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비유 하나, 나쁜 유혹 하나

저작권의 경계에서 서성이는 창작자들

by 피디아

오늘도 글을 쓰는 나에게, 이런 유혹이 잠시 스친다.


'아, 이거 너무 좋은 비유인데... 표현만 살짝 바꿔서 내가 써먹을까?'

'내 글에 대한 근거가 좀 부족한데? 이 논문, 내용은 좀 다르긴 한데 그냥 대충 인용할까?'


그렇게, 알량한 작가의 자존심이 위태롭게 휘청거린다.

어떻게 보면 현실적이고, 어떻게 보면 옹졸하다.


그런데, 이걸 옹졸하다고 뭉개고 넘어갈 수 있을까?

문득, 나 자신에게 물어보게 되었다.


저작권―법률인가, 윤리인가



얼마 전, '나의 지식은 언제 온전한 내 것이 되는가'에 대한 글을 썼다.

그 글에는 러시아의 문학이론가 바흐친의 '대화이론'이 등장한다.

자연스럽게, 글을 쓰기 위해 대화이론을 찾아 읽었고, 그 내용도 알게 되었다.


간단히 말하면

'모든 발화는 이전 발화에 대한 응답이다.' 이로 인해 발화들 간에는 논리적 상호관계가 형성된다.

다소 난해하게 느껴진다면, '모든 대화는 이전 대화에 대한 응답이다' 정도만 이해하면 된다.


여기서 나는 이런 고민이 생겼다.


'모든 대화가 이전 대화에 대한 응답이라면, 모든 창작 역시 이전 창작에 대한 응답인 것이 아닐까?'



아니다.

현실은 그렇게 순진하거나 녹록지 않다.


특히 법률적으로는 창작과 표절, 영감과 모방 사이에 분명한 경계가 존재한다.

사회적 관점과 윤리적 기준(특히 창작자 내면의 윤리) 역시 세부적으로는 다를지언정

각자 자신만의 명확한 판단 기준을 가지고 있다.



대한민국 법에는 의외로 '표절'이라는 단어는 없다.


대신, 이렇게 명시하고 있다.

[대한민국 헌법 제22조 제2항]
저작자·발명가·과학기술자와 예술가의 권리는 법률로써 보호한다.

즉, 저작자, 발명가, 과학기술자, 예술가의 모든 창작물이 저작권법 보호 대상이다.

그렇다. "모든" 창작물이다.

'범위가 좀... 넓은 거 아냐?' 하는 생각이 머리를 때린다.

(다만, 창작 입증에 대한 현실적 문제로 인해 실제로 '모든' 창작물이 보호의 대상이 되는 것은 아니다.)


저작권법에는 저작권의 보호 대상이 아닌 저작물에 대해 구체적으로 나와있다.


1. 법률, 고시, 심판이나 의결, 시사보도 등
2. 입법·사법·행정상의 필요, 학교교육, 정치적 연설문 등
3. 영리를 목적으로 하지 않는 공연·방송 등


그러나 위의 예외사항을 감안하더라도

우리의 생각보다 저작권의 범위는 깊고, 넓으며, 무서울 정도로 광범위하다.



몇 해 전, 한 대중가수가 발표한 곡이 해외 유명 아티스트의 음악을 무단 샘플링했다는 논란이 있었다. 당시 이 사건은 큰 이슈가 되었고, 회사 간의 분쟁으로 이어졌다. 이 사건은 원작자가 표절이 아니라는 의견을 밝혀 일단락되었고, 법적 분쟁은 피했지만, 창작자의 윤리 의식과 법적 보호의 경계에 대한 많은 논의가 뒤따랐다.


실제로, 무단 샘플링, 법원 판결 등으로 인해 표절이 인정되어 저작권자가 변경되거나,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이 사례들은 창작자의 아이디어가 법적 보호를 받는 동시에, 그 경계를 넘으면 법적 책임을 져야 한다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준다.


팬아트는 특정 작품의 캐릭터나 세계관을 기반으로 팬들이 창작하는 2차 창작물이다. 팬아트 인터넷 커뮤니티나 SNS를 통해 널리 공유되고, 원작자에 대한 애정 표현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하지만 법적으로 팬아트는 원작자의 저작권 보호 대상에 속하기 때문에, 상업적 사용이 이루어지면 저작권 침해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한 팬이 인기 애니메이션 캐릭터의 팬아트를 그려 SNS에 게시하고 좋은 반응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이를 굿즈(스티커, 엽서 등)로 제작해 판매한다면, 원작자의 동의 없이 상업적 용도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엄연히 저작권 침해다.


실제로 디즈니는 매년 전 세계에서 발생하는 불법 팬아트 상업화를 모니터링하며, 무단으로 굿즈를 제작한 경우 법적 대응을 서슴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 인터넷에서는 디즈니의 저작권 관리가 워낙 철저해 '무인도에서 팬아트를 그려도 고소당한다'는 농담이 있을 정도다. 이러한 사례는 팬아트조차 법적 보호의 영 안에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사례들을 통해 우리는 저작권법이 단순히 문서상의 조항이 아니라, 실제로 창작자의 권리를 보호하는 실질적 장치임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창작자 본인이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타인의 아이디어를 넘나드는 순간 법적 책임이 뒤따를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한다.




그래서 이런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제안된 개념이 바로

CCL(Creative Commons License;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이다.


CCL의 취지는 간단히 아래와 같이 요약할 수 있다.

'내 창작물을 공유하고는 싶지만, 너무 엉망진창으로 공유되지는 않았으면 좋겠어. 그래서 이 조건만 지킨다면 사용을 허락할게'

즉, 원저작자가 설정한 조건을 지킨다는 전제 하에, 저작권법이라는 저승사자의 손짓을 피할 수 있는 일종의 인증마크다.


