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 장: 동양 사상과의 공명

by 이호창

제13장: 동양 사상과의 공명



13.1. 어둠의 시대, 칼리 유가(Kali Yuga)와 영지주의적 세계관


우리는 지금까지 초기 기독교 세계라는 특수한 시공간 속에서 피어났던 영지주의의 복잡하고도 심오한 세계를 탐험했습니다. 그렇다면 이토록 독특해 보이는 그들의 사상은 오직 그 시대, 그 문화권에만 국한되는 특수한 현상이었을까요? 아니면, 시대와 문화를 초월하여 인류가 보편적으로 느끼는 어떤 실존적 상태에 대한 통찰을 담고 있었던 것일까요?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우리는 잠시 지중해 세계를 떠나 아주 먼 곳, 고대 인도의 정신세계로 눈을 돌려보고자 합니다. 그곳에서 우리는 영지주의의 세계관과 놀라울 정도로 깊은 공명을 일으키는 하나의 거대한 우주론, 즉 '유가(Yuga)' 사상, 그리고 우리가 현재 살고 있다고 일컬어지는 어둠의 시대, '칼리 유가(Kali Yuga)'와 마주하게 됩니다.


이 두 사상 사이에 직접적인 역사적 교류나 영향 관계가 있었는지를 증명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며, 그것이 이 장의 목표는 아닙니다. 대신 우리는 전혀 다른 두 문화가 '지금 여기'의 세계를 어떻게 진단하고, 그 안에서의 인간 조건을 어떻게 이해했는지를 비교함으로써, 영지주의적 사유가 지닌 보편성의 일면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영지주의의 비관적 우주론은 결코 특이한 망상이 아니라, 영적인 감수성이 예민했던 이들이 시대의 어둠을 꿰뚫어 본 통찰의 한 형태였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네 개의 시대: 힌두 우주론의 유가(Yuga) 사상


고대 힌두 사상에서 시간은 직선적으로 흐르지 않습니다. 그것은 탄생, 성장, 쇠퇴, 그리고 소멸을 끝없이 반복하는 거대한 순환의 구조를 가집니다. 이 우주적 순환의 한 주기는 네 개의 시대, 즉 '유가'로 구성됩니다. 이 네 시대는 마치 사계절처럼, 진리와 도덕성(다르마, Dharma)이 점차 쇠퇴해가는 과정으로 묘사됩니다.


사트야 유가 (Satya Yuga) / 크리타 유가 (Krita Yuga):

'진리의 시대' 혹은 '황금시대'입니다. 이 시대에 진리와 정의를 상징하는 암소 다르마(Dharma)는 네 다리로 굳건히 서 있습니다. 인간의 수명은 매우 길고, 사람들은 본성적으로 선하며, 영적인 지혜가 충만하여 신과 직접적으로 소통합니다. 사회에는 갈등이나 거짓, 질병이 없고, 모든 것이 풍요롭고 평화롭습니다. 이곳은 영지주의의 플레로마(Pleroma)처럼, 완전하고 조화로운 원형의 시대를 상징합니다.


트레타 유가 (Treta Yuga):

'세 번째'라는 의미를 지닌 '은의 시대'입니다. 다르마의 암소는 이제 세 다리로 서게 되고, 세상의 미덕은 4분의 1만큼 감소합니다. 인간은 여전히 고결하지만, 이제 의무와 희생 제사와 같은 노력을 통해서만 덕을 쌓을 수 있습니다.


드바파라 유가 (Dvapara Yuga):

'두 번째'라는 의미의 '청동시대'입니다. 다르마는 두 다리로 겨우 서 있으며, 미덕은 절반으로 줄어듭니다. 세상에는 질병과 거짓, 불만이 만연하기 시작하고, 인간의 영성은 크게 쇠퇴합니다.


