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 시간을 보내는 매 순간의 이어짐과 그것들의 총합이 삶이라면 사실상 시간만큼 귀한 것이 없다. 반대로 시간이 흐르지 않거나 자체가 없다면 삶의 본질적인 개념이 달라질 것이다. 어떤 이유와 목적인지 모르지만 여하튼 나는 세상으로 와서 지금까지 멋 모르고 살고 있다. 그리고 머지않아 곧 마감을 칠 때가 올 것이다.
문득 예전에 즐겨 불렀던 닐 다이아몬드 노래 중에 비가 떠오른다. 철학적으로 생각되었던 노래였다. Be...
갈라지듯 칼칼한 허스키의 목소리에 얹어진 노래는 호소감이 매우 강렬했다. 당시에 좋아했던 문인과 철학자 특히 릴케와 니체가 떠오른다. 화가 모딜리아니를 왜 좋아했을까? 낙선했기에? 아니면 그림을 못 그려서?
정말로 못 그린 그림은 피카소의 그림이라고 여겼고 스트라빈스키의 불새는 당시에는 소음 수준으로 들렸다. 지금은 좀 달라졌지만.
나는 터널을 지나 시간이 지배하는 세계에 잠시 들어와서 소용돌이치며 헤매다가 마침내 벗어나는 존재인가?
누가 블랙홀에 빠져본 적이 있는가? 아무도 그런 경험이 없으므로 그저 상상 속의 두려움과 호기심만 강하게 느껴진다.
한 영혼이 시간의 홀 그것이 블랙홀인지 화이트홀인지 이름은 모르지만 그 소용돌이를 통하여 시간의 세계로 와서 헤매며 지냈다. 그리고 이제 서서히 빠져나갈 준비를 한다. 이것이 슬픈 일인가? 아니다. 결코 아니다. 물방울이 터지면 물은 원천인 저수지든 강이든 떨어지거나 증발하여 종국에는 빗방울이 되어 바다로 환원되고 방울 속의 공기는 바람이 되어 대기로 사라지며 환원이 될 것이다. 보이지 않기에 사라진다는 표현을 했을 뿐이지 존재 자체가 완전 소멸되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 슬퍼할 이유가 도대체 어디에 있을까. 그래서 도달한 생각은 산다는 것의 의미가 뭐 그리 대단한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조심스럽게 해 본다. 신의 노여움이 두렵기에 감히 판단은 할 수 없다.
다들 잠시 터널을 지나 외계 여행을 하는 만큼 각자의 가치관에 따라 변모되어 살다가 때가 되어 돌아가면 어떤 새로운 세계에서 어떻게 지내게 될지 알 수 없는 두려움이 마음 한구석에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러한 궁극적인 문제를 망각한 채 시간을 때우듯 사는 것처럼 보인다.
돈은 없어도 시간은 부자라는 헛소리를 대놓고 지껄여 대며 얼간이처럼 살았는데 머지않아 나도 쇼펜하우어가 비문에 남긴 말처럼 내 이럴 줄 알았다며 황당해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렇게 글이라도 쓰며 생각을 추스른다. 무겁게 이고 지고 있는 많은 마음의 짐을 이제는 내리려 한다. 시시포스의 바위처럼 무거운 짐.
요즘은 ai도 글을 쓰고 약삭빠른 사람은 ai가 학습한 것을 가지고 돈벌이를 한다. 시대가 달라졌다고
인간의 고유한 속성에서 나온 글을 합성하여 멋대로 써먹는 세대다. 문명의 진화과정이라는 말이 틀린 말은 아니다. 파피루스가 사라지고 깃털 대신 활자판으로 찍기 시작한 문명의 역사는 언제부터인가? 작가 셰익스피어의 이름의 의미를 아는가?
그 후 불세출의 it 영웅인 스티브 잡스가 등장한 이후로 사람들이 글로 표현하는 손가락 동작이 달라졌다. 요즘 청춘들은 글씨를 아예 쓰지 않고 그냥 두들기는 것이 아닌가 싶다. 무언가 글씨를 쓸 때 느껴졌던 정성 들임과는 사뭇 다르다. 그냥 두들겨 패듯 두두두... 자판을 두드리며 스트레스를 날린다. 두두두...
