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열정과 행동 사이

by 스베틀라나

저는 하고 싶은 일도, 꿈도 많고 열정이 넘치는 사람입니다. 단, 오로지 제 머릿속에서 만요.


썩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나쁘지도 않은, 어제와 별 다를 바 없는 하루를 마무리하기 위해 침대에 누워 스마트폰을 꺼내듭니다. 그리고 의미 없이 유튜브 영상을 보거나 게임을 하다 보면, 아까 전 까지는 있지도 않았던 기묘한 열정들이 마음속에서 스멀스멀 피어오릅니다.


그다지 대단한 내용들은 아니에요.


'브런치북을 하나 새로 만들어서 연재를 시작할까?'

'갑자기 식단관리를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일주일에 1kg씩 팍팍 빼버릴까?'

'느리게 달리기를 해보는 것도 좋을 듯.'

'웹소설 미뤄둔 걸 다시 써야겠어. 장편이라 힘들겠지만 못 할 건 없지.'

'2025년도 하반기에 들어섰는데 당장 내일 대청소를 하자.'

'옷도 다시 싹 갈자.'

'언어공부를 하는 거야. 학원을 알아봐야지.'


이 외에도 한동안 교류가 없었던 사람들에게 다시 연락을 하거나, 예전에 한창 즐겼던 댄스스포츠를 다시 시작하고, 그림 그리기를 배우겠다는 등의 것들이지요. 어쨌든 한 번 생각의 나래를 펼치기 시작한 이상 오늘도 편하게 잠자기는 글렀습니다. 온갖 상상의 나래와 계획을 펼친다고 뇌가 정신을 차리거든요.


참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습니다. 해가 중천에 떠 있을 때는 아무리 눈을 닦고 보아도 찾을 길 없던 열정들이, 정작 마음을 진정시키고 하루를 마무리하려는 순간 튀어나온다는 점이 말이에요. 무슨 갯벌 속 자그마한 게들을 보는 기분입니다. 평소에는 뻘 속에 몸을 숨기고 있다가, 물이 다 빠지면 슬그머니 눈을 빼꼼히 드러내는, 작고 이름 모를 게들 말이죠.


솔직히 전 이 상태(?)가 그다지 마음에 들진 않습니다. 대뜸 잠을 방해할 정도로 솟아나는 이 열정들이, 사실은 오늘 하루를 제대로, 의미 있게 보내지 못했다는 죄책감과 자기혐오의 감정에서 비롯된 것 같거든요. 이번에도 나는 성과를 내지 못했으니 내일은 반드시 뭐라도 해내야 한다는 압박감과 조급함이, 과도한 열정의 기저에 깔려 있지 않나 싶습니다.


... 뭐, 이래 봤자 결국 그다음 날이면 신기할 정도로 열정이 사라지길 반복하지만요.




예전에 인터넷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의 짧은 댓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정확히 누구였는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어떤 유명한 작가의 일화였어요. 해당 작가 왈, 자신의 열정은 작품의 전개와 설정 등을 고민할 때 가장 뜨겁게 불타오른다고 합니다. 그러나 막상 작품의 집필에 들어서면 처음과 같은 열정은 줄어들고 즐거움도 점차 줄어든다고 해요. 워낙 오래전에 스쳐 지나가듯 읽은 댓글이라 정확히 기억하고 있을진 모르겠지만, 대강 저런 뉘앙스였던 것 같습니다.


제 상황에 온전히 들어맞는 예시는 아니지만, 저도 조금은 공감이 되더군요. 글쓰기는 물론 일상의 작은 일조차도, 머릿속에서 계획을 세우고 구성할 때는 참 재밌고 쉽습니다. 하지만 이를 실천하는 것은 지치고, 힘든 데다가, 무엇보다 무서워요! 눈앞에 놓인 길 위에 한 발자국 올리는 게 보통 스트레스가 아니란 말이죠. 정말 어렵지 않은 사소한 일도 말이에요.


그러니 자연스럽게 일을 미루게 될뿐더러, 어찌어찌 시작을 하더라도 도망치고 싶어요. 이 일을 해서는 안 되는 여러 가지 이유들을 잔뜩 늘여놓으면서 열심히 자기 합리화를 해요. 아니면 다른 사람이나 환경적 요인에 책임을 전가하고요. 하지만 제 자신도 잘 알고 있습니다. 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다는 점을. 피하면 피할수록 우울해지고, 자존감은 하락하며, 무엇보다 오늘 밤에 다시 진흙을 뚫고 손톱만 한 게들이 튀어나온다는 것을요.