CCL의 주요 요소는 다음과 같다.

1. 출처 표기 (BY): 원저작자를 밝혀야 한다.
2. 영리 조건 (NC): 영리적 목적으로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
3. 변경 조건 (ND/SA): 변경 금지 또는 동일조건 변경 허락.
4. 퍼블릭 도메인 (CC0): 저작권을 주장하지 않고 자유 사용 허락.


사실 인터넷을 조금만 돌아다녀본 사람이라면 CCL을 한 번쯤은 접했을 것이다.

그래서 이게 뭐, 법이라도 되는 걸까?


여기서 의외의 사실 하나.

CCL은 법이 아니다. 비영리단체에서 제안한 개념이다.


... 다만, 다행스럽게도 CCL은 미국 저작권법을 기반으로 개발됐고,

각국의 저작권법에 맞게 현지화되었다.

한국의 경우 '한국정보법학회'에서 번역·검토하여 법적 근거를 마련했다.


즉 CCL은 법적 강제성은 없지만, 저작권법의 현실적인 빈틈을 메워주는 사회적 장치다.


CCL의 역할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CCL은 창작자의 권리를 보호할 뿐만 아니라, 또 다른 창작을 촉진한다.


대표적인 사례로, Unsplash를 들 수 있다.

Unsplash는 전 세계 사진작가들이 자신의 작품을 무료로 공유하는 플랫폼이다. 모든 사진은 CCL의 CC0 라이선스에 따라 누구나 상업적 용도로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다. 덕분에 디자이너, 작가, 개발자들이 저작권 걱정 없이 창작을 확장할 수 있었고, 실제로 Unsplash 이미지를 활용한 수많은 작품들이 탄생했다.


이렇듯, CCL은 창작자를 보호하면서도 창작의 확산을 촉진하는 역할을 한다.

창작물이 갇혀 있지 않고 더 많은 사람에게 닿을 때, 새로운 영감이 태어나고,

그것이 다시 창작으로 이어지는 선순환이 만들어진다.



내면의 윤리는 어떨까?


사실 저작권 의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지만, 동시에 가장 도외시되는 부분이 이 지점이다.

우리는 멋진 사진을 복사하거나 캡처할 때 별다른 거리낌을 느끼지 않는다.

보통은 "이걸로 영리 활동하면 문제 되겠지?" 정도만 신경 쓴다. 그 순간, 내면의 윤리는 잠시 뒷전이다.


그러나, 진짜 중요한 건 그 순간에 느껴야 할 부끄러움이다.


세상 모든 사람이 내 표절을 몰라도, 나 자신만은 그 사실을 알게 된다.

중국 후한시대의 양진은 뇌물을 거절하며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내가 알고, 네가 안다'고 일갈하였다.

설령 하늘과 땅이 모르더라도, 그 누구도 모르게 표절을 숨긴다 해도, 나 자신은 속일 수 없다.



무의식적인 표절은 어떨까?


1971년, 비틀즈의 조지 해리슨은 My Sweet Lord라는 곡을 발표했고, 큰 사랑을 받으며 히트했다. 그러나 몇 년 뒤, 이 곡이 1963년에 발표된 He's So Fine과 지나치게 유사하다는 이유로 표절 소송이 제기되었다. 법원은 조지 해리슨이 He's So Fine을 "무의식적으로(Unconscious Plagiarism)" 베낀 것이라고 판결했다. 조지 해리슨은 이후 "그 멜로디가 머릿속에 떠돌고 있었던 것 같다. 전혀 의식하지 못했다"라고 해명했다.


그러나 이 사건은 해리슨 본인에게 큰 충격으로 남았다. 그는 이후 창작 과정에서 극심한 불안감과 강박에 시달렸고, 이를 '편집증적인 상태'라고 표현할 정도였다. 그 충격은 그의 창작자로서의 자부심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이 사례는 단순히 법적 처벌을 넘어서, 창작자가 스스로 느끼는 윤리적 고통을 보여준다.

아무도 모를 수 있지만, 결국 창작자 자신은 짊어지는 그 무게감이 존재하는 것이다.


만약,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표절과 창작의 모호한 경계선에서 줄타기하고 있었다면,

최소한 그에 대한 자각과 의식, 그리고 원저작물에 대한 솔직한 공개가 있어야 할 것이다.


저작권은 단순히 '남의 것을 훔치지 마라'는 금지가 아니다.

그것은 '내 목소리가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가'를 묻는 양심의 목소리이다.





처음에 대화이론을 언급하며 이야기했다.

'모든 창작 역시 이전 창작에 대한 응답인 것이 아닐까?'

마냥 허무맹랑한 말은 아닐 수도 있다.

완전하게 독창적인 순수한 창작은 생각보다 많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그 영감을 준 '이전 창작'에 대한 존중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것은 단순히 표절이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닌 저작권에 대한 근본적인 윤리 의식의 문제다.


멀게는 저작권법으로, 가깝게는 CCL로,

그리고 가장 가까이는, 내 내면의 양심으로.


창작 윤리는 법과 윤리를 동시에 존중하는 데서 시작된다.

창작자는 끊임없이 영감을 받고, 때로는 빌려 쓰기도 한다.

그러나 빌려 온 영감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선,

그 시작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분명히 밝혀야 한다.

그 투명함이 창작 윤리의 첫걸음이다.


내 목소리의 시작이 어디였는가를 스스로에게 되묻는 순간,

그 순간, 창작자는 진정한 창작을 시작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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