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위대한 사상은 그 자체로 완결된 고정불변의 진리가 아니라, 살아있는 생명체와 같습니다. 그것은 역사의 토양에 뿌리를 내리고, 시대의 빛과 바람을 맞으며 자라나고, 때로는 다른 나무와 가지를 섞으며 새로운 열매를 맺기도 합니다. 제1부에서 우리가 목격했던 알렉산드리아의 헤르메스 주의는, 그 모든 가능성을 품고 이제 막 발아한 하나의 신성한 씨앗이었습니다. 그 씨앗 속에는 우주와 인간을 잇는 상응의 법칙과, 내면의 신성을 깨달아 구원에 이르는 그노시스(Gnosis)의 길이 담겨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지혜의 강물이 알렉산드리아라는 수원지를 떠나, 역사의 거대한 물길을 따라 흘러가면서, 그것은 결코 처음과 같은 순수한 모습으로만 머무를 수 없었습니다. 지나는 땅의 토양에 따라 그 빛깔이 변하고, 만나는 기후에 따라 그 흐름의 속도가 달라졌으며, 때로는 거대한 암반에 막혀 지하의 강물처럼 숨어 흐르기도 했습니다.
제2부의 여정은 바로 이 지혜의 강물이 겪어낸 장구하고도 극적인 유전(流轉)의 과정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강물이 어떻게 서구 세계의 기억에서 잠시 잊혔다가, 이슬람이라는 비옥한 대지에서 새로운 생명력을 얻어 더욱 깊어지고, 다시 유럽으로 귀환하여 르네상스라는 찬란한 문명을 꽃피우는 자양분이 되었는지를 목격할 것입니다. 또한, 근대 과학이라는 새로운 물길이 열리면서 이 신비로운 강물이 어떻게 ‘비합리’라는 둑에 갇혀 주류의 지성사에서 밀려나게 되었는지, 그 빛과 그림자의 역사를 함께 고찰하게 될 것입니다. 이 여정은 단순히 과거의 사실을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위대한 사상이 어떻게 시대와 문화를 넘나들며 스스로를 변용시키고, 또 시대를 변혁시키는지를 보여주는 지적 생존의 드라마입니다.
강물의 첫 번째 여정은 망각의 사막을 건너는 고독한 길이었습니다. 로마 제국이 기울고, 고전 세계의 질서가 무너지면서 서유럽은 점차 깊은 지적 암흑 속으로 빠져들었습니다. 기원후 529년,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아테네의 플라톤 아카데미를 폐쇄한 사건은, 고대의 자유로운 철학적 탐구 정신에 대한 공식적인 사망 선고와도 같았습니다. 교회의 교리가 유일한 진리의 척도가 되면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마저도 신학의 시녀로 복무해야 했습니다.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영혼의 직접적인 체험과 개인적 구원을 설파하는 헤르메스 주의는 이단적인 가르침으로 여겨질 위험이 너무나도 컸습니다. 신플라톤주의의 마지막 철학자들이 뿔뿔이 흩어지면서, 헤르메스의 목소리는 서방 세계에서 점차 그 메아리를 잃어갔습니다. 지혜의 강물은 마치 사막의 모래 속으로 스며들 듯, 그 흐름의 자취를 감추는 듯 보였습니다.
그러나 강물은 결코 마르지 않았습니다. 서쪽의 물길이 막혔을 때, 그것은 동쪽을 향해 새로운 길을 내었습니다. 시리아와 페르시아의 학자들을 통해, 고대 그리스의 철학적, 과학적 유산은 이슬람 세계로 흘러 들어갔습니다. 특히 압바스 왕조 시대의 바그다드에 세워진 ‘지혜의 집(Bayt al-Hikma)’은 제2의 알렉산드리아가 되어, 고대의 지식을 아랍어로 번역하고 연구하는 거대한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바로 이곳에서 헤르메스의 지혜는 새로운 언어의 옷을 입고 다시 태어났습니다. 이슬람의 학자들에게 헤르메스는 단순히 그리스의 신이 아니라, 성서의 에녹(Enoch)이나 쿠란의 이드리스(Idris)와 동일시되는 위대한 예언자이자 현인이었습니다. 그들은 헤르메스 문헌을 탐욕스럽게 번역하고 주해를 달았으며, 그 안에 담긴 우주론과 연금술, 점성술의 지식을 자신들의 학문 체계 속으로 깊이 통합시켰습니다.
이 시기에 헤르메스 주의는 단순히 보존되는 것을 넘어, 새로운 차원으로 발전하고 심화되었습니다. 자비르 이븐 하이얀(Jabir ibn Hayyan)과 같은 위대한 연금술사들은 연금술을 단순한 물질 변환이 아니라, 우주와 영혼의 ‘균형(Mīzān)’을 찾아가는 정교한 철학적 수행으로 발전시켰습니다. 또한, 북방 메소포타미아의 하란에 남아 있던 사비교도(Sabians of Harran)들은 자신들의 고대 항성 숭배 신앙과 헤르메스-신플라톤주의 철학을 결합하여, 천체의 힘을 끌어들이는 정교한 성위 마법(Astral Magic) 체계를 보존하고 발전시켰습니다. 이처럼 지혜의 강물은 이슬람이라는 비옥한 대지를 흐르며, 그곳의 철학과 신비주의, 과학의 자양분을 흠뻑 빨아들여 더욱 풍성하고 깊은 물줄기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이 강물은 다시 서쪽을 향해 흐르기 시작했습니다. 십자군 전쟁과 이슬람 치하의 스페인(알안달루스), 그리고 기울어가는 동로마 제국으로부터 흘러나온 아랍어와 그리스어 문헌들을 통해, 유럽은 자신들이 잊고 있던 위대한 지적 유산과 재회하게 됩니다. 그중에서도 15세기 피렌체에서 이루어진 『코르푸스 헤르메티쿰』의 라틴어 번역은, 메마른 유럽의 정신세계에 쏟아진 단비와도 같았습니다. 마르실리오 피치노와 피코 델라 미란돌라 같은 르네상스의 거인들은 헤르메스의 목소리 속에서, 모든 종교와 철학을 꿰뚫는 하나의 보편적 진리, 즉 ‘고대 신학(Prisca Theologia)’의 원천을 발견했습니다. 헤르메스 주의가 제시하는 신성한 인간관과 살아있는 우주관은, 중세의 속박에서 벗어나 인간의 존엄성과 창조성을 찬미하려던 렌상스 정신과 완벽하게 공명했습니다. 지혜의 강물은 이제 피렌체를 중심으로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가며, 철학, 예술, 건축, 그리고 과학의 모든 분야에 새로운 생명의 씨앗을 뿌렸습니다. 르네상스는 말 그대로 헤르메스 주의의 재발견 위에서 꽃을 피운 문명이었습니다.