칼리 유가 (Kali Yuga):

'투쟁과 불화의 시대' 혹은 '철의 시대'입니다. 이 시대는 바로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마지막 시대입니다. 다르마의 암소는 이제 단 하나의 다리로 위태롭게 서 있으며, 진리와 도덕성은 거의 사라집니다. 세상은 위선과 탐욕, 폭력과 거짓으로 가득 찹니다. 인간의 수명은 급격히 줄어들고, 영적인 지혜는 경멸받으며, 사람들은 오직 물질적인 부와 감각적인 쾌락만을 추구합니다. 통치자들은 백성을 착취하고, 사회는 끊임없는 갈등과 전쟁에 휩싸입니다. 이 시대는 영적인 암흑기이며, 모든 가치가 전도된 혼돈의 시대입니다.


두 세계관의 공명: 어둠에 대한 동일한 진단


이 칼리 유가에 대한 묘사는 우리에게 너무나도 익숙한, 영지주의의 세계 진단과 놀라울 정도로 유사한 분위기를 풍깁니다.


타락한 세계:

칼리 유가가 진리의 황금시대(사트야 유가)로부터 타락한 어둠의 시대이듯이, 영지주의의 물질 우주는 완전한 빛의 세계(플레로마)로부터 추락한 그림자의 세계입니다. 두 사상 모두 우리가 사는 지금 이 세계가 근본적으로 잘못되었으며, 결함과 고통으로 가득 찬 공간이라는 비관적인 진단을 내립니다.


악한 지배자:

칼리 유가는 불화의 악마 '칼리(Kali)'의 지배 아래에 있다고 여겨집니다. 인간은 이 악마적 힘의 영향 아래에서 탐욕과 증오에 휩싸이게 됩니다. 이는 영지주의에서 이 세계가 무지하고 오만한 창조주 '데미우르고스(Demiurge)'와 그의 권속 '아르콘(Archon)'들의 지배 아래 놓여 있다는 사상과 정확히 상응합니다. 두 세계관 모두, 이 세상이 선한 신의 자비로운 통치 아래 있는 것이 아니라, 어둡고 적대적인 힘의 지배를 받는다고 주장합니다.


망각 속의 영혼:

칼리 유가에서 인간은 자신의 진정한 본성(아트만, Ātman)과 영적인 진리(다르마)를 망각한 채, 물질적 환상(마야, Māyā) 속에서 살아갑니다. 이는 영지주의에서 인간이 자신의 신성한 기원을 잊어버리고, 데미우르고스가 만든 세상의 법칙과 쾌락에 중독되어 살아가는 모습과 동일합니다. '망각'은 두 사상 모두에서 인간이 겪는 고통의 근본적인 원인입니다.


구원자의 강림:

힌두 전통에서는 시대의 악이 극에 달했을 때, 최고신 비슈누(Vishnu)가 지상에 '아바타(Avatar)'로 강림하여 악을 멸하고 새로운 시대를 연다고 믿습니다. 칼리 유가의 마지막에 나타날 칼키(Kalki) 아바타가 바로 그 예입니다. 이는 영지주의에서 잠든 영혼들을 깨우고 구원의 길을 열어주기 위해 빛의 세계로부터 '구원자 그리스도'가 파견된다는 사상과 구조적으로 완벽한 유사성을 보입니다. 두 사상 모두, 인간의 힘만으로는 이 어둠의 시대를 극복할 수 없으며, 상위 세계로부터의 신성한 개입이 필수적이라고 말합니다.


내면의 신성:

힌두 사상의 핵심에는 '아트만' 사상이 있습니다. '아트만'은 개개인 안에 내재하는 영원하고 불멸하는 참된 자아이며, 그 본질은 우주적 절대자인 '브라만(Brahman)'과 동일합니다.

