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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 30. 사라진 이름"

by Liar

Part 30. 사라진 이름


비가 얕게 내리던 아침, 병원 지하 주차장엔 축축한 먼지 냄새가 감돌았다. 수진은 잔잔한 빗소리 속에서 말없이 휠체어의 손잡이를 잡았다. 바퀴가 콘크리트 바닥을 굴러가는 소리가 유난히 또렷했다.

건우는 흐릿한 눈으로 천장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손등 위로 떨어진 물방울 하나가 굴러 내렸다.

퇴원 수속이 아닌, 폐쇄기록 절차. 병원 시스템 상에선 건우는 오전 3시 17분, 심정지 상태로 응급처치 중 사망 판정을 받은 환자였다. 심정지는 ‘오류’로 잠시 기록되었고, 복구될 예정이었지만 수진은 그 복구를 ‘지연’ 처리해두었다.

시간은 벌었다. 이제 남은 시간은 단 32시간.

그녀는 건우를 작은 밴에 태우며 조용히 말했다.

“이제 진짜 시작이야,”

그러나 그녀의 목소리 끝엔 아주 미세한 떨림이 숨어 있었다.

건우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얼굴은 창백했고 눈 밑은 어두웠지만, 어딘가 단호해 보였다. 옷은 이미 갈아입었고, 이름표도, 팔찌도 제거되었다. 더 이상 그는 병원 기록상 ‘존재하는 환자’가 아니었다.

“어디로 가는 거야?”

“윤섭 씨가 마련한 곳. 외부 CCTV 없는 폐창고, 공장처럼 꾸며져 있어. 장례식장처럼 보이게 연출해놨대.”

“진짜 죽음을 믿게 만들려면, 정교해야 하니까.”

그날 오후, 강원도 외곽의 작은 폐창고 안. 바깥은 안개가 깔려 있었고, 안은 불 꺼진 형광등 밑으로 은은한 조명이 퍼져 있었다. 윤섭은 검은 양복 차림으로 건우를 기다리고 있었다. 주변엔 낡은 벽, 무너진 간이벽장, 그리고 세 개의 접이식 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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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왔어요.”

건우는 무거운 발걸음으로 그 앞에 섰다.

“조금... 비현실적이네요.”

“지금부터 당신은 사라진 사람이에요. 여기서 나가면, 진짜로 누구도 건우란 이름을 기억하면 안 됩니다.”

수진이 뒤따라 들어왔다. 그녀는 건우의 가방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노트북, 핸드폰은 정리해뒀어. 사전은 집에 두고 왔어. 괜히 같이 가져왔다가 눈치라도 채면 안 되니까.”

건우는 작게 웃었다. “거창하다. 존재를 끊는다는 말.”

“어쩌면... 나한테 필요한 말이었을지도.”

건우는 텅 빈 가방을 열었다. 사전이 있어야 할 자리는 비어 있었다. 수진은 그의 시선을 읽고 작게 말했다.

“사전이 이 근처에 있으면, 눈치챌 수도 있다고 생각했어. 최소한 우리가 뭘 꾸미는지 의심이라도 할 수 있으니까.”

건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잘했어. 지금은 최대한 조용히, 완벽하게 믿게 만들어야 하니까.”

윤섭은 수진이 가져온 노트북을 펼쳐 무릎 위에 올렸다.

손가락이 빠르게 자판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마치 오래된 피아노 위에서 익숙한 곡을 연주하듯, 무의식적으로 손이 움직였다.

“병원 중앙 서버는 생각보다 취약하더라고요. 대부분의 진료 기록이 외부 백업 없이 실시간 로그로만 돌아가니까.”

그는 코드창 사이사이 메모를 남기며, 복구 시도 자체를 무한 루프에 빠뜨리는 코드를 삽입했다.

“심정지 시간은 그대로 두고, 그 시점 이후 로그는 전부 암호화하고 지웠어요. 복구 시도는 일어날 거지만, 로그는 이미 없어진 상태라 ‘기록 없음’이 되는 거죠. 죽었지만, 복구할 수 없는 상태. 시스템 입장에선 실종이나 다름없어요.”

수진이 그의 옆을 지켜보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정말... 한 사람을 이렇게 없앨 수 있는 거구나.”

윤섭은 화면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IP 자체를 흔적 없이 사라지게 하면 돼요.”

그는 로그아웃과 함께, 네트워크 우회 로그까지 삭제했다. 건우라는 이름이 세상의 어느 기록에도 남지 않도록.

수진이 놀라듯 윤섭을 바라봤다.

“어떻게... 그렇게까지?”

윤섭은 무표정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예전 회사에서 정보 보안팀 이었어. 기업 내 민감한 인물의 퇴사나 인사이동 시 서버 기록을 전부 추적해서 정리하던 작업을 했었지. 흔적을 남기지 않는 게 제 일이었어.”

그는 노트북을 닫으며 덧붙였다.

“이번엔... 그 기술을, 다른 방식으로 쓰게 될 줄은 몰랐지만.”

윤섭은 입꼬리를 씁쓸하게 올렸다.

그날 밤, 수진은 따로 떨어진 방에서 노트북을 켜고 병원 시스템을 다시 확인했다. ‘심정지 오류’ 기록은 아직 복구 전 상태였다. 윤섭이 조작한 DB 루프는 여전히 작동 중이었다. 수진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사전은 그녀의 책상 서랍에 조용히 들어가 있을 것이다. 멀리 떨어져 있어야 했다.

다음 날 아침, 건우는 작은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빛에 눈을 떴다. 수진은 그 옆에서 졸고 있었다. 노트북은 여전히 켜진 채였고, 그의 핸드폰은 꺼진 상태로 가방 안에 묻혀 있었다.

“몇 시야...?”

“7시 반. 아직 아무 반응 없어.”

윤섭은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오며 말했다.

“뉴스 안 떴어요. 병원도 조용해. 우리가 조용히 만든 ‘죽음’, 성공적이야.”

그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한 톤 낮았고, 그 눈빛에는 복잡한 감정이 엉켜 있었다.

그는 건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가 아직 살아 있다는 사실이, 믿기 어려운 현실처럼 느껴졌다.

수진은 잠에서 막 깨어난 얼굴로 조용히 눈을 맞췄다.

창문 너머 아침 햇살이 희미하게 들어오고 있었지만, 방 안은 여전히 긴장으로 차 있었다.

“그럼 이제... 기다리는 일만 남았네요.”

수진이 말했다.

“시간 얼마나 남았지?”

“이제 정확히 26시간.”

“그 시간이 지나면... 사전은?”

건우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모르겠어. 그냥 꺼질 수도 있고... 아니면, 새로운 무언가를 시작할지도.”

윤섭은 조용히 앉으며 말했다.

“혹시 모르잖아요. 책이 우리를 계속 관찰하고 있었다면. 정말로 누군가가... 보고 있었다면.”

그 말에, 세 사람 모두 말없이 고개를 떨궜다.

침묵 속에서, 오래된 책 한 권이 수진의 집 책상 서랍 안에서 조용히 잠들어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 더 깊은 침묵 속에서 누군가의 이름을 되뇌고 있을지도 몰랐다.

아직 누가, 다음인지도 모른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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