그러나 강물의 여정은 순탄하지만은 않았습니다. 17세기에 이르러, 세계를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 즉 기계론적 세계관이 등장하면서 헤르메스 주의는 다시 한번 위기를 맞게 됩니다. 데카르트의 합리주의와 뉴턴의 고전역학이 지성계를 지배하면서, 우주는 더 이상 살아있는 신성한 유기체가 아니라, 수학적 법칙에 따라 정밀하게 움직이는 거대한 기계로 간주되기 시작했습니다. 상응과 공감이라는 신비로운 끈은 ‘비과학적 미신’으로 치부되었고, 연금술과 점성술은 합리적인 과학의 영역에서 추방되었습니다. 아이작 카조봉이 『코르푸스 헤르메티쿰』이 고대 이집트가 아닌 기원후에 쓰였다는 사실을 밝혀낸 것은, 이러한 흐름에 결정적인 쐐기를 박는 사건이었습니다. 이로써 ‘세계의 탈마법화(Disenchantment of the World)’가 시작되었고, 헤르메스 주의라는 신비로운 지혜의 강물은 주류 학문의 굳건한 제방에 가로막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강물은 결코 소멸하지 않습니다. 지상의 물길이 막히면, 그것은 지하로 스며들어 보이지 않는 물길을 내어 흐르는 법입니다. 공식적인 학문의 세계에서 추방된 헤르메스 주의는, 장미십자회(Rosicrucians)와 프리메이슨(Freemasonry) 같은 비밀결사의 은밀한 가르침 속으로, 그리고 소수의 연금술사와 신비주의자들의 개인적인 탐구 속으로 그 명맥을 이어갔습니다. 그것은 서양 정신사의 무의식 속에 잠복한 채, 합리주의의 밝은 빛이 드리우는 그림자 속에서 조용히 다음 시대를 기다리는 지하의 강물이 되었습니다.
제2부의 여정은 이처럼 하나의 위대한 사상이 겪어낸 영광과 시련의 파노라마입니다. 우리는 이슬람의 지혜의 궁전에서 르네상스 피렌체의 아카데미로, 그리고 다시 과학혁명 이후의 비밀결사로 이어지는 헤르메스 주의의 극적인 여정을 함께 따라갈 것입니다. 이 여정을 통해, 우리는 하나의 진리가 어떻게 시대의 언어와 만나 스스로를 끝없이 변용시키며 살아남는지를 목격하며, 서양 근대 정신이 무엇을 선택하고 무엇을 배제했는지를, 그리고 그 선택이 오늘날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깊이 성찰하게 될 것입니다. 이제, 역사의 거대한 물길을 따라 흘러온 지혜의 강물에 우리 자신의 배를 띄울 시간입니다.
제4장: 이슬람의 황금시대, 지혜의 보존자들
4-1. 아테네의 불꽃, 바그다드에서 다시 타오르다: 지혜의 집(Bayt al-Hikma)
하나의 위대한 문명이 그 생명의 빛을 다하고 스러져갈 때, 그 문명이 피워 올렸던 지성의 불꽃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그것은 역사의 바람 속에 속절없이 꺼져버리는 촛불과 같은 것입니까, 아니면 누군가의 손에 들려 끈질기게 어둠을 헤치고 나아가, 마침내 새로운 장작더미 위에서 다시 타오르는 운명을 지니는 것입니까. 서양 고전 시대의 황혼기, 특히 기원후 529년 동로마 제국의 황제 유스티니아누스가 아테네의 플라톤 아카데미에 내린 폐쇄령은, 서양 정신사에서 하나의 시대가 막을 내렸음을 알리는 상징적인 사건이었습니다. 플라톤이 세운 이래 거의 천 년 동안 자유로운 사유와 이성적 탐구의 중심지였던 아카데미의 문이 닫힌 것은, 고대의 다원주의적 지성 세계가 기독교 교리라는 단일한 권위 아래 통합되고 있음을 의미했습니다. 이로써 그리스 철학의 자유로운 불꽃은 서방 세계에서 공식적으로 그 빛을 잃는 듯 보였습니다. 신플라톤주의의 마지막 철학자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그들의 손에 들려 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 유클리드의 기하학, 그리고 헤르메스의 신비주의적 가르침들은 더 이상 안전한 안식처를 찾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지성의 불꽃은 그토록 쉽게 꺼지지 않는 법입니다. 서쪽에서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을 피해, 그 불씨는 동쪽을 향해 조심스럽고도 끈질긴 여정을 시작했습니다. 그 여정의 첫 번째 경유지는 시리아와 페르시아였습니다. 로마 제국의 공식적인 종교 정책으로부터 이단으로 규정되었던 네스토리우스파나 단성론파 기독교도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비잔티움의 영향권 밖에 있는 시리아의 에데사나 페르시아의 니시비스, 곤데샤푸르와 같은 도시에 자신들의 신학적, 학문적 중심지를 세우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비잔티움 교회가 외면했던 고대 그리스의 철학적, 과학적 저작들을 깊은 존경심을 가지고 연구했으며, 그것들을 자신들의 언어인 시리아어(Syriac)로 번역하는 작업을 꾸준히 이어오고 있었습니다.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 저술들과 갈레노스의 의학 서적들은, 신학적 논쟁을 벼리고 인간의 질병을 치료하는 데 필수적인 도구로 여겨졌기에 활발히 번역되고 교육되었습니다. 이 시리아어권 기독교 공동체들은,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서방 세계가 잃어버린 지적 유산을 보존하고 다음 시대로 전달하는 결정적인 교량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테네의 불꽃은 꺼진 것이 아니라, 이들 공동체의 경건한 손 안에서 조용한 등불이 되어 그 생명을 이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이 작은 등불을 거대한 횃불로 다시 피워 올릴 새로운 시대가 도래했습니다. 7세기에 아라비아 반도에서 발흥한 이슬람은 경이로운 속도로 성장하여 페르시아와 시리아, 이집트를 아우르는 거대한 제국을 건설했습니다. 초기의 정복 시대가 안정되고 8세기 중반, 우마이야 왕조를 무너뜨리고 압바스 왕조가 들어서면서 제국의 중심은 다마스쿠스에서 티그리스 강변에 세워진 새로운 계획도시, 바그다드로 옮겨졌습니다. ‘평화의 도시’라는 뜻을 지닌 바그다드의 건설은 단순한 수도 이전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이슬람 문명이 군사적 정복을 넘어 문화적, 지적 황금시대로 나아가겠다는 장엄한 선언이었습니다. 특히 알 만수르, 하룬 알 라시드, 그리고 그의 아들 알 마문과 같은 압바스 왕조의 칼리프들은 지식 그 자체에 대한 뜨거운 열정과 깊은 존경심을 가진 통치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제국의 위대함이 단지 군사력이나 영토의 넓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세계의 모든 지식을 한데 모으고 그것을 발전시키는 데 있다고 믿었습니다.