이는 영지주의에서 모든 인간의 내면에 깃들어 있는, 플레로마에서 온 '신성의 불꽃(Pneuma)'이라는 개념과 깊이 공명합니다. 두 사상 모두, 인간의 가장 깊은 본질이 신적인 것이며, 구원이란 바로 이 내면의 신성을 발견하고 실현하는 과정이라고 가르칩니다.


서로 다른 길: 순환의 우주와 탈출의 우주


이처럼 놀라운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두 세계관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점 또한 존재합니다.


가장 큰 차이는 시간관에 있습니다. 힌두의 유가 사상은 영원히 반복되는 '순환적(Cyclical)' 시간관을 가집니다. 칼리 유가가 파괴로 끝난 후에는, 세상은 정화되어 다시 새로운 사트야 유가, 즉 황금시대가 시작됩니다. 이 순환에는 시작도 끝도 없습니다. 그러나 영지주의의 시간관은 보다 '종말론적(Eschatological)'입니다. 그들에게 역사는 소피아의 추락이라는 명확한 시작점과, 흩어진 모든 빛의 입자들이 플레로마로 완전히 귀환하여 우주적 드라마가 끝나는 최종적인 '복원(apokatastasis)'을 향해 나아갑니다. 그들의 목표는 이 순환의 고리를 영원히 끊고, 다시는 추락이 없는 완전한 상태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또한, 물질세계와 창조주에 대한 평가에서도 차이가 있습니다. 힌두 사상에서 물질세계(프라크리티, Prakriti)는 그 자체로 악한 것이 아니라, 신의 유희(릴라, Līlā)가 펼쳐지는 무대입니다. 칼리 유가에서 그것이 타락한 상태에 있을 뿐, 그 본질까지 사악한 것은 아닙니다. 창조주 브라만(Brahmā) 역시 사악하거나 무지한 존재가 아닌, 신성한 삼위일체의 한 부분입니다. 그러나 급진적인 영지주의에게 물질은 근본적으로 영과 대립하는 어둠의 실체이며, 그 창조주 데미우르고스는 마땅히 거부하고 극복해야 할 거짓 신입니다.


이러한 비교를 통해 우리는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영지주의가 제시했던 세계관은 결코 고대 지중해 지역만의 특이한 사상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세상이 어둡고 고통스러우며, 진리가 가려져 있고, 진정한 나는 여기에 속하지 않았다는 실존적 감각은, 시공간을 넘어 수많은 영적 전통 속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보편적인 통찰입니다.


영지주의와 칼리 유가 사상은 서로 다른 신화적 언어와 철학적 배경을 가지고 있지만, 결국 동일한 진단을 내리고 동일한 방향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즉, 이 어둠의 시대 속에서 구원의 길은 외부 세계의 개혁이 아니라, 내면의 혁명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 안에 이미 존재하지만 잊고 있었던 신성한 앎, 즉 '그노시스'를 다시 발견하고, 그 빛의 힘으로 우리를 속박하는 모든 어둠의 사슬을 끊어내는 영웅적인 여정입니다.

13.2. 윤회와 해탈 : 보편적 진리를 향한 다른 길


우리는 앞선 장에서 영지주의의 세계관이 어떻게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인도의 '칼리 유가' 사상과 놀라운 공명을 이루는지 살펴보았습니다. 이 두 전통이 공유하는 가장 깊은 통찰 중 하나는, 바로 인간의 삶이 단 한 번으로 끝나지 않으며, 고통스러운 반복의 굴레에 묶여 있다는 인식입니다. 동양에서는 이를 '윤회(輪廻)'라 불렀고, 서양의 영지주의자들 역시 유사한 개념을 통해 영혼의 운명을 설명했습니다.


죽음 이후 우리의 의식은 어떻게 되는가? 이 질문은 인류의 가장 오래된 철학적 화두입니다. 이 질문에 대해, 영지주의와 동양 사상은 '한 번의 심판'이나 '영원한 소멸'이 아닌, '반복되는 삶'이라는 공통된 대답을 제시합니다. 그러나 그 반복의 원인과, 그것을 벗어나는 '해탈'의 방법론에 있어서는 각기 다른 지도를 그려 보입니다. 이 두 개의 지도를 나란히 펼쳐보는 것은, 보편적인 진리를 향한 인류의 영적 탐구가 얼마나 다채롭게 전개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경이로운 작업입니다.


