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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원하는 건 내게 없어

유감스럽게도.

by 리뇨

11년의 특정직 공무원 생활, 1년의 자율연수 휴직 끝에 나는 의원면직했다. 자의 반, 타의 반이다. 그러나 직업을 버리고 백수 생활을 한 지 1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까지도, 뭣 같았던 그 곳을 빠져나온 것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슬슬 경제적 쪼들림의 시작이고 생활 유지는 곧 저축 까먹기일 뿐이지만, 언제나 내가 입고 먹고 쓸 것은 내 손으로 해결해왔다. 내가 글씨를 읽고 쓸 수 있던 그 모든 순간부터. 내가 나 하나 먹여살리지 못할 거란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는다.


나의 전 직업은 초등교사로, 한때는 1등 신붓감 소리를 듣는 직업이었다. 직업을 소개하면 열에 아홉은 그리 말하더라. 소개팅 상황이 아닌데도. 그 말에 나는 조소했고, 직업을 칭찬하는 말에 삐딱하게 반응했다. 그 말 별로 안 좋아한다고. 다른 교사들에게도 그 말을 자중해 달라고. 칭찬에 친절하게 대응하지 못하는 비뚤어짐에 많은 이들이 기막혀했다. 칭찬이잖니?


나는 그들에게 물었다. 수많은 직업 중 교사라는 직업을 가졌다는 게 왜 1등 신붓감이 되는 거냐고. 그들의 답변은 이랬다.

1. 나름 검증된 우수한 두뇌

- 십 년 전만 해도 교대는 수능 평균이 2등급 정도는 되는 사람들만 입학이 가능했으니. 수시로 입학한 학생을 따져도 수능 2등급 후반은 됐다. 지금은 수능 평균 4등급, 내신 7등급도 가능하다.

2. 모범적이고 바른 이미지. 인내라든지, 책임감이라든지.

3. 정년이 보장된 안정된 직업

4. 예측 가능한 근무 패턴으로 가사와 육아에 많은 부분을 담당해 줄 만한 시간적 여력

5. 단정해서 어쩐지 못 봐줄 외모는 아닐 것 같다는 느낌적인 느낌이 있다나 뭐라나.. 개소리.


그래서 질문을 바꿨다.

"그럼 교사가 1등 여자친구 감인가요?"

이 질문에 놀랍게도 그렇다고 대답한 사람이 단 하나도 없었다. 고루함, 물정 모름, 고리타분하고 가르치려 드는 성향, 놀 줄 모를 것 같아 재미 없음 등을 이유로 들었다. 여자친구로는 어떤 직업이 좋냐는 질문엔 소위 예쁜 사람들이 할 법한 직업들을 말했다. 모델, 승무원, 그리고 예쁘면야 뭐든.


여자보다는 가족을 찾는다는 거지. 그러면서 남자 재산 보는 여자들은 가루가 되게 까는 걸 보면 우습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의 성질 중 가장 두드러지는 건 이율배반이라고 하던가. 직업을 소개했다는 이유만으로 갑자기 결혼시장의 상품등록이 되는 느낌이 싫었다. 그래서 어딜 가서 직업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았다. 마지 못해 소개해아 할 일이 생기면 '공무원'이라고 했다. 공무원증 소지자니 거짓도 아니고.


최근에 결혼을 전제로 한 소개팅 제의를 들었다. 일전에는 친구가 물어오더니 이번에는 언니가 물어왔다. 베트남을 기반으로 종종 한국 고향에 들르는 생활을 하는 사업가란다. 내가 그만두었을 때의 두 배의 벌이 쯤을 생활비로 약속할 수 있는 남자라고.

"그런 조건이면 나름 홀리는 여자들도 없지는 않을 텐데 굳이 나를 왜?"

물었더니, 그 남자가 원하는 건 정교사거나 정교사였던 여자란다. 어차피 일을 그만두고 가사와 육아에 전념해주길 원하니 현 백수인 것은 조금도 문제되지 않는다나. 자신이 찾는 사람이라며 다리를 놔달라고 했단다.


순간 솔깃했지만 바로 거절했다. 그 사람이 원하는 바가 뭔지 알겠어서. 아마 사람들에게 지겹게 들었던 그 놈의 1등 신붓감 환상에 아직도 젖어있는 40대겠지. 일단 사람들이 해설해준 것 중 아마 내가 가진 건 타인보다 조금 우월한 정도의 지능일 것이다. 고딩 시절 학교에서 다같이 치른 iq 검사 중 7개인가 8개 항목에서 한 코너를 통으로 날려버려 한 항목에서 "저능함"이 뜨고도 117은 나오는 정도의 지능이었으니. 간혹 일부는 살면서 만나본 사람 중 내가 가장 기억력 좋고 머리가 비상한 사람이라는 소리를 하기도 했으니. 그 지능 자신감은 전문직 시험 도전해보려다 기본 강의도 이해 못하는 나를 보고 지하 뚫고 내려갔지만. 그 외의 장점은 이미 내게 없다. 내가 시간적 여력이 넘친다고 가사와 육아를 즐길 수 있는 사람도 아니다. 난 쉬고 싶고, 혼자만의 시간과 공간을 몹시도 중요시하는 사람이니.


그리고 내가 그 남자에게 얻을 수 있는 건 뭘까? 단 하나, 돈 뿐이다. 그것도 어쩌다 삐끗하고 빠그라지지 않을 거라고 장담할 수나 있으려나. 선언하건데 나는 돈이 몹시 좋다. 돈이 최고고, 돈에 대한 사랑은 음식에 대한 사랑 못지 않다. 그러나 의외로 내가 남편을 얻는다면, 그에게 추구하는 것은 돈이 아니다. 물론 경제적 무능함이 괜찮다는 건 아니지만, 그보다는 책임감과 나에 대한 존중, 성숙함, 그리고 잘생김이다. 40이 넘어서도 아내는 오로지 정교사 출신이어야 함을 고집하는 남자가 성숙할까? 위에 나열된 기대 중 많은 것이 빠그라져도 나를 존중할까?잘생기고 괜찮은 남자라면 여자들이 여태 내버려뒀을까?


그가 내게 원하는 것도, 내가 그에게 원하는 것도, 서로 주고 받을 수 없다는 결론을 냈다. 이 거래는 불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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