이러한 칼리프들의 비전과 후원 아래, 인류 지성사상 가장 위대한 프로젝트 중 하나인 ‘지혜의 집’, 즉 바이트 알 히크마(Bayt al-Hikma)가 탄생했습니다. 처음에는 칼리프의 개인 서고에서 시작되었던 이곳은, 9세기 초 알 마문의 시대에 이르러서는 국립 도서관이자 번역원, 천문대, 그리고 세계 각지에서 모여든 학자들이 함께 연구하는 종합 학술원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습니다. 이곳은 고대의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 비견될 만한, 당시 세계 최고의 지적 중심지였습니다. 지혜의 집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단연 ‘번역’이었습니다. 칼리프들은 막대한 자금을 투입하여 비잔티움 제국과 페르시아, 인도 등지로부터 고대 문헌들을 수집해오도록 했습니다. 그들은 수집된 문헌들의 무게를 금으로 달아 번역료를 지불했다는 전설이 있을 정도로, 번역 사업을 국가적인 최우선 과제로 삼았습니다.
이 위대한 번역 운동의 중심에는 바로 앞서 언급했던 시리아어권 기독교 학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리스어와 시리아어, 그리고 아랍어에 모두 능통했던 이들은, 고대 그리스의 원전들을 먼저 자신들에게 익숙한 시리아어로 옮긴 후, 다시 그것을 당대의 공용어인 아랍어로 번역하는 이중의 과정을 통해 정확성과 효율성을 높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도였던 후나인 이븐 이스하크(Hunayn ibn Ishaq)와 같은 천재적인 번역가이자 의사가 등장했습니다. 그는 자신과 그의 아들, 그리고 제자들로 이루어진 번역팀을 이끌며, 플라톤의 『국가』와 『법률』,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과 『시학』, 유클리드의 『원론』, 프톨레마이오스의 『알마게스트』, 그리고 갈레노스의 거의 모든 의학 저술들을 체계적으로 아랍어 세계에 소개했습니다.
이러한 번역의 물결 속에서, 헤르메스 주의 문헌들 역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습니다. 이슬람 세계는 특히 연금술, 점성술, 그리고 다양한 마법적 실천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러한 분야의 가장 권위 있는 원천으로 여겨졌던 것이 바로 헤르메스 트리스메기스투스의 저작들이었습니다. 『에메랄드 타블렛』을 비롯한 여러 연금술 문헌들과, 점성학과 마법에 관한 ‘기술적 헤르메티카’들이 이 시기에 활발히 번역되고 연구되었습니다. 이로써 헤르메스의 지혜는 더 이상 소수의 신비가들 사이에서만 비밀스럽게 전해지는 가르침이 아니라, 당대 최고의 지성들이 진지하게 탐구하고 논쟁하는 학문의 한 분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습니다.
바그다드의 ‘지혜의 집’에서 이루어진 대규모 번역 운동은 서양 고전 시대의 지적 유산을 단순히 보존하는 소극적인 역할을 넘어섰습니다. 그것은 인류의 지혜가 특정 문명이나 종교의 소유물이 아니라, 모든 인류가 공유하고 발전시켜야 할 보편적인 자산임을 증명한 사건이었습니다. 이슬람 문명은 그리스의 이성이라는 불꽃을 꺼뜨리지 않고 경건하게 지켜냈을 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고유한 신학과 철학, 과학이라는 새로운 기름을 부어 그 불꽃이 더욱 밝고 뜨겁게 타오르도록 만들었습니다. 아테네의 아카데미가 문을 닫으며 사그라드는 듯 보였던 지성의 불꽃은, 이처럼 시리아의 등불을 거쳐 바그다드의 거대한 화로에서 다시 한번 장엄하게 타올랐습니다. 그리고 이글거리는 이 불꽃의 열기와 빛은, 훗날 다시 서쪽으로 전해져 중세의 스콜라 철학을 깨우고 르네상스의 여명을 밝히는 결정적인 원동력이 됩니다. 지혜의 강물은 이처럼 문명과 종교의 경계를 유유히 넘나들며, 가장 어두운 시대에도 결코 그 흐름을 멈추지 않았던 것입니다.
