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히 빛나던 너를 기억하며
머리를 감고 말리던 저녁,
익숙한 공간의 낯선 구석에서
한참이나 잊고 지냈던 알 수 없는 졸업앨범이 빼꼼히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별생각 없이 펼쳐든 앨범 속에서
한 장면에 오래 시선이 머물렀다.
수많은 웃음들 사이,
조용히 환하게 웃고 있는 '박용하.'
시간은 어쩌면 잊혀지는 게 아니라,
이렇게 어딘가에 조용히 쌓여 있다가
어느 날 불쑥, 마음을 툭하고 건드리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내가 다녔던 광성고는
기독교 정신을 바탕으로 예배와 종소리가 익숙했던 학교였다.
"ooo가 우리 학교 나왔다더라?"
사람들을 만나다 보면 종종 유명인들이 꼭 한 명씩은 동문이란 이야기를 들어봤다.
졸업 후 알게 되었지만,
우리 학교에도 몇몇의 스타들을 세상 밖으로 내보냈다.
가수 이문세 선배님, 한해 선배였던 배우 홍경인, 그리고...
우리 반, 바로 내 뒷자리에 앉아 있던 박용하.
1994년.
모두가 '역대급 더위'라 입을 모았던 그 해 여름,
우리는 고등학교 2학년, 같은 반 친구였다.
나는 4 분단 앞에서 3번째 줄, 용하는 그 바로 뒤, 4번째 줄.
내 짝은 명준이, 용하의 짝은 광수.
그렇게 우리는 수업 사이사이, 쉬는 시간 틈틈이 장난치고 웃으며 지냈다.
그 무렵에도 이미 용하는 방송 활동을 시작하고 있었다.
MBC '테마극장'이라는 프로그램에서 얼굴을 알리기 시작했고,
종종 수업을 마치지 못한 채 촬영으로 인해 먼저 하교하는 날도 많았다.
그럼에도, 교복을 입고 앉아 있던 그는
'연예인'이라는 단어보단 그저 조금 수줍고, 말수가 적은 평범한 소년에 가까웠다.
다음 날이면, 그를 둘러싼 질문 공세가 이어졌다.
"야, 너 이번에 누구랑 찍었어?"
"무슨 역할이야?"
"연예인 실제로 보니까 어때?"
이미 그는 연예인이었지만, 우리에겐 그저 같은 교복을 입고
스포츠머리 대신 약간 긴 머리를 허락받은, 조금 특별한 친구일 뿐이었다.
광성고의 설립 100주년을 맞은 해.
그 해의 축제는 내게 특별했다.
나는 밴드부 보컬이었고, 용하는 베이시스트였다.
대중은 잘 모르지만, 용하는 베이스 연주에 꽤 진심이었고, 수준도 뛰어났다.
우리는 한 달 가까이 학교의 허름한 창고에서 연습을 했다.
연습이 끝나면 매점에 들러 야채 코로케빵 하나를 나눠 먹으며
미래의 꿈, 음악, 그리고 별것 아닌 이야기들로 조용히 웃음을 나눴다.
한 번은 내가 고음이 잘 안 나온다고 하자, 용하가 말했다.
"고음을 올릴 땐 그냥... 로켓처럼.
그 느낌으로 올라가 봐.
폭발적으로 치고 올라가는, 그런 거 있잖아."
"로켓이 어떻게 폭발하면서 올라가는데?"
"... 그건 나도 잘 모르지."
그리고는 둘 다 깔깔대며 한참을 웃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정확한 기술을 말해주려는 것보다
어딘가에서 귀동냥으로 들은 말을 문득 내게 건넸던 건데, 그 마음이 재미있고 고마웠다.
음악을 함께 나누던 시간.
그건 내 고등학교 시절에서 가장 따뜻했던 기억 중 하나다.
축제 당일날, 소식을 듣고 주변 여학교를 비롯해 많은 학교에서 찾아왔다.
공연 중간중간 무대 위로 꽃다발이 날아들었다.
밴드의 꽃이라 불리는 보컬인 나보다 베이스를 맡았던 용하에게
더 많은 꽃이 던져졌다.
모두가 그가 연예인이기 때문이라 했지만,
그날 나는 그가 가진 조용한 빛을
사람들이 알아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란스럽지 않게, 유난스럽지 않게,
그는 그렇게 스스로를 빛내고 있었다.
3학년이 되고 서로 다른 반이 되면서
우리의 거리는 조금씩 멀어졌다.
용하는 촬영으로 학교에 나오는 날이 드물었고,
졸업 즈음에는 그의 얼굴을 학교에서 거의 보지 못했다.
우리는 어설프게 졸업했고, 그 후로는 텔레비전 속에서
점점 더 유명해지는 그의 얼굴을 지켜봤다. 일일 드라마에 출연하면서
어머님들께 사랑을 독차지하더니, 드디어 공전의 히트작인 '겨울연가.'
'겨울연가'는 단지 드라마가 아니라,
박용하라는 이름을 한류의 중심에 올려놓은 작품이었다.
그 시절 많은 이들이 그를 '욘하짱'이라 불렀다.
나는 조용히 뿌듯했다.
누구에게도 말하진 않았지만
그의 웃음과 조언을 곁에서 지켜본 친구로서
왠지 모를 자랑스러움이 마음 한구석을 채우곤 했다.
그로부터 한참이 지난 몇 해 뒤,
지금은 사라진 서울 용산의 전자상가에서
멀리서 그를 본 적이 있었다.
그날 그는 그 당시 연인이었던 Y 씨와 함께였다.
나는 잠깐 그를 부를까 망설였지만,
너무 많은 시간이 흘렀기에
그가 날 기억하지 못할까 두려웠다.
그래서 그저, 조용히 멀리서 바라만 봤다.
그것만으로도,
그리운 시간을 잠시 마주한 것 같아 충분했다.
2010년.
운전할 때면 버릇처럼 켜둔 차 안에서 들려온 라디오 뉴스.
믿기지 않는 소식이었다.
박용하가...
세상을 떠났다는.
순간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정적이 흘렀고, 생각도 감정도 얼어붙은 채
그날은 그렇게 멍하게 지나갔다.
뒤늦게 간간히 용하의 소식을 듣고 있던 또 다른 친구에게 들은 이야기들은 겉으로 보이는 화려함과는 달랐다. 일에 대한 중압감, 사적인 고통,
그리고 오랜 시간 아버지의 병간호를 하며 겪었던 지독한 외로움.
모두가 그를 천천히 지치게 만들었다고 했다.
오늘, 오랜만에 꺼낸 졸업앨범 한 귀퉁이에서
조용히 웃고 있는 용하를 마주하고, 잊고 지냈던 기억 하나가
가슴 깊이 다가왔다.
이제는 말하지 못할 친구.
이름만 불러도 아련한 그 시절의 누군가.
그곳에선 부디, 모든 걸 내려놓고 다시 그때처럼 고로케빵 하나 나눠먹으며
소소한 이야기들로 깔깔 웃고 있기를.
박용하, 그 이름 하나로 따뜻해지던 시절.
그 시절의 우리 모두를 기억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