스스로가 생각해도 좀 웃겨요. 그렇게 글을 쓰고 싶다고 외치면서, 막상 키보드 위에 손가락을 얹으면 갑자기 집안일을 하고 싶습니다. 아니면 돈을 벌기 위한 다른 이들을 하거나 생뚱맞게 공부를 하고 싶어요. 그래서 특강이나 재미있는 강의 없나 찾아보고, 정신 차려보면 이미 신청을 해버립니다. 하지만 막상 강의날이 되면? '세상에, 내 컴퓨터 하드 속에 이렇게나 아름답고 뛰어난 글들이 잠자고 있는데 여기서 이런 거나 듣고 있을 때가 아니라고! 얼른 글을 써야 돼.' 이런 생각이 마구마구 솟아오릅니다. 강의를 째야만 할 것 같아요. 그리고 글을 쓰려고 노트북을 키는 순간? 네, 앞의 일들이 반복되는 거죠.

글쓰기 안에서도 이런 순간들은 매번 찾아와요. 소설을 쓸 때는, 역시 소설은 저랑 안 맞고, 그냥 에세이나 써야겠다 싶습니다. 그래서 에세이를 쓴다면, 갑자기 난 소설을 쓰기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느껴져요. 소설 속 인물들이 자신을 그냥 버려두지 말라고 애처롭게 울부짖는 것 같아요. 적어도 내 소설 속 주인공들에게 죽이 되든 밥이 되든 결말은 내줘야 한다는 의무감마저 생겨요. 그래서 소설 파일을 다시 열어보면, 역시나 나는 에세이를 쓰기 위한 사람이다, 라며 스스로의 역할을 손바닥 뒤집듯이 바꿔버리죠. 이러면서 살고 있습니다.


무엇이 문제일까요? 태어나길 선천적으로 게으르게 태어나서 어쩔 수 없는 것일까요? 만약 그런 거라면 좀 슬플 것 같네요. 나란 사람이 근본부터 나무늘보는 아닐 거라고 일단 전제한 뒤, 원인에 대해서 고민해 봅니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완벽주의예요. 게으른 완벽주의자라는 말, 누가 생각해 냈는지 참 칭찬해주고 싶습니다. 사실 저는 완벽주의자라기보단 완벽주의자가 되고 싶어 하는 기질을 가진 사람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어요. 완벽한 완벽주의자가 되기엔 워낙 덜렁거리는 데다 놓치는 게 많은 성격이라서요. 어쨌든 완벽주의에 대한 환상과 압박이 있는 탓인지, 현실이 여러모로 부담됩니다. 머릿속으로는 얼마든지 멋있고 훌륭하게 작업을 수행할 수 있지만 실제로는 아주 힘들잖아요. 아니 오히려 엉망이 되고, 원하는 대로 풀리지 않는 데다가, 마음이 아픈 결과물마저 탄생할 테고요. 그런 상황을 겪고 싶은 사람은 없을 거예요.


생각이 많아도 너무 많은 점 역시, 제 머릿속 망상과 생각들이 실질적인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게 방해하는 것 같아요. 한창 어린 시절에는 생각이 많다는 점이 어른스럽고, 똑똑한 것 같아서 스스로도 제법 마음에 들었어요. 하지만 과유불급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듯, 제 자신의 건설적인 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는 생각은 안 하느니만 못하죠. 그런 점을 보았을 때 저는 쓸데없는 걱정, 여러 가지 의미 부여 등을 비롯해, 나를 못 움직이게 하는 생각들을 늘 달고 살았던 것 같아요. (진짜 징글징글하네요!) 삶의 의미보다도 삶 자체를 더 사랑하라던 도스토예프스키의 명언을 다시 한번 마음속에 새겨야 할 것 같습니다.



글을 쓰다 보니 갑자기 예전에 상담사 한 분이 해주신 말씀이 떠오릅니다. 결국은 바라보는 시선이 중요한 것이라고. 특정 상황에 대해 부정적이고 나를 가로막는 악순환의 증거를 찾기보다는 스스로에게 유익한 선순환의 흐름을 찾아내보라고요. 그리고 저란 사람은 분명 그렇게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요.


무척 힘이 되고 마음에 와닿는 내용이라 따로 적어놓고, 지금도 종종 들여다보고는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상담사분의 조언대로 사는 것은 쉽지 않아요. 하긴, 그분도 제가 한 번에 바뀔 거라는 꿈(?)은 버리라고 단호하게 말씀하셨죠.


어쨌든! 다시 한번 궁금해집니다. 과연 저는 머릿속에서만 열정이 넘치는 사람이 아닌, 실생활에서도 에너지가 넘치고 움직이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아니, 어쩌면 이런 소망을 품는 것 자체가, 또다시 행동을 못하게 하고 스스로를 옭아매는 제약이 되고 있는 게 아닐까요? 제 부족함과 의지박약을 인정하기보다는, MUST라는 단어를 들이대면서 '넌 왜 못해'라고 꾸짖는 게 오히려 역효과를 일으키는 것일지도 모르지요. 그게 곧 완벽주의일 수 있잖아요.


속으로 품고만 있기엔 답답한 마음, 글로 대강이라도 풀어쓰면 답이 나오지 않을까 해서 시작한 이번 글. 그렇지만 오히려 새로운 의문을 얻어간 기분이네요. 그래도 오늘 밤은 어제보다는 조금 더 편안하게 잘 수 있을 것 같단 생각은 듭니다. 다행이죠!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