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붙잡기 위해 글을 쓰다
몇 달 전, 글쓰기를 시작하며 나 자신에 대해 밝힌 적이 있다.
그중 하나는 내가 지닌 '기억력'이었다.
남들이 잊어버린 오래 전의 장면까지도 또렷이 떠올려 다시 살아나듯 이야기하곤 했다.
그 능력은 내 삶의 장점이자 자부심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그 기억력이 급격히 쇠퇴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피곤해서겠거니, 나이가 들어서겠거니 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납득이 가지 않았다.
그러기에는 아직 이르다고 생각했으니까.
6년 전 종합건강검진을 받던 날이 떠올랐다.
그때까진 뇌 검사를 해본 적이 없었는데, 우연히 검사 항목이 바뀌어 처음으로 뇌를 촬영하게 되었다.
결과는 뜻밖이었다.
정상적인 뇌는 양쪽이 모두 선명히 보이지만, 내 뇌는 한쪽만 뚜렷했고 다른 한쪽은 새까맣게 보이지 않았다.
주치의는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이런 사진은 정말 드뭅니다. 보통은 응급 상황에서나 이런 결과가 나옵니다."
뇌로 가는 혈관이 한쪽에서만 공급되고, 다른 한쪽은 막혀 있다는 것이다.
그 말을 들으며 머릿속이 하얘졌다.
"그런데 저는 멀쩡한데요?"
"그래서 더 놀랍습니다. 천운이죠."
그 길로 나는 입원해 [뇌혈관 조영술]을 받게 되었다.
대퇴부 혈관을 통해 카테터를 넣어 뇌 속 혈류의 흐름을 보는 시술이었다.
바늘 공포증이 있는 나에게는 악몽 같았지만, '뇌'라는 단어 앞에서 겁을 낼 여유는 없었다.
결과는 분명했다.
내 한쪽 뇌의 굵은 혈관은 완전히 막혀 있었고, 대신 여러 개의 가늘고 얇은 혈관들이 비정상적으로 우회하며 혈류를 운반하고 있었다.
주치의는 그것을 '고속도로 대신 국도로 달리는 피'라고 표현했다.
만약 그 국도 중 하나라도 막혔다면, 나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고 했다.
그날 이후, 나는 담배를 끊었다.
의사의 강력한 권고도 있었지만, 그보다 더 확실한 이유는 '생명'이었다. 담배가 혈관 막힘의 메인원인 이라 했다. 그전까지 수십 번의 금연 시도는 번번이 실패로 끝났지만, 이번엔 단 한 번에 끊었다.
금단 증상도 없었고 담배냄새가 나는 근처에도 가기 싫어졌다.
누가 옆에서 뭐라 해서 되는 일이 아니라, '안 끊으면 죽는다'는 말을 들으면 담배는 자연스럽게 멀어지는 법이다.
그렇게 나는 지금까지 뇌혈류를 원활히 하기 위한 여러 종류의 약을 복용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요즘 들어 다시 고민이 깊어진다.
예전처럼 또렷하던 기억이 희미해지고, 방금 하려던 말이나 행동이 하얗게 지워지는 일이 잦아졌다.
며칠이 지나서야 그 생각이 떠오를 때면, 섬뜩할 정도로 두렵다.
혹시 조기 '치매'가 아닐까, 젊은 '알츠하이머'가 시작된 건 아닐까.
예전에 봤던 영화〈내 머릿속의 지우개〉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사랑하는 이를 하루가 지나면 기억하지 못해, 매일 비디오카메라로 그날의 추억을 남기던 장면.
그 장면을 내 현실에 겹쳐보는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다.
누군가 말했다.
"죽음의 이별보다, 살아 있는 상태에서의 잊혀짐이 더 아프다."
그 말이 요즘처럼 가슴 깊이 와닿았던 적은 없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부지런히 뇌를 쉬게 두지 않으려 한다.
뇌에 좋다는 영상을 찾아보고, 뇌 영양제를 챙겨 먹으며 스스로를 관리한다.
혹시 모를 그 '지우개'가 내 머릿속 어딘가에 심어지기 전에,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추억을 더 많이 남기려 한다. 기억은 사라질 수 있다.
하지만 그 기억을 담으려는 의지만은 잊히지 않기를 바란다.
오늘의 나는 그렇게 또 한 조각의 기억을 남긴다.
언젠가 이 글을 잊는다 해도, 이 글을 썼던 나의 마음만은...
영원히 남아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