4-2. 하란의 사비교도(Sabians of Harran): 별을 숭배한 헤르메스의 후예들
하나의 사상이 역사 속에서 살아남는 방식은 때로 가장 극적인 생존의 지혜를 보여줍니다. 지혜의 강물이 거대한 제국의 물길과 만났을 때, 그것은 때로는 주류에 합류하여 더 큰 흐름을 이루기도 하지만, 때로는 끈질기게 자신만의 고유한 물길을 유지하며, 심지어 주변 환경에 맞추어 스스로의 이름을 바꾸고 새로운 정체성의 옷을 입기도 합니다. 이슬람 황금시대의 광대한 지적 풍경 속에서, 헤르메스 주의의 전승을 이야기할 때 결코 빼놓을 수 없는 독특하고도 신비로운 공동체가 바로 ‘하란의 사비교도’입니다. 그들은 메소포타미아 북부, 고대로부터 달의 신 ‘신(Sin)’을 숭배하는 중심지였던 도시 하란(Harran)에 살았던 마지막 이교도(Pagan) 집단이었습니다. 이슬람이라는 거대한 파도가 온 세상을 휩쓸던 시기에, 그들은 절멸의 위기 앞에서 놀라운 지적 기지를 발휘하여 자신들의 고대 신앙을 지켜냈습니다. 그들이 선택한 생존의 방패는 바로 헤르메스 트리스메기스투스를 자신들의 예언자로 받아들이는 것이었습니다. 이로써 하란은 단순한 고대 도시를 넘어, 살아있는 헤르메스-신플라톤주의의 마지막 보루이자, 별들의 지혜와 신성마법의 전통이 가장 순수하게 보존되고 실천되었던 신비로운 성소(聖所)가 되었습니다.
하란은 고대 세계의 가장 중요한 교차로 중 하나였습니다. 아나톨리아와 메소포타미아, 시리아를 잇는 전략적 요충지였던 이곳은 수메르와 아카드 시대부터 달의 신을 숭배하는 신전으로 유명했으며, 구약성서에서 아브라함이 가나안으로 떠나기 전 머물렀던 장소로 기록되기도 했습니다. 로마 제국이 기독교를 국교로 선포하고, 동방의 영토들이 점차 이슬람의 지배하에 들어간 이후에도, 하란의 시민들은 놀라울 정도의 끈질김으로 자신들의 고대 신앙을 고수했습니다. 그들의 종교는 바빌로니아의 항성 숭배와 칼데아의 점성술, 그리고 헬레니즘 시대에 유입된 신플라톤주의 철학이 복잡하게 융합된 형태였습니다. 그들은 최고의 원인으로서의 초월적 신을 인정했지만, 실질적인 숭배의 대상은 그 신의 권능이 현현한 일곱 행성과 황도 12궁의 별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각 행성을 하나의 신성한 지성체로 여겼으며, 정교한 의례와 희생 제사를 통해 그들의 힘을 지상으로 끌어내려 자신들의 삶과 운명에 유리하게 작용하도록 만들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들은 당대 최고의 점성술사들이자 철학자들이었고, 그들의 지혜와 신비로운 의식은 주변 세계에 널리 알려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9세기에 이르러 이 독특한 공동체는 실존적 위기에 직면합니다. 이슬람 율법(샤리아)은 유대교도와 기독교도처럼 경전과 예언자를 가진 ‘책의 백성(Ahl al-Kitāb)’에게는 일정한 세금(지즈야, Jizya)을 내는 조건으로 신앙의 자유를 허용했지만, 하란의 주민들처럼 명백한 다신교적 우상 숭배자들은 법의 보호를 받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이슬람으로의 개종 혹은 죽음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지만이 놓여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전설에 따르면, 이 위기는 830년경 압바스 왕조의 칼리프 알 마문(al-Ma'mun)이 비잔티움 제국과의 전쟁을 위해 군대를 이끌고 하란을 지나가면서 절정에 달했습니다. 칼리프는 독특한 복장을 한 하란인들을 보고 그들의 종교가 무엇인지 물었고, 그들이 자신들을 이교도라고 답하자 큰 불쾌감을 표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원정에서 돌아올 때까지, 이슬람으로 개종하거나 혹은 쿠란이 인정하는 ‘책의 백성’ 중 하나가 되어 자신들의 정체성을 증명하지 못하면 모두 처단하겠다는 최후통첩을 내렸다고 합니다.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 하란의 현자들은 살아남기 위한 묘안을 짜내야 했습니다. 바로 이때, 한 명의 지혜로운 지도자가 쿠란 속에 등장하는 수수께끼의 집단, ‘사비(Sabi’un)’에 주목했습니다. 쿠란은 유대교도, 기독교도와 함께 ‘사비교도’를 신과 최후의 심판을 믿는 자들로서 구원받을 것이라고 몇 차례 언급하지만, 이들이 정확히 누구인지는 명확히 밝히지 않았습니다. 이슬람 초기 학자들 사이에서도 그 정체는 불분명했습니다. 하란인들은 바로 이 법의 틈새를 파고들었습니다. 그들은 칼리프의 관리들에게 “우리가 바로 쿠란에 언급된 그 사비교도입니다”라고 당당하게 선언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책의 백성’이 되기 위해서는 경전과 예언자가 필요했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그들은 인류 지성사상 가장 탁월한 선택 중 하나를 하기에 이릅니다. 그들은 헤르메스 트리스메기스투스를 자신들의 예언자로, 그리고 그가 남긴 저작들, 즉 『코르푸스 헤르메티쿰』과 『에메랄드 타블렛』 등을 자신들의 성스러운 경전으로 채택했습니다. 이 선택은 결코 임의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자신들의 신앙적 정체성을 거의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이슬람 율법의 보호막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완벽한 전략이었습니다.
첫째, 헤르메스는 이미 일부 이슬람 전승에서 쿠란에도 등장하는 예언자 이드리스(Idris), 즉 구약성서의 에녹(Enoch)과 동일 인물로 여겨지고 있었습니다. 이는 그들에게 즉각적인 정통성을 부여해주었습니다.
