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설아빠의 Global Business Story
수출을 해본 기업이라면 한 번쯤 이런 상황을 떠올려 봤을 것이다. 해외 바이어와 어렵게 계약을 따냈고, 원자재를 사서 제품을 만들고, 선적까지 끝냈다. 그런데 정작 다음 물량을 생산할 자금이 없다면?
T/T(전신송금)라면 그나마 돈이 빨리 들어오지만, 신용장 방식(L/C)을 쓰면 서류 심사, 선적 확인, 결제까지 몇 주에서 몇 달이 걸리기도 한다. 그 사이에도 공장은 돌아가야 하고, 직원 급여와 원자재 대금은 제때 나가야 한다.
국내 공급업체 입장에서는 수출이든 뭐든 상관없으니, 물건 가져가려면 일단 대금부터 지급하라고 요구할 것이다. 수출 기업이 나중에 바이어로 부터 돈이 들어오면 드린다고 약속하지만, 그런 약속만으로 거래처를 설득하기란 쉽지 않다.
그렇다! 바로 이 애매한 간극을 메워 주는 장치가 바로 내국신용장(Local L/C)이다.
겉으로 보면 내국신용장은 국내 기업끼리 물건을 사고파는 평범한 거래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거래의 목적은 분명하다.
"해외로 수출할 물건을 만들기 위한 국내 거래"
수출 기업은 해외 바이어로부터 수출신용장(Master L/C)을 받는다. "조건대로 물건을 보내면, 은행을 통해 나중에 대금을 지급하겠다"는 약속이다.
내국신용장은 이 수출신용장을 담보로 삼아, 국내 은행이 다시 국내 공급업체를 향해 또 하나의 신용장을 발행하는 구조이다. 이른바 '백투백 신용장(Back-to-Back L/C)'이다.
결과적으로, 해외 바이어의 신용이 수출기업의 은행을 경유하여 국내 공급업체로 이어진다. 따라서 수출 기업은 당장 통장에 현금이 많지 않아도 원자재를 조달할 수 있고, 공급업체는 "기업"이 아니라 "은행"을 믿고 안심하고 납품할 수 있게 된다.
내국신용장에는 4가지 핵심 플레이어가 등장한다.
개설의뢰인(수출 기업): 내국신용장을 은행에 신청하고, 나중에 은행에 상환해야 하는 최종 책임자
수혜자(국내 공급업체): 원자재·부품을 공급하거나 임가공을 맡는 쪽으로, 내국신용장 조건에 따라 납품하는 주체
개설은행(issuing bank): 수출 기업의 거래은행으로, "공급업체가 조건을 지키면 내가 대금을 지급하겠다"고 약속하는 은행
매입은행(negotiating bank): 보통 공급업체의 거래은행으로, 서류를 확인하고 공급업체에게 먼저 대금을 지급한 뒤 개설은행에 정산을 청구
구조를 한 줄로 줄이면 다음과 같다. 수출 기업이 은행에게 '나 대신 보증해 달라'고 요청하고, 은행은 공급업체에게 '조건 맞으면 내가 돈을 주겠다'고 약속하는 구조인 것이다.
이 덕분에 개별 수출기업의 신용 한계를 넘어, 은행의 신용이 공급망 전체를 떠받치는 사다리가 만들어지게 된다.
첫째, 미래에 받을 수출 대금을 '지금 당장 쓸 수 있는 돈'으로 바꿔 준다. 수출신용장은 "나중에 줄게요"라는 약속이고, 내국신용장은 그 약속을 담보로 은행이 국내 공급업체에게 먼저 돈을 지급해 주는 장치이다. 즉, 미래 현금을 현재의 생산 자금으로 끌어오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둘째, 자금난 때문에 수출이 멈추는 상황을 막아 준다. 만약 자금이 막히면 생산이 멈추고, 납기를 못 맞추게 되면 수출 계약이 깨질 수 있다. 내국신용장은 '원자재 대금 확보 → 생산 일정 유지 → 수출 물량 확보'의 흐름을 지켜주는, 보이지 않는 '윤활유' 역할을 한다.
셋째, 공급업체도 대금 걱정 없이 참여하게 만든다. 공급업체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물건은 납품했는데 돈을 못 받는 것"일 것이다. 내국신용장은 지급 보증의 주체를 기업이 아니라 은행으로 바꾸어, "서류만 맞으면 돈이 나온다"는 확신을 준다. 그래서 중소 수출기업과도 안정적으로 거래를 이어갈 수 있다.
넷째, 국내 산업 전체를 키우는 '부가가치 사다리'를 만든다. 수출에 필요한 원자재와 부품을 국내에서 조달하면, 그만큼 국내 소재·부품 산업의 매출과 고용이 늘어난다. 내국신용장은 'A기업 → B기업 → C기업'으로 이어지는 다단계 공급망 전체에 금융 혜택을 확산시켜, 복잡한 제조 생태계를 안정시키는 역할을 하게 된다.
그래서 내국신용장은 개별 기업만을 위한 편의 제도가 아니라, 한국 수출경제를 떠받치는 금융 인프라에 가깝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요약하자면, 내국신용장은 "수출로 벌게 될 돈을 미리 신용으로 당겨 쓰게 해 주고, 공급업체에는 은행의 보증으로 '안심 거래'를 제공하며, 국내 제조 공급망 전체를 안정시키는 숨은 안전장치"이다.
기업의 자금 사정이 여유로울 땐 이 제도의 존재가 잘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수주는 늘어나는데 현금흐름이 따라오지 못할 때, 글로벌 경기 불안으로 자금 조달이 어려워질 때, 내국신용장은 수출을 끝까지 완주하게 해 주는 마지막 안전벨트가 된다.
물론, 모든 기업이 쓸 수 있는 만능 열쇠는 아니다. 수출실적이나 수출신용장이 필요하고, 은행의 심사를 통과해야 하며, 서류를 정확하게 관리할 실무 역량도 요구된다. 그래서 내국신용장을 쓰지 못하는 기업도 적지 않다.
그렇다면 이런 기업에게는 어떤 선택지가 남아 있을까? 여기서 등장하는 또 하나의 제도가 바로 '구매확인서'다. 내국신용장을 쓰기 어렵거나, 다른 방식이 더 적합한 기업들에게 중요한 대안이 될 수 있다.
따라서, 다음 편에서는 이 구매확인서가 어떤 구조로 작동하고, 내국신용장과 어떻게 다르며, 언제 어떤 전략으로 활용해야 하는지 이어서 이야기해 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