문화사업에도 기기를 이용해서 짜깁기를 잘하는 엔지니어가 각광을 받는다. ai 머슴을 부리는 자가 음악과 미술에도 두각을 드러낸다. 감별사의 재주가 우수하면 된다. ai 가 만든 것이 똥인지 된장인지 찍어보고 맛을 보고 감별하는 능력이 탁월하면 대박이다. 그래서 글을 쓰고 싶은 생각이 옛날처럼 많지 않다. ai와 경쟁하기 싫다. 따라갈 수 없는 기계의 능력에 대한 알 수 없는 두려움은 바둑시합에서 이세돌이로 이미 충분했다.
하여튼 세상은 원래부터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요지경 같은 것들로 인하여 앞으로 갈수록 더 난해한 장소로 변질될 것이다.
속담에 제 꾀에 자기가 넘어간다는 말이 있다. ai를 머슴으로 삼았는데 똑똑한 종이 주인을 종이나 놀이 도구로 삼는 시대가 오지 않을까. sf는 이미 도래했다.
예배를 드리러 가는 전철에서 맞은편 아저씨가 무언가 열심히 먹는다. 저작운동을 하는 본능은 자연의 입 달린 모든 것에게 있듯 사람도 무언가 씹어야 풀리는 본능이 있는 모양이다. 그래서 오래전에 유행하던 말이 떠오른다. 완행열차를 타고 갈 때면 등장하는 홍익 아저씨가 노래 부르듯 들려주는 김밥 있어요 오징어 땅콩 심심풀이 땅콩 있어요.
이전에는 땅콩 재배가 흔하여 땅콩이 심심풀이 저작운동용으로 애용됐지만 요즘은 금콩이라 달라졌다. 그래서 심심풀이 땅콩이라는 말이 사라졌나 보다. 오징어도 금징어다.
ai는 먹지 않는다. 따라서 먹거리로 사람과 경쟁은 하지 않을 것이다. 대신 에너지를 두고 양측은 치열한 다툼이 있을 것이다. 사람도 현대에 들어서서 에너지를 급격히 사용한다. 그러다 보니 ai와 언젠가는 크게 일전을 벌릴지도 모른다. 어쩌면 양쪽의 존폐를 결정할 큰 전쟁일 수도 있다. 인간이 지게 된다면 두말할 것 없이 원시시대로 돌아가 그저 입의 저작운동만 하게 될지 누가 알겠는가.
작금의 ai의 추세를 보면서 프랑스 작가 베르베르나제 가 쓴 뇌라는 소설이 떠오른다. 인간의 허망한 꿈은 결국 비켜나갈 수 없는 한계에 봉착한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던 수작이었다. 개미와 대화를 하는 깜찍한 발상을 했던 작가의 탁월한 상상력이 아름다웠던 책으로 남아있다.
주일 예배를 드리고 본당에서 일터로 가기 전에 이 글을 이어간다. 전에는 내 삶이 소설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어렸을 때부터 시작된 굴곡과 그 환경에 부대끼며 변모된 못난 마디들이 아팠던 시간과 그것을 덮으려는 잘못된 즐거움의 시도들이 얽히고설킨 마디들이다. 지금은 크게 연연하지 않는 것은 나이가 주는 안정감이다.
몇 년 있으면 세상에게 헤이 쎄이 굿바이 하며 떠날 여정인데 뭐가 그렇게 아쉬울까.
그때까지 남은 에너지를 다 소모하고 떠날 마음으로 사는 날들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이 좋다. 오리를 가자고 하면 십리를 가줘라. 삭아질 육신을 마지막까지 갈아서 쓰자. 그리고 가자.
아직은 ai를 그다지 두렵게 여기지 않는 시대에 살 수 있는 은혜를 주신 나의 주님께 감사한다.
“Surely, therefore, I will gather you to your fathers, and you shall be gathered to your grave in peace; and your eyes shall not see all the calamity which I will bring on this place.”’” So they brought back word to the king.(열왕기하 22장 20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