둘째, 헤르메스 문헌의 가르침은 그들의 신앙과 놀라울 정도로 잘 들어맞았습니다. 하나의 초월적인 최고신(The One)을 상정하면서도, 그 아래에 있는 천상의 존재들(누스, 행성의 지배자들)을 통해 세계가 다스려진다는 헤르메스 주의의 우주관은, 그들의 다신교적 항성 숭배를 철학적으로 정당화해주는 더없이 훌륭한 이론적 틀이었습니다. 이제 그들은 더 이상 ‘별을 숭배하는 자들’이 아니라, ‘예언자 헤르메스의 가르침에 따라, 신의 대리자인 천체들을 공경하는 자들’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 놀라운 지적 연금술을 통해, 하란의 이교도들은 ‘사비교도’라는 새로운 이름 아래 자신들의 고대 신앙을 합법적으로 이어나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후 수 세기 동안 하란은 헤르메스-신플라톤주의 철학과 실천의 가장 중요한 중심지로 번성했습니다. 그들은 단순히 과거의 지식을 보존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것을 더욱 발전시키고 체계화했습니다. 이곳에서는 철학적 사변과 실제적인 종교 의례가 분리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헤르메스 문헌을 경전으로 읽고 연구하는 동시에, 신플라톤주의 철학에 기반한 정교한 의례를 통해 별들의 신성한 힘과 직접적으로 교감하고자 했습니다. 그들의 신성마법(Theurgy)은 특정 행성이 가장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시간을 점성학적으로 정확히 계산하여, 그 행성에 상응하는 색깔의 옷을 입고, 상응하는 향을 피우며, 고대의 찬가를 부르고 기도하는 등 매우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형태를 띠었습니다. 그들은 특정한 목적을 위해 천상의 힘을 지상으로 끌어내려 봉인하는 탈리스만(Talisman) 제작 기술의 대가들이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하란의 지적 전통이 낳은 가장 위대한 인물 중 한 명이 바로 타비트 이븐 쿠라(Thābit ibn Qurra, 약 836-901)입니다. 하란 출신의 탁월한 수학자이자 천문학자, 철학자였던 그는 바그다드로 이주하여 칼리프의 궁정에서 활동하며, 유클리드, 아르키메데스, 아폴로니우스 등 수많은 그리스의 과학 및 철학 서적들을 아랍어로 번역했습니다. 그는 번역가였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사비교’ 신앙, 즉 하란의 헤르메스주의적 다신교를 철학적으로 옹호하는 독창적인 저술들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그는 하란의 지혜를 이슬람 세계의 주류 지성계에 소개하고 전파하는 가장 중요한 다리 역할을 했습니다. 후대에 편찬된 성위 마법의 집대성이라 할 수 있는 문헌 『피카트릭스, Picatrix』 역시 이러한 하란의 실천적, 의례적 헤르메스 주의 전통에 깊은 뿌리를 두고 있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하란의 사비교도는 절멸의 위기 앞에서 보여준 놀라운 생존의 지혜를 통해, 고대 후기의 이교적 지혜, 특히 헤르메스 주의의 가장 실천적인 측면을 보존하고 심화시킨 위대한 수호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헤르메스라는 이름을 방패 삼아 자신들의 정체성을 지켜냈을 뿐만 아니라, 철학적 사변과 종교적 실천이 결합된 독특하고도 강력한 형태의 헤르메스 주의를 꽃피웠습니다. 아테네의 불꽃이 바그다드에서 지식의 횃불로 다시 타올랐다면, 하란에서는 그 횃불을 들고 밤하늘의 별들을 향해 제사를 올리는, 신비로운 사제들의 행렬이 수백 년 동안 끊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들이 보존했던 별들의 지혜와 신성마법의 전통은, 이슬람 세계를 거쳐 훗날 르네상스 유럽의 마법사들과 철학자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치며, 헤르메스의 강물이 더욱 신비롭고 깊은 물줄기를 형성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게 됩니다.
4-3. 자비르 이븐 하이얀(Jabir ibn Hayyan)과 연금술의 영적 전환
지혜의 강물이 새로운 땅을 만날 때, 그것은 단순히 그 땅 위를 스쳐 지나가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때로는 그 땅의 가장 깊은 곳에 자리한 독특한 사상적 광맥과 만나,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새로운 빛깔과 무게를 지닌 보석을 잉태하기도 합니다. 헤르메스 주의의 한 갈래인 연금술이 이슬람 세계라는 비옥한 대지에 이르렀을 때 바로 그러한 신비로운 화학 반응이 일어났습니다. 고대 이집트와 헬레니즘 세계의 연금술이 주로 물질의 변성이라는 실용적 목표에 집중했다면, 이슬람 세계에서 연금술은 우주와 영혼의 비밀을 해독하고 신의 창조 행위에 동참하려는 숭고한 영적 수행, 즉 ‘신성한 기술(Ars Sacra)’로 변모했습니다. 이 경이로운 전환의 중심에는, 그 이름 자체가 전설이 된 한 명의 위대한 인물, 자비르 이븐 하이얀(Jabir ibn Hayyan, 라틴어 세계에서는 ‘게베르(Geber)’로 알려진)이 서 있습니다. 그는 단순한 실험가가 아니라, 연금술을 통해 우주와 영혼의 궁극적인 ‘균형(Mīzān)’을 찾고자 했던 철학자이자 신비가였습니다.
자비르라는 인물은 그의 저작만큼이나 신비에 싸여 있습니다. 그는 8세기 후반에서 9세기 초반, 시아파 이슬람의 중요한 중심지였던 쿠파(Kufa)에서 활동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시아파의 제6대 이맘(Imam)인 자파르 알사디크(Ja'far al-Sadiq)의 제자였음을 자처합니다. 그에게 연금술은 스승으로부터 비밀리에 전수받은 신성한 지식, 즉 이슬람의 외적인 율법(샤리아) 이면에 숨겨진 내적인 진리(하키카, Haqiqah)를 탐구하는 길이었습니다. 자비르의 이름으로 전해지는 수백 권의 방대한 저작들은, 한 개인이 평생에 걸쳐 썼다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광범위한 주제를 다루고 있어, 오늘날 학자들은 ‘자비르’가 한 명의 개인이기보다는 그의 사상을 따르던 학파 전체를 지칭하는 이름일 수 있다고 추정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이름이 상징하는 하나의 통일된 사상 체계입니다. 자비르 학파는 헤르메스 주의의 상응 원리를 이슬람의 신학 및 철학, 그리고 숫자 상징주의와 결합하여, 이전 시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정교하고 심오한 연금술 이론을 구축했습니다.
