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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다음 세상에서 만나면 더 잘해드릴게요

가을바람을 타고 가슴에 되살아난 사랑

by sandra

추석을 앞두고 시동생 부부, 시누이 부부와 함께 파주에 계신 시부모님 납골당을 찾았다.

바람은 한결 부드러워졌고, 마음도 그 결에 실려 바람을 타고 조용히 가을의 안쪽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부모님 앞에 서자, 예전 같으면 하늘나라에서 두 분 꼭 손잡고 행복하게 계세요'라고 기도를 했는데, 올해는 문득 '어머니 다음 세상에서 만나면 더 잘해드릴게요' 무의식처럼 나온 기도였다.

내가 나이가 들은 탓일까?

시어머니께 더 잘해드리지 못한 마음이 가을바람을 타고 가슴에 되살아난 것일까?

세월이 흐를수록 더 따뜻한 며느리였더라면 하는 생각이 잦아진다.



몸이 약해 맏며느리감이 안 된다는 이유로 결혼을 반대하셨던 시어머니.

제주도로 신혼여행을 다녀와 친정으로 인사를 갔다가 긴장이 풀려서인지 쓰러졌고, 병원을 오가며 한 달여간 친정에 머무르고 있었으니...

결혼 직후부터 나는 시어머니의 기대에 한참 못 미치는 약한 맏며느리였다.

시댁으로 돌아온 뒤에도 남편은 매일 퇴근길에 처가에 들러 장모님이 달여 주신 한약을 가져와 시어머니 몰래 내게 먹였다.

아픈 나, 걱정 많은 남편, 그리고 못마땅해하시는 시어머니, 세 사람의 균형은 오래가지 못했다.

"칠순 노인이 애첩을 얻어도 너 보단 낫겠다"

시어머니는 마침내 분노를 들어내셨고, 나는 화목한 집안에 불청객이 되었으며 남편은 양쪽 사이에서 점점 지쳐갔다.

시어머니에게 큰아들은 믿음 그 자체였고, 신앙 같은 존재였다.

내가 그때 조금 더 지혜로웠다면 , 지금 알고 있는 것을 그때도 알았더라면...



내가 자란 집은 조용하고 온화했다.

엄마는 자식들에게 화를 내거나 손찌검을 하신 적이 없었고, 여섯 남매를 키우며 늘 부드럽고 인자하셨다.

아버지는 기차 시간에 맞춰 출퇴근을 하시며 집안일도 함께 하시던 성실하고 자상한 분이셨다.

그러나 결혼 후 마주한 시댁은 많이 달랐다.

시아버님은 착하고 무던하셨지만 자상하고는 거리가 멀었고, 시어머님은 자상하고, 완벽한 질서를 좋아하셨지만 불같은 성격을 지닌 분이셨다.

나는 익숙지 않은 온도 속에서 몸도 마음도 조금씩 말라갔다.

그 와중에도 시할아버님께서 가끔 내 방에 슬며시 과자봉지를 넣어 주셨다.

익숙했던 온도를 떠나 낯선 삶의 고단함 속에서,

시할아버님의 말없이 전해지는 온기가 유난히 따뜻하게 느껴졌다.

첫째를 낳고 이년만에 둘째 아이를 임신해 배가 불러오던 무렵, 할아버지께서 병환으로 몸져누우셨다.

나는 매일 할아버님을 목욕실로 조심스레 모시고 나와 얼굴과 머리, 발을 정성껏 씻겨드렸다.

할아버님은 서서히 기운을 돼 찾으셨고 한 달 만에 기력을 회복하셨다.

그러나 내가 둘째 아이를 낳기 조금 전 할아버님께서는 조용히 하늘나라로 떠나셨다.



20년이 넘게 아이가 없었던 시댁에 태어난 아들과 딸은 자랄수록 집안에 꽃이고 보배였다.

시어머니의 손주 사랑은 각별하셨다.

