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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쓸 소재가 없어서 고민이라는 내용의 글

약간의 독후감도 포함된

by 스베틀라나

POD 에세이 출간을 위해 고군분투하던 올해 상반기, 나는 꼭지글 소재를 찾기 위해 하루에도 수차례씩 머리를 싸맸다. 에세이 주제를 뾰족하게 정해놓지 않은 대가였다. 다른 분들처럼 육아, 여행, 혹은 취미 등 어떤 글을 쓸지 명확하게 방향성을 잡았어야 했건만, 나는 특유의 우유부단함과 '어떻게든 되겠지.'라는 안이한 태도로 '일상과 감성을 다룬, 날 위해서 쓰는 에세이'라는 두리뭉실한 컨셉을 택했다. 그 당시 열심히 읽고, 또 읽었던 근원 김용준의 <근원수필>에 크게 감명을 받은 것도 내 어리석은 도전에 한몫했다. 예술에 대한 소견부터 일상의 사소한 일까지,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소재들이 유려한 필체의 옷을 입고 한 권의 책으로 엮이는 것을 보며, 나 역시 어떤 소재로도 나름의 이야기를 써 내려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었던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진짜 건방지기 짝이 없는 판단이었지만.


'이런 글감으로 글을 써볼까?'라는 생각과 실제로 그 글감을 활용해 글을 쓰는 것은 전혀 별개의 일이었다. A라는 소재에 대해 할 말이 가득하다고 믿었지만, 정작 키보드 위에 손가락을 올리는 순간 쓸 내용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깨닫는 일도 부지기수였다. 한두 번도 아니고 이런 일을 여러 번 겪고 나니, 슬슬 등에는 식은땀이 흐르고 심장은 초조함으로 바들바들 떨었다. 데드라인은 다가오고, 주어진 분량은 무조건 채워야 한다. 그런데 뭐에 대해 써야 할지 모르겠다. 결국 나는 생존(?)을 위해, 나를 둘러싼 모든 환경에 의미를 부여하면서 글감을 찾아 헤매야만 했다.


광활한 풀밭에서 자연산 네 잎 클로버를 찾기 위해 코를 박고 땅만 보는 사람처럼, 나는 평범하고 특징 없는 일상에서 그나마 몇 줄이라도 적어 내려 갈 만한 소재를 찾기 위해 매일 고민하고 고민했다. 길을 걷다가 우연히 마주한 정체 모를 새, 지겹도록 듣던 노래, 지금 지나치면 다시는 보지 못할 낯선 이들까지. 지난 십여 년 간 경험하지 못했던 집중력을 발휘해 - 뻔하고 상투적인 표현이지만 - 평소라면 무심코 지나갔을 것들을 억지로 글감으로 설정했다. 그렇다고 그것들에 대해 내가 무슨 말을 할지 생각해 놓은 것도 전혀 없다 보니, 앞이 보이지 않는 건 여전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내 뇌세포의 주리를 틀어가면서 억지로 문장들을 짜내는 게 전부였다. 다행인 건 그렇게 한 문장, 한 문장 간신히 뽑다 보면 가끔씩은 나름대로 그럴듯한 전개에 대한 영감을 받을 수 있다는 점이었다.


뭐 결과적으로, 비록 네 잎 클로버 대신 평범한 잡초들의 모임이라 하더라도, 일단 책은 완성할 수 있었다. 그리고 사소한 소재에 대해서 열심히 의미를 부여하고 글을 만들어낸 내 노고에 대해서는 나름대로 칭찬해주고 싶다. 하지만 지금도 여전히 글을 쓸 소재를 찾는 것은 정말 쉽지 않다. 일주일에 한 번씩 무조건 브런치 글을 쓰려고 노력하던 몇 달 전에도 이 고민은 그대로였다. 글을 써야 하는데 뭘 써야 할지 모른다고나 할까. 결국 할 말이 없어져서 할 말이 없다는 내용으로 글을 쓰게 되었으니, 사실 지금 이 글도 그런 종류가 아닌가 싶다.


내가 구독하는 브런치 작가분 중 페르세우스라는 작가분이 계신다. 그분은 직장도 있고 자녀의 육아에도 전념하시는데도 불구하고, 다양한 소재의 글을 매일매일 꾸준히 발행하신다. 글 퀄리티도 감히 나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나고 전문성이 느껴진다. 그 초인적인 모습, 그중에서도 끊이지 않고 글이 나오는 그 능력을 정말 닮고 싶을 뿐이다.


신기하다. 억지로라도 글을 써야만 하는 상황에선 어떻게든 뭐라도 쓸 것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강제성이 부재한, 오롯이 나란 사람의 의지에만 기대서 글을 쓰는 지금은 아무리 AI가 그럴듯한 글감을 던져줘도 도저히 쓸 내용이 없다. 무엇에 관해 써야 할지, 어떠한 말을 해야 할지 전부 모르겠다. 그새 뇌가 일하기를 멈춘 건가.




위의 내용까지 쓰고서 며칠간 또 글을 방치했다. 더 이상 어떻게 이어가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어제 시간 좀 죽일 겸 생택쥐베리의 <야간비행>이라는 책을 읽었고 나름(?)의 깨달음 비슷한 것을 얻어서 이어 적는다.


우선 책 자체는 마음에 들지도 안 들지도 않은 애매한 상태로 남았다. 이해가 될 것 같으면서도 납득은 되지도 않고, 감이 잡히지 않는다고나 할까. 그래서 한 번은 더 읽어볼 생각이다. 다만 소설에 대한 내 평가와는 별개로 작품의 진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리비에르' (맞나? 사실 그새 이름을 까먹은 것 같다)라는 인물의 모습은 인상적이었다.


그는 남들이 다 반대하는 야간비행을 강행하고, 그 과정에서 조종사와 직원들에게 엄격한, 때로는 혹독하기까지 한 임무들을 요구한다. 인간적인 입장이나 현대의 시점에서 볼 때는 좀 과하다 싶은 경우도 있지만, 이런 리비에르의 철두철미함 덕분에 조종사들은 내적으로 강해지고 단련되며, 야간비행은 계속된다. 그런 점을 보고 있다 보면 때로는, 좀 거친 표현이긴 하다만, '까라면 까.'라는 식으로 무작정 덤벼들 필요가 있지 않을까, 란 생각이 든다.


지금 떠올려보면 두 달 만에 원고 작성부터 디자인까지 전부 다 해결해야 하는, 가히 살인적이고 비현실적인 조건 하에서도 한 명의 낙오자도 없이 책을 만들 수 있었던 것은 '일단 까라면 까야지.'라는 마음으로 무조건 덤벼들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러니 없는 소재도 어떻게든 찾아내고 그 안에서 억지로 몇천 자의 글을 만들어낸 것이겠지. 현재의 나에게 필요한 것도 그런 마음가짐인 것 같다.


웹소설이던, 브런치던, 뭘 써야 할지 정말 모르겠다. 아니 쓸 말이 너무나도 없다. 하지만, 글을 쓰면서 사는 삶을 살기로 택한 이상, 그냥 무조건 들이박는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날씨가 안 좋고, 몸 상태가 별로여도 한 치 앞이 안 보이는 어둠 속으로 죽음을 무릅쓰고 덤벼드는 야간비행의 조종사들처럼 나 역시 그냥 써 내려갈 수밖에 없는 법이다. 그럴... 것이다.


P.S. 그래도 리비에르 같은 상관은 만나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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