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문 앞에 쿠키가 서 있었다

걸스카우트가 굽는 전통의 조건

by 한이람




스마트폰 상단에 알림이 뜬다.

이란의 초등학교가 폭격당했다는 뉴스.


알림을 스와이프한다.

미국의 지인이 보낸 메시지가 그 자리를 채운다.


My girl's troop cookie sales are live!
우리 딸 troop에서 쿠키 판매 시작했어!


그 메시지가 한 장면을 불러왔다.

어느 날 문 앞에 쿠키가 찾아온 순간을.


보험 계약서 대신 카트 하나를 끌고 온,

아주 작은 영업사원을 처음 만난 날.



내가 만난 소녀는 아니지만 10박스는 충분히 팔 눈빛이다.



"Hi! Would you like to support our troop?"
(안녕하세요! 저희 부대를 응원해 주실래요?)




쿠키에도 제철이 있다


그 이후는 잘 기억이 안 난다. 정신 차려보니 내 손에 쿠키 열 박스가 들려 있었을 뿐이다.


그 귀여웠던 영업 멘트가 문득 다르게 들린다. 미국에서 'Support our troops'는 군인을 응원할 때 쓰는 말이니까. 어떤 troop은 쿠키를 팔고, 어떤 troop은… 훨씬 무거운 걸 든다. 일단 그날 내 앞에 서 있던 troop은 쿠키를 파는 쪽이었다.


걸스카우트 쿠키(girl scout cookies). 말 그대로 걸스카우트 단원들이 파는 쿠키다. 100년 넘게 이어져 온 미국의 전통이기도 하다. 시작은 1917년 오클라호마. 그땐 집에서 직접 구운 쿠키를 팔던, 홈베이킹 모금 같은 모습이었다.


여기서 내가 그날 쿠키 열 박스를 산 일을 조금만 변명, 아니 설명해 보자면—이 쿠키는 일 년 중 몇 달만 등장하는 일종의 리미티드 에디션이다. 1월부터 3월, 지역에 따라 4월까지. 쿠키에도 제철이 있는 나라다.


이 앞에서 어른들은 대체로 패배한다. ⓒ Girl Scouts of NYPENN Pathways


이 시즌이 되면 동네 풍경이 바뀐다. 마트 입구에 접이식 테이블이 나타나고, 건물 로비 한쪽엔 조그만 부스가 선다. 그 안엔 꼬마들이 귀엽게 손을 흔들고 있다.


눈을 마주치면 자동으로 계산하게 된다.

올핸 몇 박스 사지?



계절의 맛, 기억의 맛

어떤 쿠키는 계절을 닮고, 어떤 쿠키는 시간을 닮는다.


걸스카우트 쿠키 라인업을 보면, 이름은 헷갈려도 다 어디서 본 듯한 얼굴들이다. 그중 매년 부동의 1위를 지키는 에이스가 있다.


Thin Mints(씬 민트). 초콜릿 코트를 입은 민트 쿠키. 이 녀석이 전체 판매량의 4분의 1을 혼자 끌고 간다. 거의 실질적 가장이다. 페퍼민트 모카 편에서 이야기했듯이 미국에서 민트는 겨울과 연말을 상징하는 계절의 언어다. 씬 민트도 그 세계관의 연장선에서, 겨울의 끝부터 초봄 사이를 한입에 정리해 버린다.


반대로, 전혀 다른 기질의 쿠키도 있다. Trefoils(트레포일). 숏브레드, 즉 버터 쿠키. 초콜릿도 없고, 캐러멜도 없고, 코코넛도 없다. 대신 가장 긴 시간을 얹었다. 1910년의 레시피를 아직도 쓰는 클래식. 화려한 신상들 사이에서 조용히 말하는 느낌이다.


"In a world of toppings, be butter."
토핑이 넘쳐나는 세상에서, 버터로 남아라.


자본주의 구조 안에서도 한 칸쯤은 홈베이킹의 기억을 남겨두는 것. 미국 비즈니스의 묘한 체면치레라고 해야 할까.


걸스카우트는 매년 신상 쿠키를 선보인다. 올해는 이름도 모험심 넘치는 Exploremore라는 맛이 나왔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신상들은 언제나 씬 민트와 트레포일이라는 두 축을 중심으로 회전한다. 계절을 칠하는 역할은 씬 민트가 담당하고, 라인업 구석에서 시간을 붙잡고 있는 건 트레포일이다.