그 이론의 심장부에 자리한 핵심 개념이 바로 ‘균형(Mīzān)’의 철학입니다. 자비르에게 우주 전체는 신이 완벽한 균형의 원리에 따라 창조한 한 권의 거대한 책이었습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네 가지 원소적 성질, 즉 뜨거움(熱), 차가움(冷), 마름(乾), 축축함(濕)의 조합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각각의 사물은 이 네 가지 성질을 특정한 수치적 비율, 즉 완벽한 균형 상태로 품고 있을 때 비로소 그 고유한 본성을 드러냅니다. 예를 들어, 가장 완벽한 금속인 황금(Gold)이 그토록 안정되고 고귀한 이유는, 그 안에 있는 네 가지 성질이 1:3:5:8과 같은 신성한 수학적 비율에 따라 완벽한 균형을 이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 납이나 주석과 같은 값싼 금속들이 불완전한 이유는, 그 내부의 균형이 깨져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연금술사의 작업은 더 이상 값싼 금속에 어떤 신비로운 물질을 첨가하여 기적적으로 바꾸려는 시도가 아닙니다. 그것은 마치 숙련된 의사가 환자의 몸속에 과하거나 부족한 체액의 균형을 바로잡아 건강을 되찾게 하듯, 불완전한 금속의 내부로 들어가 그 성질들의 불균형을 정밀하게 교정하는 과학적이고도 철학적인 과정이 됩니다. 연금술사는 먼저 분석을 통해 특정 금속이 어떤 성질을 너무 많이, 혹은 너무 적게 가지고 있는지를 정확히 파악해야 합니다. 그리고 가열(뜨거움을 더함), 냉각(차가움을 더함), 증류(마름을 더함), 용해(축축함을 더함)와 같은 정교한 실험 과정을 통해, 그 내부의 비율을 이상적인 황금의 비율로 재조정해야 합니다. 이 과정에서 사용되는 신비로운 물질 ‘엘릭시르(Elixir)’는 마법의 약이 아니라, 이 균형을 회복시키는 촉매제이자, 완벽한 균형의 원리 그 자체가 물질화된 것으로 이해되었습니다.
자비르는 이 균형의 원리를 물질 세계에만 국한시키지 않았습니다. 헤르메스 주의의 대전제인 ‘위에서와 같이 아래에서도’의 원리에 따라, 물질의 세계에서 발견된 균형의 법칙은 그대로 인간 영혼의 세계에도 적용되었습니다. 아니, 오히려 물질의 연금술은 영혼의 연금술을 위한 하나의 거대한 비유이자 실천적 훈련 과정이었습니다. 연금술 실험실(Laboratory)은 기도와 명상을 위한 공간(Oratory)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연금술사는 실험 용기(Alembic) 안에서 일어나는 물질의 변화를 관조하며, 동시에 자기 자신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심리적, 영적 변화를 성찰해야 했습니다. 실험 용기 안의 납이 정화되고 균형을 찾아가듯, 연금술사의 영혼 속에 있는 탐욕(차가움과 마름의 과잉), 분노(뜨거움과 마름의 과잉), 무기력(차가움과 축축함의 과잉)과 같은 불균형한 격정들이 정화되고 조화로운 상태에 이르러야 했습니다.
이처럼 자비르에게 ‘위대한 작업(Magnum Opus)’의 진정한 목표는 황금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연금술사 자신의 영혼이 모든 대극적 성질들을 통합하여 완벽한 균형 상태, 즉 우주적 조화와 하나가 된 온전한 인간으로 거듭나는 것이었습니다. 실험실에서의 성공은 영적 상태의 진전을 반영하는 외적인 징표였으며, 내면의 정화 없이는 결코 물질의 완벽한 변성을 이룰 수 없다고 믿었습니다. 그는 연금술사가 작업을 시작하기 전에 반드시 기도를 통해 마음을 정화하고, 신에게 겸손한 자세로 지혜를 구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이로써 연금술사는 단순한 기술자나 장인에서, 우주의 비밀을 엿보고 신의 창조 행위에 동참하는 신성한 사제이자, 자기 자신을 제물로 바쳐 더 높은 차원의 존재로 거듭나려는 구도자가 되었습니다.
자비르는 헤르메스 주의의 상응 원리를 이슬람의 핵심 사상인 ‘타우히드(Tawhid)’, 즉 신의 절대적 유일성과 통일성 사상과 절묘하게 결합시켰습니다.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다양성과 복잡성은 결국 유일하신 신의 권능이 서로 다른 비율과 형태로 발현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따라서 깨진 균형을 회복하여 불완전한 물질을 완전한 상태로 되돌리는 연금술적 행위는, 흩어진 다양성을 근원적인 통일성으로 되돌리는 것이며, 이는 곧 신의 유일성을 지상에서 구현하려는 경건한 종교적 실천이 되었습니다. 연금술사는 물질의 내면에 숨겨진 신성한 수학적 질서를 해독하고 그것을 재현함으로써, 창조주가 세상을 만들 때 사용했던 바로 그 지혜의 언어를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자비르 이븐 하이얀과 그의 학파는 연금술을 단순한 화학 기술의 차원에서 우주론과 심리학, 그리고 신학이 결합된 심오하고 정교한 ‘신성한 과학’으로 격상시켰습니다. 그들은 ‘균형’이라는 핵심적인 프리즘을 통해, 물질의 변성과 영혼의 구원, 그리고 우주의 창조가 모두 동일한 하나의 법칙 아래 있음을 통찰했습니다. 이로써 헤르메스 주의의 강물은 이슬람이라는 비옥한 대지를 흐르며, 그리스의 철학적 사변에 더하여, 정교한 이론 체계와 구체적인 영적 수행 방법론이라는 강력한 힘을 얻게 되었습니다. 자비르가 닦아놓은 이 길을 따라, 연금술은 이후 수 세기 동안 이슬람 세계와 중세 유럽의 가장 깊이 있는 지성인들을 매료시키는 지적이고도 영적인 탐구의 왕도가 되었습니다. 그의 실험실에서 피어오른 연기는 단순한 화학 증기가 아니라, 물질 속에서 영혼을 발견하고, 영혼 속에서 우주의 조화를 찾으려 했던 인간의 가장 숭고한 열망이 피워 올린 한 줄기 기도의 향연이었던 것입니다.
