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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서양 크루즈 일상

by 라온재

요즘은 식사 시간마다 낯익은 얼굴을 하나둘씩 마주친다. 지난 일요일 바르셀로나를 출발한 크루즈는 이미 지중해의 몇몇 항구 도시 기항지를 거쳐 현재 대서양 한가운데를 가로지르고 있다. 다음 목적지는 카리브 해. 하늘과 바다의 경계가 희미한 수평선이 사방을 둘러싸고, 그 위로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며 트랙을 달리는 아침은 어떤 도시에서도 느낄 수 없는 특별한 기분을 준다. 바람이 얼굴을 때리고, 멀리서 들려오는 파도 소리가 발걸음에 박자를 맞춘다. 다행히 출항 전 미리 준비한 멀미 패치 덕분에, 파도의 출렁임에도 몸은 안정적이다. 대서양의 깊고 검은 물결은 늘 묘한 매력을 지닌다.


식사는 언제나 과하다. 정성스러운 서비스와 함께 끝없이 이어지는 스테이크, 해산물, 디저트의 유혹은 그야말로 감미로운 고통이다. 먹고 나면 어김없이 트랙으로 향하거나 피트니스 센터로 간다. 그렇게 어제는 배 안에서 18마일을 달렸다. 이틀 전 포르투갈 기항지에서는 16마일을 걸었다. 여행이라기보다 운동 캠프에 가까운 일정이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피로보다 활력이 먼저 온다. 달리고 나면 몸이 맑아지고, 바닷바람에 땀이 식으며 정신이 차분해진다. 규칙적인 운동과 요가는 이 크루즈 여행에서 가장 큰 수확이다. 특히 일몰 무렵 갑판 위에서 요가를 하며 바다 저편으로 사라지는 태양을 바라보는 순간은, 그 어떤 여행지의 절경보다도 고요하고 강렬하다.


배 안의 삶은 다양하고 역동적이다. 밤마다 열리는 쇼와 콘서트, 댄스 파티, 연주회는 화려하고 떠들썩하다. 반면 낮에는 조용히 도서관에 앉아 책을 읽거나, 체육관에서 러닝머신을 밟거나, 트랙을 뛰고 걷고, 요가 클래스를 듣는 이들도 많다. 이곳에서는 각자 자신만의 리듬으로 살아간다. 누구는 파티를 즐기고, 누구는 명상을 한다. 나는 후자 쪽이다. 바다의 끝없는 수평선을 바라보며 마음속 소음을 잠재우는 일은 묘하게 중독적이다.


식사 자리에서는 매번 새로운 사람들을 만난다. 대부분 은퇴한 사람들이다. 각자의 삶을 다정하게 들려준다. 어떤 이는 젊은 시절 아프리카에서 근무했던 이야기, 또 다른 이는 손주들과의 여행 이야기를 한다. 74번째 크루즈 여행이라는 노부부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놀라움보다 존경심이 먼저 들었다. 그들은 이미 여행이 생활이 되어 있었다. “이 배가 집이에요.” 남편이 웃으며 그렇게 말했을 때, 나는 잠시 말이 막혔다. 여행이 삶이 되고, 삶이 곧 여행이 되는 모습이었다. 언젠가 나도 그런 삶을 살고 싶다는 생각이 스쳤다.


배 안의 하루는 규칙적이면서도 단조롭지 않다. 아침에는 일출과 함께 달리고, 오전에는 커피 한 잔과 독일어 교재 한 권을 펼친다. 크루즈를 타기 직전 서점에서 사 온 그 책은 아직 절반도 넘기지 못했다. 책장을 넘길수록 문법이 복잡하게 느껴지고, 단어는 도망가듯 머리에서 사라진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것마저 즐겁다. 바다 위에서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 이 느린 속도는 지금의 내 삶과 닮아 있다.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고, 천천히 가도 충분하다.


요즘 미국 뉴스에서는 연방정부 셧다운 이야기가 이어진다. 결정이 지연되고 정치적 공방이 계속된다. 이어지는 한국과 독일 여행 일정에 영향을 줄지도 모르지만, 이제는 그리 조급하지 않다. 바다 위에서 보면 세상의 일들이 한결 작게 보인다. 파도는 언제나 자기 속도로 밀려오고, 바람은 그저 부는 대로 분다. 인간의 결정이란 결국 그 사이에서 일시적인 물결일 뿐이다.


오늘도 햇살이 좋다. 수영장 주변은 지중해의 태양 아래 여유를 즐기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비치타올을 깔고 누워 선탠을 하는 사람들, 핫터브에서 웃음소리를 터뜨리는 이들, 계속해서 먹고 마시며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 그들의 웃음소리와 밴드의 음악이 갑판 위로 퍼진다. 그런 풍경을 바라보며 트랙을 천천히 걸을 때면, 지금 이 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 새삼 느낀다. 바다는 변함없이 검고, 하늘은 여전히 푸르다. 어쩌면 인생의 여행도 이와 같을지 모른다. 어디로 가든, 어떤 날씨든, 자기 속도로 흘러가는 것. 오늘도 나는 그 속에서 걷고, 달리고,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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