동양의 세계관: 카르마의 법칙과 삼사라의 바퀴


힌두교와 불교를 비롯한 대부분의 동양 사상에서, 윤회의 개념은 '카르마(Karma, 業)'라는 우주적 법칙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습니다. '카르마'는 '행위'를 의미하는 산스크리트어로, '원인과 결과의 법칙'을 의미합니다. 즉, 현재의 모든 생각과 말, 그리고 행동은 반드시 미래에 그에 상응하는 결과를 낳는다는, 지극히 합리적이고 비인격적인 우주의 원리입니다. 선한 행위는 즐거운 결과를, 악한 행위는 고통스러운 결과를 낳으며, 이 카르마의 힘이 바로 영혼을 다음 생으로 이끄는 동력이 됩니다.


이 카르마의 법칙에 의해, 영혼은 끝없는 탄생과 죽음, 그리고 재탄생의 순환, 즉 '삼사라(Samsara, 윤회)'라는 거대한 바퀴에 갇히게 됩니다. 이 삼사라의 바퀴는 결코 축복이 아닙니다. 그것은 고통의 바다(苦海)이며, 아무리 좋은 조건으로 다시 태어난다 하더라도, 늙고 병들고 죽어야 하는 존재의 근원적인 고통(두카, Dukkha)에서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동양 사상에서 구원의 궁극적인 목표는 더 좋은 다음 생을 얻는 것이 아니라, 이 삼사라라는 고통의 바퀴 자체를 완전히 멈추고 그로부터 벗어나는 것입니다.


이 최종적인 해방을 힌두교에서는 '목샤(Moksha)'라 부르고, 불교에서는 '니르바나(Nirvana, 열반)'라 부릅니다. '목샤'는 개인의 영혼인 '아트만(Ātman)'이 우주적 실재인 '브라만(Brahman)'과 본래 하나였음을 깨닫고, 분리라는 환상에서 벗어나 근원과의 합일을 이루는 것입니다. '니르바나'는 문자 그대로 '(불꽃을) 불어서 끈다'는 의미로, 고통의 원인이 되는 탐욕, 증오, 어리석음이라는 '세 가지 독(三毒)'의 불꽃을 완전히 소멸시켜, 일체의 괴로움이 사라진 절대적인 평온의 상태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이 해탈의 경지에 이르기 위해, 수행자는 명상, 요가, 지혜의 탐구, 계율의 실천 등 오랜 세월에 걸친 점진적인 자기 정화의 길을 걸어야 합니다.


영지주의의 세계관: 아르콘의 감옥과 강제된 윤회


놀랍게도, 많은 영지주의 문헌 역시 이러한 영혼의 윤회, 즉 '영혼의 전이(metempsychosis)' 사상을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원인과 목적에 대한 설명은 동양의 그것과는 사뭇 다른, 훨씬 더 어둡고 비극적인 색채를 띱니다.


영지주의자들에게 윤회는 카르마라는 비인격적인 법칙의 결과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이 세계를 지배하는 사악한 권력자, 즉 데미우르고스와 아르콘(Archon)들이 신성한 불꽃을 이 물질 감옥 안에 영원히 가두어 두기 위해 고안한, 적극적이고 악의적인 통제 시스템이었습니다.


