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드럽지만 스며드는 힘

에세이에 관한 생각

by 그린라이츠

지난날 친구들과 독립 서점에 들렀다. 친구가 자기는 에세이는 감성팔이 같다고 본인은 싫어한다고 이야기하며, “너는 에세이 좋아하지? “라고 물었다. 쉽사리 “나는 에세이 좋아!”라고 말하지 못했다. 왜일까?

주류의 의견에 들어야 한다는 압박감이었을까?


아마 그 시기가 에세이는 감성팔이라는 조롱 섞인 글들이 SNS에 자주 올라오던 시기였다.


아무래도 연약하고 부드러운 에세이의 이미지가 아닌, 강하고 다부진 이미지가 ‘나’라고 발끈했던 게 아닐까 생각해 본다.


친구의 그 말이 계속 맴돌아 나를 힘들게 했다. 돌아보면 성장기 나를 살린 건 에세이였기 때문에 마음이 더 힘들었다.


기초생활수급자, 한부모 가정.


내 10대 시절 소수의 가정에만 붙는 여러 가지 수식어구들이 우리 집에 붙었다. 새 학기가 되어 새로운 학년에 들어가면 담임 선생님은 여지없이 나를 따로 불렀다.


처음 우리 집이 다르다는 걸 깨달은 건 어린이집에서였다. 어린이집에서 아빠와 함께하는 프로그램을 진행한다는 안내장을 읽고 엄마는 매우 화가 났고, 어린이집에 전화를 걸어 화를 냈다. “아빠 없는 애들은 어떻게 하라는 거냐?”는 엄마의 화난 목소리를 들었지만, 그 이면에는 또 아픔과 서러움이 묻어있었기에 어린 나는 그저 멀뚱 거리는 것 외에 별다른 수가 없었다.


내가 기억하는 그 순간부터 엄마만이 내 세상에 존재했다. 대상이 없어진 기억이 없었기에 나는 부재의 슬픔을 느끼지 못했다.


문제는 내가 한 살 한 살 나이가 들면서였다. 사회는 내가 남들과 다른 가정환경을 지니고 있음을 계속해서 확인시켜 줬고, 남들은 있는 걸 나는 가지지 못했다고 소리쳤다.


엄마는 매일 알바를 하면서 우리를 지켜냈고,

버텨내는 엄마에게 나는 무거운 짐인 것만 같았다.


엄마는 새끼들 입에 풀칠하기 바빠 일을 멈추지 않았고, 나는 누군가의 따스한 손길이 필요했다. 그때 나를 살린 건 에세이였다.


특히나 공지영 작가의 ‘네가 어떤 삶을 살든 너를 응원할 것이다.’, ‘딸에게 주는 레시피’ 이 두 권이 기억에 많이 남는다. 내 자아 정체성을 확립하는 시기 나를 만들어준 문장들로 가득했다.


이런 에세이들을 항상 가방에 넣어 다녔다. 마음이 힘들거나 흔들릴 땐 가방 속에서 에세이를 꺼내 읽고 또 읽어 내렸다.


지금은 철학 관련 서적 특히 스토아철학을 좋아하지만, 그 시절 에세이는 내게 엄마의 따스한 손길이자, 든든한 내 친구였다.


누군가의 말 한마디가 사람을 죽일 수도 살릴 수도 있다고 하던가 나에게 에세이는 나를 살리는 글이었다.


그 독립 서점에서 당당하게 하지 못했던 말들을 이렇게라도 끄적여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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