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있었지만, 구조는 없었다
추천 BGM : Max Richter – On the Nature of Daylight
‘그 기업’ 입사 이후, 나는 캐나다로 떠났던 때로부터 근 5년 만에 여유를 되찾았다.
몸도 어느 정도 만들어졌고, 경제적 안정도 갖춰졌다.
4년간 기숙사에서 지내며 안 쓰고 모은 돈으로 집을 구했고 원하는 대로 인테리어도 즐겼다.
그즈음 나는 오랜 웅크림에서 벗어나 여자친구를 만나기 시작했다.
그녀와 나는 매우 가까운 곳에 살았으며 거의 1년 가까이 동거하듯 지냈다.
따뜻했고, 편했고, 안정적이었다.
아름다운 그녀의 모습은 시간이 흘러도 늘 사랑스러울 것 같았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이상한 무게가 쌓였다.
우리는 익숙해졌고, 그 익숙함 속에서 나는 조금씩 자기 관리를 놓기 시작했다.
처음엔 운동을 하루쯤 쉬었고,
그다음엔 식단을 대충 챙겼고, 팬데믹 핑계를 댔다.
나중엔 거울을 보며 ‘괜찮아, 쫌만 빡세게 하면 금방 복구할 수 있지 뭐’라고 스스로를 속였다.
그렇다.
난 지금의 걱정 없고 안정적인 관계에 취해 그새 ‘설계’와 다음 ‘목표’를 잊었다.
생각보다 빨리 찾아온 사랑은 내 마음을 도파민으로 가득 채워 긴장을 밀어냈고,
나도 모르는 사이, ‘그 기업’ 입사의 성취감은, 첫 직장에서 겪은 이별이 남긴 자격지심과 함께 내 무의식 속에 ‘나정도 직업이면,’이라는 오만을 새겼다.
여태 날 성공의 길로 이끈 풀무불에 풀무질을 놓게 했다.
생각보다 열기는 빠르게 식어갔고, 몸은 더 빠르게 무너졌다.
어깨는 좁아지고 가슴보다 배가 나왔다.
여자친구는 같이 헬스장 다니며 데이트해보고 싶다며 너무도 친절하게 표현했지만,
오만에 절여진 나의 뇌는 그 뜻을 이해하기엔 너무 멍청했다.
‘그럼 갔다 왔다 하는 길 데려다줄게’라니…
고심 끝에 건넨 그녀의 권유에 김 빠지는 반응을 보이는 나와, 그런 나를 바라보는 그녀의 아린 미소 뒤 서운함을,
조금씩 나에 대한 마음을 내려놓기 시작한 그녀의 변화를 난 끝내 눈치채지 못했다.
그러다 여자친구는 다른 지역에서 일하게 되어 1시간 반 거리의 장거리 커플이 되었고,
이 간극은 미지근하게 식어버린 사랑이 남긴 정과 추억에 빠져 허우적거리던 그녀를 구원하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끝.
붙잡아볼 생각도 했었지만 약속장소로 들어가기 전 유리에 비친 나의 모습이, 나의 외모가 그걸 말렸다.
그녀는 나쁜 사람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인생 최고 몸무게를 찍은 나를 견뎌주었으며 친절하게 관계 개선을 위한 방향까지 제안했다.
이별 후 나는 몇 주간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그새 성장한 난 첫 직장에서 맞이한 이별 때완 다르게 감정과 원인을 분석하였다. 그리고 다시 ‘설계’를 시작했다.
4년간 사내 헬스장에 익숙했던 나는 헬스장으로 이동하는 것을 운동 자체보다 힘들어했고, 그래서 홈짐을 만들었다.
기숙사에서 지내며 때맞춰 영양사가 준비한 식단을 먹던 나는 패스트푸드에 익숙해져 있었고, 결국 요리를 시작했다.
재택근무에 젖은 나는 일과시간 후 넘치는 여유시간을 그동안 억눌린 생활에 대한 보상이라 생각해 게임을 즐겼었고, 그래서 생활 루틴을 다시 짰다.
원인을 찾으니 방안이 보였고, 그로 인해 목표가 생기니 먼지 쌓인 채 방치되었던 풀무를 찾게 되었다.
그즈음 인간의 본능에 대해 이해하게 되었다.
오랜 친구인 유튜브는 어떻게 알았는지 귀신같이 관련 영상을 틀어주었다.
경제적 능력과 인성, 지식수준과 교양.
물론 건강하고 안정적인 관계유지를 위해 매우 중요한 조건이다.
하지만 그 기저에 가장 단단하게 자리하고 있는 기준 외모.
‘그래서 그 사람과 키스할 수 있어?’라는 질문과 ‘기왕이면 다홍치마’는 꽤나 익숙해진 문장이지만 가장 근본적인 관계의 시작점을 시사한다.
물론 상기하였듯, 사람마다 각자의 기준과 이상형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외모가 깊이 자리한 본능을 깨우는 중요한 요소라는 걸 부정하긴 힘들 것이라 생각한다.
근거를 기반한 목표는 무섭게 타올랐다.
루틴이 안정적으로 정착되고, 업무시간 후 여유시간이 많아 충분한 휴식을 취할 수 있던 난 두 달간 하루도 빠지지 않고 운동한 적도 있을 정도로 나 자신을 연단했다.
그리고 이전보다 더 괜찮은 룩을 갖추고 난 뒤,
오는 사람 막지 않고, 가는 사람 붙잡지 않았다.
누군가를 억지로 끌어들이려 하지 않았다.
내 삶을 살아가되, 그 안에 들어오려는 사람에게만 문을 열었다.
나는 여전히 운동했고, 일했고, 나를 가꾸는 삶을 이어갔다.
그리고 그 삶 안에, N이 들어왔다.
J가 들어왔다. Y가 들어왔다.
처음엔 아무 기대도 없었다. 그래서 만나는 사람 있다고도 말했다.
다만, 그들은 내게 이렇게 말했다.
“나 오빠 집에 있을래.”
“다음 주도 같이 있어도 돼?”
“다른 사람 있어도 돼, 그냥 나 시간 될 때 여기 와줘.”
나는 그들을 설득한 적이 없다.
조건을 건 적도 없다.
다만, 떠나려는 사람은 붙잡지 않았고, 오려는 사람은 막지 않았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그들은 떠나지 않았다.
안녕하세요 브런치 독자님들.
그녀의 다정한 권유를 무심하게 흘려보낸 날, 사랑도 함께 멀어졌어요.
여러분은, 무심함이 사랑을 잃게 만들었던 기억이 있으신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