차는 근본적으로 ‘반복’에 기반합니다. 한 명의 고객이 다섯 개의 다른 은행에 계좌를 개설한다면, 이름, 생년월일, 주소 등 완전히 동일한 정보를 다섯 번 제공해야 합니다. 그 결과, 똑같은 민감 데이터가 담긴 데이터베이스가 다섯 개 생겨나고, 데이터 유출의 위험은 다섯 배로 늘어납니다.

금융기관은 이 데이터를 각자 저장하고, 관리하며, 규제 당국에 보고합니다. 이 과정에서 막대한 비용이 발생하고, 수백만 건의 보고서 중 대다수는 유의미한 정보 없이 쌓여만 갑니다. 우리는 더 안전한 금융거래를 위해 프라이버시를 양보했지만, 시스템은 오히려 더 큰 보안 취약점과 비효율을 떠안게 된 것입니다.


증명하되, 공개하지 않는다: ZKP의 마법

영지식 증명(ZKP)은 이 패러다임을 근본적으로 바꿉니다. ZKP의 핵심은 ‘정보의 공개(disclosure)’와 ‘사실의 증명(validation)’을 분리하는 데 있습니다.

기존 방식이 나의 신분증 원본을 복사해서 제출하는 것이라면, ZKP는 신뢰할 수 있는 제3자로부터 ‘이 사람은 대한민국 성인이 맞으며, 금융거래에 결격 사유가 없음’이라는 암호학적 ‘증명서’만 발급받아 제출하는 것과 같습니다.

금융기관은 이 증명서가 수학적으로 위변조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검증할 수 있기에, 나의 실제 생년월일이나 주소를 알 필요 없이 규제 요건을 충족시킬 수 있습니다. 마치 판사가 판결문에 판결의 이유와 근거를 모두 담아 공개하듯, ZKP는 ‘결론(증명)’만으로 그 과정의 정당성을 입증합니다. 물론, 법 집행 기관이 특정 사건을 수사해야 할 경우, 법원의 명령을 통해 원본 증명 발급 기관의 데이터에 접근할 수 있으므로 규제의 투명성 또한 확보됩니다.


ZKP가 바꿔놓을 금융의 풍경

보고서는 ZKP가 금융 규제 환경을 바꿀 수 있는 구체적인 사례들을 제시합니다.

* 더 스마트한 거래 모니터링: 금융기관은 고객의 모든 거래 데이터를 규제 기관에 넘기는 대신, ‘특정 거래가 보고 기준을 충족했다’는 사실만을 증명하여 개인정보 침해를 최소화할 수 있습니다.

* 간편한 해외 송금: 해외 은행에 고객의 민감정보를 직접 공유하지 않고도, ‘이 고객은 A 국가의 KYC 기준을 통과했다’는 사실을 증명하여 국가 간 결제 절차를 단순화할 수 있습니다.

* 프라이버시를 존중하는 실소유자 확인: 복잡한 기업 구조의 전체 소유권 체인을 모두에게 노출하지 않고, ‘실소유자 확인이 적법하게 완료되었음’을 증명하여 기업의 프라이버시를 보호할 수 있습니다.

* 효율적인 감독과 감사: 규제 당국은 수많은 고객 파일을 일일이 검토하는 대신, KYC 절차가 제대로 수행되었음을 증명하는 암호학적 증명을 통해 감독 업무의 효율을 극적으로 높일 수 있습니다.

* 환거래 금융 관계의 부활: 소규모 금융기관들이 대형 은행에 상세한 고객 정보를 공유하지 않고도 자체 규제 기준의 신뢰도를 증명할 수 있게 됩니다. 이는 대형 은행들이 위험 회피를 위해 소규모 은행과의 관계를 끊는 ‘디리스킹(de-risking)’ 관행을 줄여 금융 접근성을 높이는 데 기여할 수 있습니다.

일부 산업 분석에 따르면, ZKP 기반의 규제 준수는 기존 방식 대비 비용을 25% 이상 절감하면서 데이터 보안과 규제 효율성을 동시에 높일 수 있다고 합니다.


기술, 다시 인간을 향하다

기술은 종종 차가운 논리로 여겨지지만, 좋은 기술은 결국 인간의 삶과 신뢰를 향합니다. ZKP가 금융에 가져올 변화는 단순히 비용 절감이나 효율성 증대를 넘어섭니다. 이는 디지털 시대에 우리가 무심코 넘겨주었던 ‘정보 주권’을 되찾는 과정이며, 모든 금융기관을 잠재적 정보 유출자로 의심할 필요 없이 신뢰를 기반으로 관계를 맺는 새로운 방식입니다.

물론 이 기술이 보편화되기까지는 ZKP 구현 방식의 표준화, 법규 개정, 기술적 확장성 확보 등 넘어야 할 산이 많습니다. 하지만 50년 전의 낡은 옷을 이제는 갈아입어야 할 때임은 분명합니다. ZKP는 금융 시스템이 더 안전하고, 더 효율적이며, 무엇보다 우리 각자의 프라이버시를 존중하는 방향으로 진화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명확한 이정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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