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웬만해선 우리를 막을 수 없다

거침없이... 떨어져 살기로 했다

by GOLDRAGON

'순풍산부인과', '웬만해선 그들을 막을 수 없다', '거침없이 하이킥'.
한 시대를 풍미한 시트콤들은 대부분 비슷한 모습을 공유하고 있었다.
형제와 자매, 사위와 며느리, 그리고 부모까지 함께 혹은 가까운 거리에 모여 사는, 지금은 흔치 않은 대가족의 모습이었다.

거실에서 울려 퍼지는 웃음소리, 때론 갈등이지만 결국은 정으로 풀어가는 이야기들.
그런 화면을 바라보며, 언젠가 우리도 저런 모습으로 살아가면 어떨까 상상한 적이 있다.
알콩달콩하고 북적이는 일상이 로망이었던 시절이었다.


실제로도 우리 삼 남매는 부모님의 오래된 다세대주택에 함께 살아보자는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말뿐이었다.
각자의 일상은 이미 삶의 방향을 굳혀가고 있었고, 무엇보다도 부모님은 "이젠 우리도 자유롭게 살고 싶다"는 바람이 완고하셨다.

그렇게 세월은 흘렀고, 그 이야기는 아주 가끔, 추억처럼 스쳐갔다.
그저 웃으며 지나가는, 실현되지 못한 상상이었을 뿐이다.

그 무렵, 몇 달 전쯤이었을까. 인천에 살던 큰누나 가족이 부모님 아랫집으로 이사를 온다는 소식을 들었다.

처음에는 잠깐 의아했다. 하지만 이내 고개가 끄덕여졌다.

연로해지고, 잔병치레가 잦아진 부모님을 가까이에서 돌보고, 혹시 모를 위급한 순간에 바로 달려올 수 있는 거리. 부모님에게도, 누나에게도 충분한 이유였다.

아들보다는 딸이, 며느리보다는 사위가 오히려 더 편할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도, 마음 한켠이 묘하게 서운했다.

이야기를 들었을 땐 이미 이사 날짜까지 정해진 후였고, 그전까지 부모님과 누나 사이에 어떤 대화가 오갔는지 나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문득,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혼자 소외된 사람처럼 느껴졌던 것 같다.

그보다 더 마음에 남았던 건, 작년 어느 날 내가 어머니께 무심코 건넨 말 때문이었다.
"나, 우리 식구... 엄마 아래층으로 들어가면 어떨까."
그 말에 어머니는 단호하게 말했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라."

그 한마디가 이상하게도 서운하게 오래 맴돌았다.
내가 꺼낸 말의 진심은 들여다보지도 않은 채, 그저 '쓸데없는 소리'로 치부 되어진 순간이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면, 그건 단순한 거절이 아니라
"너는 네 가정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어른으로서의 마음이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서운했지만, 그 결정이 결국 부모님을 위한 가장 현실적인 선택이었음을 이제는 안다.


이번 추석, 오랜만에 가족 모두가 부모님 댁에 모였다.
사촌형 부부까지 함께해 정말 앉을자리가 부족할 만큼 북적였다.
조카들조차 이제는 아이가 아닌 '성인'이 되어, 한 자리씩을 차지한다.

시끌벅적함 속에서, 어릴 적 우리가 상상했던 그 시트콤의 한 장면이
살짝 겹쳐 보였다.
사소한 농담 하나에도 웃음이 터지고, 누가 뭘 해도 서운하지 않은, 그런 따뜻한 저녁이었다.

식사를 마친 뒤, 부모님을 제외한 우리만의 2차가 이사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이젠 누나네 집인 아래층에서 이어졌다. 그 순간, 나는 혼자 생각했다.
'혹시 우리 가족과 작은누나네도 이 아래층으로 이사 와서... 우리 모두 가까이 살아보면 어떨까?'

그럼, 시트콤처럼 지금보다 행복하고 재미있게 살 수 있을까?

그러나 집으로 돌아오는 길, 차 안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며 이내 결론을 내렸다.

아니, 아닐 거야. 현실은 시트콤이 아니니까.

시트콤엔 대본이 있다. 갈등도, 화해도, 눈물도 결국에는 웃음으로 돌아갈 엔딩이 준비돼 있다.
하지만 현실의 삶에는 대본이 없다.
매일이 예측할 수 없는 전개고, 때로는 누구의 잘못도 없이 서로를 오해하고 상처를 남기기도 한다.

그래도 가족이 있다는 건, 이런 불완전한 현실 속에서도 기댈 수 있는 어깨 하나쯤은 있다는 뜻 아닐까.

그래서 지금처럼, 각자의 자리를 지키며 살아가다가 이따금 특별한 날에 모여 서로를 반갑게 맞이하고, 안부를 묻는 이 거리가 오히려 가장 이상적인 거리인지도 모르겠다.


내가 느꼈던 서운함도, 작은 시기도 결국엔 이 따뜻한 그림을 위해 거쳐야 했던 감정일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이 선택과 모습이 우리 가족 모두에게 가장 건강하고 균형 잡힌 방식이길 바란다.

그리고... 언젠가 정말로 우리 삼 남매가 '시트콤 같은 삶'을 살아보게 될 날이 찾아온다면, 그건 인생이 준비한 또 다른 에피소드일 테다.

그날이 오기 전까지는, 이 반가움과 웃음들을 잠시 간헐적으로 묻어두자.

언젠가 모두 함께 [웬만해선 우리들을 막을 수 없을] 그 순간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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