4-4. 『피카트릭스, Picatrix』: 아랍 세계에서 집대성된 성위 마법(Astral Magic)
지혜의 강물이 역사의 물길을 따라 흐르며 때로는 철학의 깊은 호수를 이루고, 때로는 신학의 장엄한 폭포를 만들어낸다면, 그중에서도 가장 비밀스럽고 강력한 실천의 급류를 형성한 지점이 존재합니다. 그 급류의 모든 힘과 소용돌이를 한 권의 책 안에 담아낸 것이 바로 『피카트릭스』라 알려진 전설적인 마법서입니다. 아랍어 원제인 『가야트 알 하킴, Ghāyat al-Ḥakīm』, 즉 ‘현자의 궁극적 목표’라는 이름이 암시하듯, 이 책은 단순히 지식을 탐구하는 것을 넘어, 그 지식을 사용하여 세계에 실질적인 영향을 미치고 궁극적으로는 우주적 힘과 하나가 되고자 했던 헤르메스주의적 마법의 정수를 담고 있습니다. 『코르푸스 헤르메티쿰』이 신을 향한 영혼의 상승을 명상적으로 그리는 철학시라면, 『피카트릭스』는 그 상승을 위해 지상의 물질과 천상의 힘을 의도적으로 결합하는 구체적인 기술을 담은, 가장 정교하고 체계적인 비의적 실천 매뉴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슬람 황금시대에 집대성된 이 한 권의 책은, 훗날 르네상스 유럽의 마법사들에게 가장 위험하고도 매혹적인 영감의 원천이 되었습니다.
『피카트릭스』의 기원은 그 내용만큼이나 신비에 싸여 있습니다. 이 책은 10세기에서 11세기경, 이슬람 통치 하의 스페인(알안달루스)에서 활동했던 수학자이자 천문학자인 마슬라마 알 마즈리티(Maslama al-Majriti)에 의해 쓰였다고 전해지지만, 그 내용은 한 개인의 창작물이라기보다는 수 세기에 걸쳐 축적된 지혜의 총체에 가깝습니다. 그 안에는 헬레니즘 시대의 헤르메스주의적 우주관, 앞서 살펴보았던 하란의 사비교도들이 실천했던 구체적인 항성 숭배 의례, 신플라톤주의의 유출(Emanation) 이론, 그리고 페르시아와 아랍 세계에서 발전한 정교한 점성술 지식이 하나의 거대한 모자이크처럼 결합되어 있습니다. 즉, 『피카트릭스』는 알렉산드리아에서 시작되어 바그다드와 하란을 거치며 더욱 깊고 풍성해진 헤르메스 주의의 실천적, 기술적 측면을 집대성한 하나의 백과사전과도 같은 존재입니다. 이 책의 목표는 명확합니다. 그것은 ‘현자(al-Ḥakīm)’, 즉 우주의 비밀을 아는 자가 어떻게 그 앎을 힘으로 전환시킬 수 있는지를 가르치는 것입니다.
이 마법의 실천을 가능하게 하는 철학적 엔진은 물론, 우리가 이미 탐구했던 헤르메스 주의의 근본 원리들입니다.
첫째, ‘상응(Correspondence)’의 원리에 따라, 천상의 모든 존재(행성, 항성, 별자리)는 지상의 모든 존재(광물, 식물, 동물, 인간의 신체 부위, 심지어 특정 소리와 문자까지)와 비밀스러운 연결고리를 맺고 있습니다.
둘째, ‘공감(Sympathy)’의 원리에 따라, 이 연결고리는 단순한 유사성이 아니라, 실제적인 힘이 오고 가는 통로가 됩니다. 따라서 지상에서 특정 식물을 태우는 행위는, 그것과 상응하는 천상의 행성의 힘을 끌어당기거나 진정시키는 효과를 낳습니다.
셋째, 우주는 죽은 물질의 집합이 아니라, 살아있는 영혼(Anima Mundi)을 지닌 거대한 유기체이며, 특히 행성과 별들은 단순한 천체가 아니라 각각 고유한 의지와 힘을 지닌 신성한 지성체, 즉 ‘루하니야트(rūḥāniyyāt)’라는 것입니다.
『피카트릭스』의 마법은 바로 이 살아있는 우주와의 소통 기술입니다. 마법사는 더 이상 기적을 행하는 초능력자가 아니라, 우주라는 거대한 악기의 구조를 완벽하게 이해하고, 그 각 현이 어떤 소리를 내는지를 알아, 자신이 원하는 교향곡을 연주하려는 지휘자와 같습니다. 이를 위해 마법사, 즉 ‘현자’에게는 두 가지가 요구됩니다. 첫째는 방대한 ‘지식’입니다. 그는 언제 어떤 별의 힘이 강해지고 약해지는지를 알기 위해 정교한 점성술사가 되어야 하며, 수백 가지에 이르는 지상의 사물들이 각각 어떤 천상의 힘과 공명하는지를 담은 거대한 상응의 목록을 모두 암기하고 있어야 합니다. 둘째는 영적인 ‘준비’입니다. 현자는 자신의 영혼이 우주의 신성한 힘을 담을 수 있는 깨끗하고 순수한 그릇이 되도록 끊임없이 스스로를 정화해야 합니다. 그는 기도를 통해 자신의 의지를 신의 의지와 조화시키고, 금욕과 정결 의식을 통해 육체의 욕망을 다스려야 합니다. 지식과 영성이 결합될 때, 비로소 현자는 천상의 힘을 지상으로 끌어내리는 ‘신성한 중재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총 4권으로 구성된 『피카트릭스』의 내용은 이러한 철학적 배경 위에서 매우 체계적으로 전개됩니다. 제1권과 제2권은 마법을 실천하기 위해 반드시 알아야 할 이론적 지식들을 상세히 설명합니다. 하늘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 행성들의 본성과 힘은 어떠한지, 그리고 가장 중요한, 수많은 동식물과 광물들이 각각 어떤 별들과 상응 관계에 있는지를 백과사전처럼 꼼꼼하게 기술합니다. 이곳에서 독자는 특정 목적, 예를 들어 ‘사랑을 얻기 위해’ 혹은 ‘적을 물리치기 위해’ 어떤 행성의 힘을 이용해야 하며, 그 힘을 끌어내리기 위해서는 어떤 종류의 돌과 향료, 그리고 어떤 이미지를 사용해야 하는지에 대한 모든 이론적 정보를 얻게 됩니다.
