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몽당연필

환경보호, 미니멀리즘, 유년시절

by 디카이분의일

요즘 우리 주변은 물건들로 가득하다.

제조업을 우선하는 경제발전의 전리품으로 우리는 비로소 과거의 궁핍에서 벗어나 풍요로운 삶을 누리게 되었다. 그러나, 얻은 것이 있으면 잃은 것도 있는 법이다. 우리 주변은 불필요한 물건들로 넘쳐난다. 행복감과 편리함을 제공해 준 물건들이 점점 스트레스가 되고 있다. 환경과 미래를 생각하면 더 이상의 질주를 멈춰야 한다. 인간의 욕망을 줄여야만 할 것이다.

한국전쟁 전에 태어난 우리 부모님 세대는 어렵고 힘든 시대를 살아왔다. 이분들에 비교할 수는 없지만 1970년대 초에 태어난 나의 유년시절을 돌이켜 보면 그렇게 넉넉하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족한 부분을 잘 관리하고 배분하면서 살아왔던 것 같다.

유년시절에 어렵게 살았던 대표적 예가 있다. 양을 불려서 여러 명이 나눠먹기 좋도록 라면에 국수를 함께 넣어 끓여 먹던 ‘라면국수’가 대표적이다.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면 요즘 MZ세대들은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들의 기준에서 상상도 못 할뿐더러 이해조차 안 되는 것이다. 나는 궁핍과 풍요의 시대를 모두 살아왔다. 두 시대를 모두 겪어 본 나로서는 물론 풍요로운 삶이 낫다. 그렇다고 해서 궁핍의 시대를 부정하거나 외면하고 싶지는 않다.

유년 시절, 명절이 되어야 새 옷과 새 신발을 얻을 수 있었다. 공책은 아껴 쓰기 위해 반을 접어 가운데 줄을 그어 사용했고, 심이 얼마 남지 않은 몽당연필은 볼펜대에 끼워 썼다. 오죽하면 자석 달린 큰 비닐 플라스틱 필통에 매끄럽게 깎여진 연필과 뽀얀 지우개로 채워져 있는 부잣집 친구가 부러웠던 것도 진심이다.

미니멀리즘을 실천해 온 지 10년 정도 되어간다. 침대와 소파 버리기로 시작된 미니멀리즘의 시작이 지금은 불필요한 생각 버리기와 인간관계의 정리까지 폭을 넓혔으니 진도가 많이 나갔다. 그래도 물건 버리기는 여전한 진행형이고, 그만큼 어렵고 힘든 일도 없다.

며칠 전, 그동안 세월의 흔적을 켜켜이 간직한 창고를 정리했다. 오래된 장난감이며 오랜 시간 찾지 않아 방치된 각종 공구와 생활용품들로 가득했다. 정리는 엄두도 못 냈다. 그냥 물건을 꺼내 쓰레기봉투로 가져가는 것이 고작이었다. 사실 쓸만한 물건도 똑같은 것이 여러 개 있는 경우가 많아서 복잡하게 자리만 차지하고 있었다.

버린 물건 중 가장 많은 것은 학용품이었다. 광택이 살아 있어 번쩍번쩍한 만년필과 잉크가 채워져 있는 볼펜, 한 번도 칼이 닿지 않은 새 연필, 비닐포장이 씌워진 채 가격표까지 붙어있는 지우개가 수두룩했다.

이 물건들을 볼 때면 아깝다는 생각이 앞선다. 하지만 깨끗하게 정리해서 따로 보관해 둬도 결국 찾지 않는 물건이 된다. 그리고 이것들은 고스란히 쓰레기봉투로 들어가고 만다. 이 사실은 10년 동안 미니멀리즘을 실천 온 결과, 몸소 체득한 불변의 진리다. 결국 1년 동안 찾거나 쓰지 않은 물건은 버리는 것이 가장 좋은 정리방법이었다.

그래도 한 번도 안 쓴 물건을 버릴 때는 죄의식을 느낀다. 특히, 우리가 터를 잡고 있는 지구에게 가장 미안하다. 신중하게 물건을 구입해야겠다는 다짐을 몇 번씩 하지만, 구입 한 물건 중에는 나중에 불필요해지는 물건들이 많이 생긴다.

아직도 쓸만한 연필을 한 움큼 쥐어 쓰레기봉투로 가져가려고 하는 순간, 큰 연필들 사이에서 작은 몽당연필이 바닥으로 떨어져 빙그르르 뒹굴었다. 그 모습을 보니, 어릴 적 책상 위에 서로의 몽당연필을 마주 두고 손가락으로 튕겨 먼저 바닥으로 떨어뜨리는 놀이가 생각났다. 요즘이야 몽당연필 쓸 일이 없는 아이들이 이런 놀이를 할 리는 만무하고, 컴퓨터 게임과 하루 종일 프로그램을 쏟아내는 텔레비전이 있는데, 이 놀이에 재미를 느낀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놀이의 핵심은 손가락으로 몽당연필의 끝부분을 튕겨 회전력을 최대한으로 주고 적당한 추진력으로 상대편의 몽당연필을 맞춰 바닥으로 떨어뜨리는 것이다. 회전력을 최대한으로 주기 위해서는 몽당연필 양쪽을 모두 깎는 것이 유리했다. 놀이에서 지는 쪽이 굴밤을 맞거나, 이긴 쪽이 몽당연필을 갖는 것이 일반적인 벌칙과 보상이었다.

바닥에 떨어진 몽당연필을 주웠다. 연필심이 흔들렸다. 칼로 정성스럽게 손질했다. 연필심과 나뭇결이 아름답게 빛났다. 그리고 몽당연필을 볼펜대에 끼웠다. 옛날 유년시절로 돌아간 느낌이었다. 아! 부족했어도 행복했던 나의 유년시절!

볼펜대에 끼워져 예쁘게 만들어진 몽당연필을 아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아들! 이게 몽당연필인데 아빠 어렸을 때는 이렇게도 썼다.” “신기하지?”

몽당연필을 들고 즐겁게 이야기하는 나에게 아들이 보인 반응은 시큰둥했다.

“에이, 아빠 그게 뭐예요, 그냥 버리세요. 지금이 어떤 시댄데.”

그렇다. 시대가 바뀌었다. 그래도 물건을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만큼은 지켜지길 바란다. 거창하게 지구를 지키자는 구호를 외치고 싶지는 않다. 다만, 물건을 살 때는 정말 필요한 것인지 깊이 생각해서 결정해야 한다. 이것이 불필요하게 버려지는 물건을 줄이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물건이 지겹거나 주변환경과 안 어울려 버려지는 물건은 없어야 한다.

작은 소망이 있다. 이 세상을 떠날 때, 남길 물건은 책상 하나, 자서전 한 권, 옷 몇 벌이면 족하다. 실현 불가능한 일이라고 누군가가 비아냥대도 좋다. 그래도 노력은 할 것이다. 거기에 가까워지면 그만이다.

나는 오늘도 내 주위에 불필요한 것은 없는지, 버릴 건 없는지 찾고 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메트릭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