닻 없는 이름들 / 수평선에 걸린 열두 번째 문장
바다는
닫히지 않는 문이었다
손잡이는 없고
물결만 되돌아오는
열어도
아무도 나오지 않는 문.
그날 이후로 수평선은
긋다만 숨처럼 떨렸다
멀리서 보면
아무 일도 없는 얼굴인데
물결마다
누군가의 이름이 조용히 번져 있었다
부르면
금방이라도 닿을 것 같아
입술이 먼저 떨리고
목소리는 끝내 물에 젖었다
떠오르지 못한 하루들이
빛보다 먼저 늙어가고
바람이 지나가면
물결이 일어나듯
기억은
건드리지 않아도 스스로 흔들린다.
닻 없는 이름들 / 수평선에 걸린 열두 번째 문장
아직도
도착하지 못한 아침
종이 울리지 않은 교실
열리지 않은 창문 하나
책상 위에 남겨진 온기
바다는 그날의 말을
끝까지 삼키지 못하고
오늘도 조용히 물결로 토해낸다
우리가 알아듣지 못한
목소리의 조각들이
햇빛 아래에서 잘게 부서지고
노란빛 하나, 멀리서 흔들린다
잡으려 하면
손끝에서 미끄러지고
놓아두면
더 가까이 와 가만히 머문다.
부르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부르지 못할 때 더 또렷해지는
말 대신 숨을 고르고
손 대신 가슴을 얹는다
바람이 지나간 자리마다
조용히 흔들리는 남겨진 시간
사라진 것이 아니라,
닿지 못했을 뿐이라는 감각이 오늘을 불들고 있다.
바다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데
우리는 아직 다 말하지 못했다.
멈춘 것은 바다가 아니라,
우리가 부르지 못한 이름이다.
닿지 못한 시간은 여전히 흐른다
가라앉은 것은 끝난 것이 아니기에.
그날 이후로
봄은 조금 늦게 오는 것 같았습니다
꽃은 피었지만
누군가의 시간은 거기에서 멈춰 있었고,
햇살은 따뜻했지만
그 따뜻함을 온전히 받아낼 수 없는 날들
우리는 모두
끝내 다 부르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괜찮아졌다고 말하는 순간에도
어디선가 조용히
물이 차오르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괜히 발걸음을 멈추게 되는 날들
기억은
선명해서 아픈 것이 아니라
잊힐까 봐 더 아픈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그 이름들을 꺼내어
조심스럽게 불러봅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살아가야 하는 날들 사이에서
아무 일도 아니지 않았다는 것을
서로에게 확인하듯이
바다는
아무도 데려가지 못한 채
아직도 그 자리에 남아 있는 것처럼
우리의 마음도
아직, 그때에 닿아 있습니다.
부르지 못한 이름이 가장 멀리 간다
오늘의 바다는 아직, 그들을 품고 있다
부르지 못한 이름이 오늘도 나를 부른다
기억은 사라지지 않기 위해 남는 것이 아니라, 남겨진 우리가 계속 불러야만 이어지는 숨이다.
부르지 못한 이름은 마음에서 더 오래 머뭅니다
오늘의 침묵은 가장 큰 목소리일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여전히 그때를 지나고 있습니다.
망각의 파도 속에서도 끝내 젖지 않는 마음 하나, 그것을 기억이라 부르며 서로의 숨결을 이어갑니다.
by 《아무것도 아닌 오늘은 없다》ⓒ biroso나.
잊겠다는 말은 너무 잔인하고,기억하겠다는 말은 때로 무거워, 차라리 노란 나비의 날갯짓에 그 마음을 잠시 빌려줍니다.
부디, 저 차가운 수온 아래 머물던 영혼들이 오늘 우리의 서늘한 문장이라는 옷을 입고 이제는 젖지 않는 하늘의 교정으로 가벼이 소풍 떠나기를, 그리하여 다시는 어느 누구의 계절도 이토록 차갑게 멈춰 서지 않기를.
이 글은 특정한 날을 기리기 위해 쓰였지만,
결국은 ‘남겨진 사람들의 시간’에 대한 기록이기도 합니다.
기억은 과거를 붙잡기 위한 것이 아니라,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의 태도이기도 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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