영혼이 육체의 죽음을 통해 감옥을 탈출하려 할 때, 각 하늘의 관문을 지키는 아르콘들은 그 길을 가로막습니다. 만약 영혼이 '그노시스'를 통해 자신을 보호할 비밀의 지식과 암호를 준비하지 못했다면, 그 영혼은 다시 붙잡히게 됩니다. 그리고 아르콘들은 그 영혼에게 '망각의 물'을 마시게 하여, 이전 생의 기억과 자신의 신성한 기원을 모두 잊게 만듭니다. 모든 기억을 잃고 무력해진 영혼은, "몸에서 몸으로 옮겨 담기는" 비참한 과정을 통해 또 다른 육체의 감옥 속으로 강제로 던져집니다.


따라서 영지주의의 윤회는 영혼의 성장을 위한 기회의 장이 아니라, 탈옥에 실패한 죄수에게 내려지는 추가적인 형벌과도 같습니다. 그들의 목표는 더 나은 몸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종류의 몸으로도 '다시는 태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구원은 이 끔찍한 재활용 시스템 자체를 완전히 파괴하고 탈출하는 것입니다.


두 길의 비교: 유사점과 결정적 차이


고통의 순환과 그 원인: 두 사상 모두 반복되는 삶을 고통의 순환으로 규정하고, 그 근본적인 원인을 '무지(아비드야, avidyā / 아그노시아, agnosia)'에서 찾는다는 점에서 놀라운 유사성을 보입니다. 내가 누구이며, 이 세계가 어떤 곳인지에 대한 무지야말로 우리를 이 굴레에 묶어두는 가장 강력한 족쇄입니다.


해방의 열쇠, '지식': 두 사상 모두 이 무지를 깨뜨릴 수 있는 것은 '특별한 지식'이라고 말합니다. 동양의 '반야(prajñā)'나 '보리(bodhi)'는 영지주의의 '그노시스'와 마찬가지로, 단순한 정보가 아니라 존재 전체를 변형시키는 깨달음의 빛입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중요한 차이점들이 존재합니다.


법칙 대 음모:

동양의 윤회가 '카르마'라는 공평하고 비인격적인 우주적 법칙에 의해 움직인다면, 영지주의의 윤회는 '아르콘'이라는 지성을 가진 존재들의 악의적인 '음모'에 의해 강제됩니다. 이로 인해 영지주의의 세계관은 훨씬 더 투쟁적이고 드라마틱한 성격을 띠게 됩니다.


점진적 수행 대 급진적 각성:

동양의 해탈이 종종 오랜 세월에 걸친 수행과 점진적인 카르마의 정화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으로 묘사되는 반면, 영지주의의 구원은 외부에서 온 구원자의 메시지를 통해 '단번에' 잠든 영혼이 깨어나는, 훨씬 더 급진적이고 극적인 사건으로 그려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세계에 대한 최종적 태도:

동양 사상, 특히 힌두교에서 물질세계는 궁극적으로 신의 자기 현현이기에 완전히 부정되지는 않습니다. 해탈은 이 세계를 떠나는 것이라기보다는, 이 세계를 있는 그대로 보면서도 그것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를 얻는 것입니다. 그러나 영지주의자에게 이 세계와 그 창조주는 극복하고 탈출해야 할 명백한 '적'입니다. 그들의 목표는 세계와의 조화가 아니라, 세계로부터의 완전한 '분리'와 '도피'입니다.


결국 영지주의와 동양의 윤회-해탈 사상은, 같은 산의 정상을 향해 오르지만 서로 다른 등산로를 택한 것과 같습니다. 그들은 모두 인간이 겪는 고통의 현실을 깊이 직시했고, 그 원인이 우리를 둘러싼 환상과 내면의 무지에 있음을 간파했으며, 궁극적인 해방은 '깨달음'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보편적인 진리를 공유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비교는 우리에게 영지주의의 가르침이 고대 지중해 지역의 폐쇄적인 이단 사상이 아니라, 인간 영혼의 가장 깊은 열망, 즉 고통의 순환을 끊고 영원한 자유와 진정한 고향을 찾고자 하는 보편적인 인류의 위대한 탐구 중 하나였음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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