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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중한 사람

선거, 프로야구, 스티커북

by 디카이분의일

선거승리를 위하여 커다란 스피커를 싣고 시내 곳곳을 휘젓고 다니는 유세차량과 경쾌한 홍보음악에 맞춰 일사불란하게 율동을 선사하는 운동원들로 인해 선거분위기가 한층 고조되고 있는 요즘이다.

집 앞에는 여느 때처럼 출마자들의 선거벽보가 질서 있게 부착되어 있었다. 오가는 사람들이 쉽게 볼 수 있는 곳을 골라 붙여 놓았는데도 불구하고 관심은 그다지 크지 않은 듯했다.

여유 있는 주말 오후 산책길에 선거벽보와 다소 긴 시간을 마주했다. 지지정당이나 후보자들에 대한 호불호를 떠나 모두 환하게 웃고 있어서 기분은 좋았다. 지지자는 이미 정했지만, 나머지 후보들도 끝까지 최선을 다해서 원하는 성과 거두기를 마음속으로 응원했다.

선거 벽보를 한참 동안 바라보니 문득 초등학생 시절 추억이 생각났다. 프로야구선수 스티커북을 천신만고 끝에 완성한 일이다. 후보자들의 선거 벽보가 마치 어린 시절 열심히 모았던 프로야구선수들의 스티커처럼 보여서 입가에는 나도 모르게 미소가 흘렀다.

초등학교 시절에 야구와 축구는 가장 즐겨한 놀이였다. 축구보다 야구가 더 좋았다. 야구에 대한 열정은 자연스럽게 프로야구선수들에 대한 동경과 사랑으로 이어졌고 선수들의 인물 스티커를 모아 붙여 책으로 완성하는 놀이가 널리 유행되기도 했다. 별것 아니라고 치부할 수도 있지만 그 시절 무엇보다 가치 있고 기억에 남는 놀이다.

한국프로야구는 1982년도에 출범했다. 내가 초등학교 4학년 때다. ‘어린이에게 꿈을, 젊은이에게 낭만을 그리고 국민에게는 건전한 여가 선용을’이라는 캐치프레이즈로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단숨에 최고의 스포츠로 자리매김했다.

어릴 적 야구 열기는 대단했다. 자기가 응원하는 프로야구 구단의 유니폼을 입는 것이 최고의 패션이자 자랑이었고, 등교할 때 야구 배트와 글러브를 교과서보다 먼저 챙겼다. 수업이 끝나자마자 운동장으로 내달려 친구들과 해가 질 때까지 놀다가 귀가가 늦어지는 것은 다반사였다.

프로야구의 인기로 어린이들을 위한 다양한 즐길 거리가 쏟아졌다.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이 앞에서 잠깐 언급한 프로야구선수 스티커북 만들기다. 스티커북을 완성하면 꽤 값나가는 야구용품을 선물로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스티커를 모으기 위해서는 많은 용돈이 필요했고, 친구들과 서로 갖고 있지 않은 스티커를 교환하기도 하고, 사정사정해서 같은 스티커를 여러 장 가지고 있는 친구에게 받기도 하는 등 큰 노력과 정성이 필요한 힘든 과정이었다.

스티커북은 해태타이거즈, OB베어스, 롯데자이언츠, 삼미슈퍼스타즈, 삼성라이온즈, MBC청룡 이상 6개 팀별로 감독과 선수 이름이 인쇄된 두꺼운 용지로 제작되어 있었는데, 가로세로 5센티 남짓한 여러 개의 사각형에 인물사진이 인쇄된 스티커를 붙여 완성하는 단순한 놀이였다.

학교 앞 문방구에서 빈칸이 인쇄된 스티커북은 공짜로 받을 수 있었고, 그 안을 채워 붙일 스티커는 구매해야 했다. 스티커는 내용물을 절대 볼 수 없도록 꼼꼼하게 두 장씩 비닐로 포장되어 있었고, 전지 크기의 종이판에 수십 개의 비닐 포장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50원을 지불하면 하나를 뜯을 수 있었다.

장효조, 이만수, 김봉연, 김일권, 김시진, 박승호, 최동원 등 한 시대를 풍미했던 야구 선수를 아직 스티커 속 인물로 기억하고 있다. 얼굴이 유난히 컸던 얼큰이 박승호, 김시진은 얼굴이 진짜 작았는지 멀리서 찍은 건지 모르겠지만 그냥 작았다. 장효조는 야구 배트를 어깨에 걸치고 있었던 것 같다.

스티커북을 완성하는데 1년 넘게 걸렸다. 스티커를 뽑다 보면, 이미 가지고 있는 선수들을 다시 뽑는 경우도 많았다. 그때마다 실망했고, 주머니는 가벼워졌다. 평범한 선수는 잘 뽑혔다. 단골로 뽑히는 선수는 박승호였는데 어린 마음에도 참 미운 선수였다.

동심을 울리는 얄팍한 업체의 상술이었을 테지만 당시를 기억하면 성적이 우수한 선수들의 스티커는 매우 귀했다. 타자 장효조와 투수 김시진을 뽑는 것은 정말 하늘의 별 따기였다.

스티커북을 완성해 가면서 조금씩 요령도 생겼다. 친구들과 비교해서 여분으로 가지고 있던 것을 다른 그것과 교환도 하고, 얻기도 하면서 완성에 걸리는 시간을 많이 당겼다. 그렇지만 장효조와 김시진은 여전히 귀했고 결국, 이 둘 때문에 끝까지 완성하지 못한 친구들도 많았다.

그래도 인내심을 가지고 끝까지 도전한 끝에 스티커북을 완성했고 선물도 받았다. 완성한 스티커북은 문방구에 반납하는 바람에 가질 수는 없었지만, 그때의 기쁨은 추억으로 잘 간직하고 있다.

우리는 살면서 수많은 사람과 인연을 맺는다. 때론 짧게 때론 길게 이어질 수도 있다. 혼자 살지 않는 이상 죽을 때까지 인연은 계속된다. 나와 맺은 인연들은 나를 어떻게 기억할까? 박승호처럼 가치 없는 사람으로 기억되기보다 장효조와 김시진처럼 누군가에게 절실하고 기쁨을 주는 소중한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다.

선거 벽보에 붙여진 스티커 인물 같은 이들도 각각의 지지자들에게 소중한 인연의 끝으로 닿을 수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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