닉네임 "머신"을 달기 전의 나.
나는 호주에서 블루 마운틴이라는 산자락을 이은 어느 작은 산촌에 살고 있다. 동네 크기는 충북 청주 보다 조금 큰 크기의 동네다. 17년 전, 달랑 이혼서류만 변호사를 통해 보내왔던 전 남편에게 아이들을 뺏기지 않기 위해 아이들 옷 두 어벌만 가지고 운전하던 차의 연료가 떨어질 때까지 달려가 멈춘 곳이 이곳이다. 운전을 배운 지 얼마 되지 않아 운전하는 것에 겁을 많이 냈던 그때는 호주의 길도 잘 모르던 때였고, 지명도 온통 낯설던 시절이었다. 그날 밤 나는 머리를 둔 쪽으로 무조건 내 달리고 보는 노루였다. 지도도 없었고, GPS 또한 내겐 없었다. 그저 뒤따르던 차들이 온통 나와 아이들을 쫓는 시댁 군단인 것만 같아 그렇게 노루처럼 차를 달렸다.
처음 만난 그 동네 분들은 반쯤 정신이 나간 동양 여자와 두 어린아이들을 이해하며 품어 주었다. 임시로 지낼 곳도 마련해 주었고, 필요할 때면 서로 돌아가며 나의 이혼과정을 함께 하며 나의 편이 되어주었다. 아이들을 찾고 있을 시댁으로부터 그들은 우리들에게 새로운 이름을 만들어 불러주고 아이들을 학교에 보낼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가끔 동양인을 처음 보는 아이들이 찾아와 우리를 뚫어져라 쳐다본 적도 있었지만 그것은 인종이 달라 내려보려는 시선이 아닌, 서서히 그 동네에 우리를 받아 주려 했던 한 과정이었다. 비록 멀지 않은 곳에 블루마운틴이라는 호주 유명 관광지가 있었으나, 그 동네는 관광객들이 차를 타고 지나쳐 가는 그런 동네이다 보니 아직 동양인을 제대로 본 적 없던 어린아이들로서는 당연한 수순이었다. 나도 길에서 가끔 한국어로 무슨 무슨 여행사란 푯말을 단 관광버스가 도로 위를 지나는 것을 자주 보았지만, 그들은 결코 한 번도 우리 동네에 차를 세운적이 없었다. 그리고 나도 그때마다 고개를 숙이고 모자를 눌러썼었다.
이렇게 저렇게 산촌 생활에 적응을 해 나갈 무렵 가장 염려스러웠던 것은 나의 수입원이었다. 물론 정부에서 나오던 한부모 가정 보조금 (single parenting payment) 이 있었지만, 작은 아이가 6살이 되면서부터는 실업수당( Job seeker)으로 전환이 되었다. 먼저 받던 한부모 가족 보조금 보다 조금 낮은 액수의 보조금이고, 집안의 막내 아이가 나이가 돼서 학교에 입학했으니 낮에 충분히 일을 할 수 있는 시간이 생겼으므로 일을 권장하는 정부의 시스템이기도 했다. 그리고 구직수당을 받는 사람들은 반드시 2주마다 job center에 가서 나의 구직 활동이 어떻게 되어 가고 있는지 담당자에게 보고를 해야만 했었는데 나는 나의 담당자를 만나러 갈 때마다 치욕에 가까운 좌절감을 느끼곤 했었다. 그 이유는 왜 일을 구하지 못하고 있는지 묻는 그에게 나는 이 작은 동네에서는 여자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답을 했고, 내 말을 듣던 그는 비웃듯 입꼬리를 올리곤 하였다. 사실 처음 이곳에 정착하자마자 일을 찾기 시작하였으나 가끔 운이 좋으면 하루나 이틀정도 일을 할 수 있기는 했지만 정기적인 수입이 되는 일을 찾기란, 당시 카페나 식당조차 없던 산촌에서는 하늘의 별 따기.. 바로 그것이었다. 항상 똑같은 질문과 답을 주고받았던 그 인터뷰는 잘 가.. 