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약 동거라는 개념은 이제 더 이상 낯선 단어가 아니다. 나이 들어 새로운 인연을 맺고, 정서적·경제적으로 서로를 의지하며 살아가는 관계는 이미 현실 속에서 점점 늘어나고 있다. 그러나 이 관계가 제도적으로 인정되지 않는 한, 많은 사람들이 법적 사각지대 속에서 불안정한 삶을 이어가야 한다. 그렇기에 계약 동거의 제도화는 단지 법률 개정의 문제가 아니다. 삶의 방식이 바뀌고, 사회 구조가 바뀌며, 공동체의 윤리와 문화가 바뀌는 일이다.
우리는 이미 많은 나라에서 그 변화를 목격해왔다. 프랑스의 PACS, 네덜란드의 등록 파트너십, 독일의 동반자 계약처럼 혼인 이외의 다양한 관계를 법이 어떻게 받아들이고 보장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선례들이다. 한국에서도 이러한 논의가 본격화된다면, 이는 단순히 ‘법률의 확장’이 아니라 삶의 다양성을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사회로의 전환을 의미한다.
제도화된 계약 동거는 전통적인 혼인 중심 사회 구조에 변화를 촉진시킨다. 이는 결혼을 부정하거나 해체하자는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혼인의 역할을 보다 명확하게 하고, 결혼 외의 삶도 동등하게 존중받을 수 있도록 하는 유연한 사회로 가는 길이다.
혼인하지 않더라도 공동의 생활을 선택한 사람들에게 의료 동의권, 상속 계획, 주거 계약 등 실질적인 권리를 부여하면, 관계를 유지하는 데 있어서 감정의 부담이나 사회적 낙인이 줄어든다. 또한 자녀들과의 갈등도 감소한다. 제도적으로 합의된 관계는 가족 구성원 간의 오해를 줄이고, 오히려 세대 간 갈등을 조율할 수 있는 새로운 도구가 될 수 있다.
특히 고령 사회에서의 돌봄 문제는 점점 심각해지고 있다. 홀로 남은 노인, 배우자 없이 병을 앓는 사람들, 요양시설 입소를 꺼리는 이들에게 자율적인 계약 관계를 통한 동반 생활은 또 하나의 해답이 될 수 있다. 이때 국가와 사회는 그러한 관계를 인정하고 보호해야 할 책무를 가진다.
계약 동거의 제도화는 단지 개인의 삶에 머물지 않는다. 이는 국가의 경제 정책, 복지 시스템, 주거 정책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영향을 끼친다.
예를 들어, 연금 수급의 기준이 혼인에서 생활공동체로 확대될 수 있다면, 동거 커플도 보다 안정적인 노후 설계를 할 수 있다. 의료보험, 간병보험, 주택보조금 등 사회복지 제도도 ‘관계의 실질성’을 기준으로 조정될 수 있다면, 보다 포괄적인 사회안전망이 만들어질 수 있다.
또한 고령자 주거 정책에서 동반자 거주 형태를 반영한다면, 공동체 기반의 실버하우징, 공동체 주거 등의 모델이 현실화될 수 있다. 이는 고령자 고립 문제 해결에도 도움이 된다. 나아가 계약 동거가 제도화되면 공동세대 간 부양과 돌봄이라는 새로운 사회 윤리도 확립될 수 있다.
결국, 계약 동거 제도의 도입은 한국 사회가 보다 포용적이고 유연한 방향으로 나아가는 신호탄이 될 수 있다. 법은 변화의 마무리가 아니라 시작이다. 제도가 만들어지면 비로소 사람들은 그 안에서 새로운 삶의 방식을 시도할 수 있고, 사회는 그 실험을 통해 더 넓고 깊은 공동체로 확장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