한쪽에서는 계절의 맛이, 다른 한쪽에서는 기억의 맛이 양 축을 지키고 있다.



자본주의 튜토리얼


본부의 설명에 따르면, 걸스카우트 쿠키 판매는 '리더십과 기업가정신 교육 프로그램'이다. 목표 설정, 판매 전략, 고객 설득, 거절 경험. 경제 교재에 나올 법한 항목들이다. 말하자면 자본주의 튜토리얼 1단계다.


한국에서라면 이런 내용을 경제 교재의 한 단원으로 묶었을지도 모른다. 미국은 다르게 한다. 설명하지 않고, 먼저 세워둔다. 책상 대신 거리 위에. 그런데 이 튜토리얼엔 전제 조건이 있다.


아이를 거리 한복판에 세워도 안전하다는 믿음.
그리고 그 믿음을 가능하게 하는 인프라.


누군가에겐 경제 교육,

누군가에겐 그 장면 자체가 사치다.



인프라가 구워낸 장면

각자 다른 모퉁이에서 팔아도 시나리오는 하나로 짜여 있다.


이 시즌이 100년 넘게 이어지는 건 쿠키 맛보다 구조 덕분이다. 겉으로는 동네 행사지만 안쪽은 정교하다. 지역 troop은 흩어져 움직이고, 각자의 거리에서 판매한다. 하지만 가격과 제품, 시즌의 타이밍은 본부가 쥐고 있다.


그래서 이 쿠키는 마트 입구에서 사 먹는 간식이면서, 전국이 동시에 기억하는 장면이 된다.


이 구조는 대기업도 쉽게 흉내 낼 수 없다. 한정판은 만들 수 있다. 광고로 '시즌'도 만들 수 있다. 하지만 동네 아이가 직접 팔러 오는 장면은 못 만든다. 그건 제품이 아니라 기억의 형태니까.


대륙을 커버하는 공급망과
전국을 한 브랜드로 묶는 조직력,
아이의 방문 판매가 가능한 안전.

그리고 그 모든 걸 '기업가 정신'이라는 말로 포장해 주는 자본주의 감각까지.


이건 미국이라는 나라에 허용된 인프라가 만든 기억이다. 지구 반대편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든 시즌은 제시간에 온다. 그리고 그 장면은 해마다 다시 구워진다.



귀여움이 결제를 부른다

beep! 흥정 금지 구역. @gsmidtn, Instagram


그 장면의 중심에 늘 등장하는 영업사원이 있다.

아주 작은... 그러나 아주 강력한 판매 인력.


걸스카우트 쿠키는 가장 순한 얼굴을 한 세일즈 채널이다. 기업 입장에서 이 채널은 지나치게 매력적이다. 감정 버튼을 콕! 하고 정확히 누르기 때문이다.


시즌 한정 귀여움,

"우리 애 목표 채워야 하는데요..."라는 한 마디,

거절하기 어려운 사회적 분위기.

저절로 결제를 부르는 조합이다.


걸스카우트는 비영리 조직이지만, 쿠키를 생산하는 건 거대 제과업체다. 라이선스 협업도 아주 바쁘다. 기업은 이 상징 자산으로 한정판을 만들고, 걸스카우트는 아이들의 '판매 경험'을 유지한다.


자본주의에서 서로 이득이면, 알아서 전통이 된다.






스와이프한 뉴스가 쿠키 맛을 데려오다니.


어쩌면 이런 게 진짜 미국맛일지 모른다.

미국이라서 가능한 맛이니까.


지구 반대편에선 경보음이 일상을 덮을 때도,

troop 배지를 단 아이들이 초인종을 누르며

계절을 알리는 나라.


동심과 계산을 한 상자에 담아 파는 나라가

100년 넘게 구워온 자본주의의 맛.





그럼에도 너무 얄밉게 귀여워서,

모른 척 그 안락한 모순 속에 머물고 싶어지는 맛.


그날 나는 그 맛을 열 박스 샀다.

그만큼의 모순도 함께.






※ 참고한 자료 및 사진 출처

[Wikipedia] Girl Scout Cookies

[History] The Girl Scout Cookie

[syracuse.com] Last chance to buy Girl Scout Cookies local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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