학교친구들마저 '나도 너 같은 할머니가 계셨으면 좋겠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큰아이가 국민학교에 입학한 해, 겨울방학을 앞두고 담임선생님께서 아들이 전교 일등을 했다는 전화를 주셨다.

매달 월말고사가 있던 시절, 그 소식은 생각지도 못한 선물이었고, 이후 자연스레 학부모 모임에 참여하는 일이 잦았졌고, 이학년이 되자 몇몇 아이들이 모여 천자문을 끝내고 명심보감 공부에 들어갔다.

공부는 아이에 몫이었지만, 곁에서 지켜보는 나 역시 아이 못지않게 즐겁고 의미 있는 시간을 함께 보냈다.

그 무렵, 시어머님도 "너에게 일을 맡기면 더는 걱정할 일이 없다" 라며 점차 마음에 문을 열기 시작하셨다.

꽃꽂이 강사를 집으로 초대해 1년 동안 꽃꽂이 강습을 받을 수 있도록 배려해 주셨고, 심 씨 집성촌인 평창동에서 나를 신뢰받는 맏며느리로 자연스레 세워 주셨다.



아들은 학업에서, 딸은 예능에서 제각기 재능을 드러내며 자랐고, 큰 아이가 국민학교를 마칠 무렵, 우리는 새 삶을 찾아 브라질로 이주했다.

출국 전 어머님은 "몇 년만 살다 오너라" 하시며 아쉬움을 애써 감추셨다.

시 아버님이 일손을 놓으신 뒤부터 시부모님은 정기적으로 브라질에 오셨고, 3개월 아니면 6개월을 우리와 함께 하셨다.

그 시간이 되면 , 나는 조용히 중심에서 한 발 물러섰다.

집은 자연스럽게 어머니의 공간이 되었고, 남편은 어머니의 아들로 돌아가는 시간이었다.

어머니는 대화가 전혀 통하지 않는 브라질 가정부와도 별 어려움 없이 잘 지내셨다.

말 대신 익숙함으로 모든 것을 정리해 나가셨고, 내 드레스 룸과 속옷 서랍까지 정리해 주셨으며, 남편의 외출과 귀가는 물론 모든 일이 어머니의 세심한 손길 아래 있었다.

나는 바쁜 일상 속에서 정돈된 드레스룸이 주는 안정감이 싫지 않았고, 가족을 바라보며 행복해하시는 어머니의 모습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다.

나는 스스로 한 발 물러섰다고 생각했지만, 어머니는 달리 보셨던 것 같다.

전통적 기대 속에서, 집에서 아이들을 기르며 곱게 살아야 할 며느리가 바깥일을 하는 모습이 안쓰러우셨고, 어덯게든 돕고 싶은 것이었다.

결국, 자상한 성격의 어머니 마음속에 나는 아픈 손가락이었다.



부모님이 마지막으로 브라질을 오셨을 때, 어머님이 조용히 말씀하셨다.

"나는 지금도 아비가 너한테 잘하는 걸 보면 어떻게 저렇게 까지 잘할 수 있을까 싶어 샘이 난다"

그 말씀에 아버님이 당황하시며 "지금 무슨 얘기를 하는 거야?"

어머님이 말씀하셨다.

"우리 에미는 내가 이런 말을 해도 , 그 말을 다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니까"

그 순간, 어머니께서 나를 단순한 며느리가 아닌, 내면을 지닌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으로 신뢰하고 계시다는 사실이 문득 가슴을 스치며 내 안에 조용히 남아 있던 마지막 벽까지 스르르 무너져 내렸다.

그날 어머니는 시어머니가 아니었다.

그분은 나와 같은 여자였고 , 고단하고 단단한 삶의 무게를 말없이 견디며 살아온 한 사람이었다.

이해는 때로 거리를 좁히는 것이 아니라, 같은 자리에 나란히 서보는 일임을 알게 되었다.


(브라질에서 온 시간의 조각, 나의 애장품)

* 장인의 손끝에서 태어난 자연석 새 가족, 그 곁을 곱게 물든 장미석이 따스히 함께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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