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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리비안 크루즈의 아침 풍경

by 라온재


처음 크루즈를 탔을 땐 모든 것이 그저 그렇게 보였다. 배란 다 비슷하겠지, 식당도 운동시설도 어디나 비슷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하루하루 새로움의 연속이었고, 지중해를 지나 대서양을 건너 탬파에 도착할 즈음엔 이미 그 도파민의 파도에 충분히 길들여져 있었다. 이제는 마이애미로 이동해 새로운 배에 오를 시간. 3시 30분 이전 체크인을 위해 거의 이틀간 동선을 체크하며 머릿속 시뮬레이션을 반복했다.


아침 일찍 부페에서 간단히 식사를 마치고 준비를 끝냈다. 7시부터 하선이라 했지만, 6시가 조금 넘자 복도와 계단이 순식간에 인파로 뒤덮였다. 짐과 사람이 뒤엉킨 카오스 속에서, 백팩 하나만 멘 나는 재빠르게 틈을 비집고 나와 비교적 빨리 수속을 끝낼 수 있었다. 일요일 아침이라 도로 사정도 좋아, 템파에서 마이애미까지 I-75를 타고 부드럽게 미끄러지듯 달려 목적지에 도착했다.


이번 여행의 주인공은 올해 운항을 시작한 NCL 아쿠아. 멀리서 봤을 때부터 압도적이었다. 5성급 호텔을 세로로 길게 늘여 바다 위에 띄워놓은 느낌. 그동안 ‘크루즈는 어디나 비슷하다’고 믿었던 나의 안일함을 단숨에 깨버렸다. 매일 JW Marriott에 묵으며 먹고 자고 노는 기분이라면 정확할 것이다. 겨울 시즌이 시작된 카리비안의 활기가 이 거대한 배에 자연스럽게 스며 있었다.


18층 이상은 아이들을 위한 공간이다. 10~20대가 놀기엔 천국이겠지만, 은퇴를 바라보는 나 같은 사람에게는 보기만 해도 어지러울 정도로 역동적이다. 더 화려하고 더 자극적인 공간일수록 내 몸은 조용함을 찾는다. 그래서 나는 시끄러운 층을 피해 고요한 곳을 탐색하는 쪽을 선택했다.


17층 배의 맨 앞, 피트니스 센터는 이번 여행의 진짜 보물이었다. 트레드밀 위에서 지평선 너머로 빛이 번지는 모습을 보며 달릴 수 있다는 것. 스트레칭을 하고 결가부좌로 앉아 명상을 시작하면, 몸은 여전히 배 위에 있지만 마음은 조용히 바다 위를 떠다녔다. 아마 이번 여행의 베스트 스팟은 이곳으로 기억될 것이다. 지난 2주 동안 체중이 늘지 않은 건 오롯이 이 공간 덕분이다.


16층 라운지에서 독일어 책을 펼쳐 든다. 얼마나 배울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은 들지만, 이제는 잘해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시간을 좋아하기 때문에 읽는다. 책장을 넘기는 순간, 주변의 소음이 잦아들고 온전히 나에게만 집중되는 감각이 좋다.


크루즈의 가장 중요한 일과는 아마 태양에 몸을 맡기는 일일 것이다. 고급스러워 보이는 선베드마다 이미 사람들이 줄을 섰고, 좋은 자리를 차지하려는 조용한 전쟁이 일어난다. 먼저 찾아두지 않으면 금세 빈자리가 사라진다. 그 평화로움 뒤에 모두의 치열한 눈치싸움이 있다.


코로나 이후 위생은 예전보다 훨씬 엄격해졌다. 식당 입구에서는 손 씻기 또는 소독이 필수이고, 배식대 근처에서 직원들의 눈길이 늘 따라온다. 때로는 불편하지만, 이 많은 사람이 좁은 공간을 공유한다는 걸 생각하면 이해가 된다.


점심 시간이 다가오자 배 안은 금세 북적였다. 분명 어딘가엔 있을 법한 한국인은 아직 보이지 않는다. 이런 낯섦이 오히려 편안하게 느껴지는 것도 신기하다.


헤븐이라 불리는 구역은 전용 엘리베이터가 따로 있다. 스위트룸 손님들의 세계다. 식당도 수영장도 분리되어 있고, 문득 그곳에서 하루쯤 지내보면 어떤 기분일까 상상해본다. 아마 비행기 일등석을 타는 느낌과 비슷하지 않을까.


바다는 나를 데리고 또 다른 하루로 데려간다. 조금은 낯설고, 조금은 익숙한 채로. 이렇게 또 하나의 크루즈가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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