그리고 제3권과 제4권은 이 이론을 바탕으로 한 구체적인 마법 실천, 즉 ‘작업(Operation)’의 방법을 다룹니다. 그 핵심은 단연 탈리스만(Talisman) 제작 마법입니다. 탈리스만은 단순한 행운의 부적이 아니라, 특정 천체의 힘을 의도적으로 담아낸 일종의 ‘우주적 배터리’입니다. 그 제작 과정은 더없이 정교하고 엄격합니다. 마법사는 먼저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목적에 가장 부합하는 행성을 선택합니다. 그리고 점성술 계산을 통해, 그 행성이 천궁에서 가장 강력하고 길한 위치에 놓이는 정확한 시간을 찾아냅니다. 바로 그 운명적인 시간에, 마법사는 정화된 몸과 마음으로, 선택된 행성에 상응하는 금속이나 보석 위에, 그 행성의 힘을 상징하는 정해진 이미지나 문자(Sigil)를 새겨 넣습니다. 이 모든 과정은 상응하는 향을 피우고, 그 행성의 지성체를 부르는 간절한 기도와 주문을 읊조리는 가운데 진행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탈리스만은, 그것이 만들어진 순간의 천상의 힘을 그 안에 영원히 봉인하게 되며, 소유자에게 지속적으로 그 힘의 영향을 미친다고 믿어졌습니다.
『피카트릭스』가 후대에 악명을 떨치게 된 이유 중 하나는, 이러한 작업에 때로는 피나 뇌, 정액과 같은 매우 충격적인 유기물을 재료로 사용하도록 권고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사랑이나 부와 같은 긍정적인 목적뿐만 아니라, 도시를 파괴하거나, 적에게 저주를 내리는 등 파괴적인 목적을 위한 마법들도 상세히 기술되어 있습니다. 현대인의 관점에서는 ‘흑마법’으로 보일 수 있는 이러한 측면들은, 사실 선과 악의 이분법보다는 창조와 파괴라는 우주의 양면적인 힘을 모두 이해하고 다스리려 했던 전근대적 세계관의 산물입니다. 마법사는 행성들이 때로는 길한 영향력을, 때로는 흉한 영향력을 미치듯, 자연의 모든 힘을 통제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 경이롭고도 위험한 지식의 집대성은 13세기에 이르러 유럽 세계에 그 모습을 드러냅니다. 1256년, 카스티야의 현명왕 알폰소 10세(Alfonso X el Sabio)의 궁정에서 아랍어로 된 『가야트 알 하킴』이 스페인어로 번역되었고, 곧이어 라틴어로 번역되어 『피카트릭스』라는 이름으로 유럽의 지성계에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소수의 필사본 형태로 비밀스럽게 유통되던 이 책은, 르네상스 시대의 마법사들과 철학자들에게 성서와도 같은 영향력을 미쳤습니다. 마르실리오 피치노가 행했던 행성 부적 요법, 하인리히 코르넬리우스 아그리파(Heinrich Cornelius Agrippa)가 그의 저서 『오컬트 철학에 관한 세 권의 책』에서 집대성한 방대한 상응 체계, 그리고 파라켈수스(Paracelsus)의 의학-점성술 이론의 배후에는 어김없이 『피카트RIX』의 깊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습니다. 이 책은 르네상스 마법에 체계적인 이론과 구체적인 실천 방법론을 제공한 가장 중요한 원천 문헌이었습니다.
그러나 『피카트릭스』의 영향력은 그 악명과 함께했습니다. 교회의 눈에, 이 책에 담긴 행성 숭배 의식과 비기독교적인 재료들은 명백한 악마 숭배이자 이단적 행위였습니다. 이로 인해 『피카트릭스』는 가장 사악한 흑마법 서적 중 하나로 낙인찍혔고, 그 소유만으로도 종교재판의 화형대에 설 수 있는 위험한 책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탄압은 오히려 이 책의 신비로운 권위를 더욱 강화시켰고, 금지된 지식을 갈망하는 이들에게는 더욱더 매력적인 탐구의 대상이 되게 했습니다.
『피카트릭스』는 이슬람 세계에서 집대성된 헤르메스주의적 성위 마법의 기념비적인 성취입니다. 그것은 우주를 단지 이해의 대상으로 보는 것을 넘어, 인간이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그 힘을 자신의 의지에 따라 활용할 수 있는 가능성의 문을 활짝 열어젖혔습니다. 헬레니즘의 철학과 하란의 의례, 그리고 아랍의 과학이 하나의 거대한 용광로 속에서 녹아들어 탄생한 이 강력한 마법서는, 이후 유럽의 르네상스 마법과 서양 비의 전통 전체에 가장 깊고 지속적인 영향을 미친 지하의 강물이 되었습니다. 『피카트릭스』는 “위에서와 같이 아래에서도”라는 헤르메스의 위대한 선언이, 어떻게 한 시대의 가장 정교하고도 담대한 실천으로 구현될 수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가장 강력하고도 생생한 역사적 증거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