그래 다음에 또 보자.. 좋은 하루 보내 라던지 하는 살가운 인사는 생략된 채 매번 그와 나는 서로 다른 이유로 툴툴거리며 인터뷰를 끝냈었다. 인터뷰가 끝나면 반드시 들곤 하였던 그 처참한 심정은 당장에 일을 찾아내고 그 잘난 보조금을 이제는 받지 않겠다고 그 담당자 책상을 내려치고 싶었지만 정작 나는 한동안 무얼 해야 할지 감조차 잡을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의 시선을 잡았던 어느 광경에 나는 마치 누군가가 나의 심장을 가볍게 툭 치는듯한 찌릿한 느낌을 받았었다. 나보다도 작을 것 같던 여린 몸집의 백인 여자가 자신의 키보다도 크지 싶은 기계로 넓디넓은 크기의 잔디밭에서 잔디를 깎고 있었다. 그 여자의 몸놀림은 어느 것 하나도 부자연스럽지가 않았고 마치 이쯤이야 하는 것처럼 그녀는 시끄러운 모터소리를 내던 그 무거운 기계를 이리저리 방향을 틀며 아주 익숙한 듯 굴어댔다. 마치 내게 보란 듯 땅땅거리던 그 낡은 모터 소리는 나에게 외치는 야유 같았고 조롱이었다. 나는 왜 그런 일들은 당연히 남자들이나 하는 일이라고만 생각했던 걸까.. 시끄럽고, 더럽고, 힘든 일들은 모두 남자 일이고, 왜 여자는 그저 여자다운 일을 해야 한다고 여기고 있었을까? 왜 여태껏 여자일이 따로 있다고만 생각했던 걸까? 언제 어디서 이렇게 잘못 주입이 되었던 걸까? 나는 여자이기도 하지만 또 사람이고 그리고 엄마인데.. 여태껏 여자 코스프레나 하며 나 스스로의 바운더리랍시고 작고 앙증맞은 여자여자 선을 그어 놓고 그 작은 원 안에 들어앉아 좁다고, 답답하다고, 징징거렸던 것이다. 나는 아주 오래오래 그 자리에 서서 그 여인의 멋진 잔디 깎기를 바라보았다. 그제야 나는 눈을 뜨는 것 같은 세상 시원함에 해결책을 찾은 듯 숨이 트이는 걸 느꼈었다. 그리고 나는 나 스스로에게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웃어 주었다. 그 구직센터의 담당자처럼. 그가 옳았던 것이다.
나는 그날 당장 그동안은 그냥 지나치기만 했던 인근의 수많은 각종 농장들을 찾아다녔다. 아무 일이나 할 수 있다고... 일을 달라고... 그리고 일을 주던 사람들도 여자일 남자일 구분해 일을 시키지 않는다는 걸 나는 알게 되었다. 물론 일을 하다 보면 힘에 부쳐 힘들 때도 있었기에 도움을 받을 때도 있었지만 그건 내가 여자라서 도움을 받는 게 아닌 어려움에 처한 사람이기에 받았던 다른 사람들의 친절이었다. 나 또한 누군가가 힘들어하면 사람으로서 돕기도 했다.. 그게 남자이든 여자이든. 호주에서 처음 배운 한 가지는 일에 있어서는 여자일 남자일이 구분 지어지지 않았단 것이다. 집안일 포함이다. 나는 전과는 달리 일을 골라서 나갈 정도로 일이 많아졌고, 20여 년 동안 일하면서 나를 지켜봐 오던 사람들이 붙여 준 나의 별명은 머신(Machine)이다. 나는 내게 주어진 일은 가리지 않고 해 냈다.
내 바람대로 구직센터 담당자에게 가서 나의 활발하고도 바쁜 구직 활동에 대해 자랑할 수 있었다. 물론 책상은 내려치진 않았지만 대신 나는 인터뷰를 마치고 나오면서 담당자에게 인사를 먼저 해줬다.
Have a good one!!!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