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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레이킹 배드〉, 악은 어떻게 시작되는가_2

도덕의 전복과 첫 폭력의 합리화

by 김굳이

!주의!
본 글은 《브레이킹 배드》뿐 아니라 본 시리즈와 스핀오프 시리즈가 구성하는 "앨버커키 유니버스" 세계관 모두를 다룹니다. 따라서《브레이킹 배드》,《베터 콜 사울》및 《엘 카미노》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을 수 있습니다.



Breaking bad fans will understand.. - 9GAG



“나는 더는 참지 않겠다.”


폭력은 어디에서 시작될까. 대부분의 사람은 스스로 폭력적인 성향이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상황이 바뀌면, 입장이 달라지면, 극단에 몰리면, 그 믿음은 놀라울 만큼 쉽게 흔들린다.


《브레이킹 배드》의 두 번째 악의 단계는 바로 그 지점을 다룬다. 도덕적 신념이 행동으로 전복되는 순간, 그리고 그 행위가 내부에서 정당화되는 순간. 월터 화이트는 바로 여기서 ‘선을 넘는다.’


1. “나는 피해자였다” — 정당화의 문장 만들기


월터는 크레이지 에이트를 죽이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그를 감금하고, 먹을 것을 주고, 대화를 시도한다. 심지어 그가 인간적으로 괜찮은 사람일 수도 있다고 믿으려 한다. 하지만 그는 결국 목을 조른다. 그 순간까지도 그는 고민한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Just a daily reminder that Walter Whites second ever kill was over a broken plate. : r/breakingbad

“그는 나를 죽일 수도 있었잖아.”


이 말은 단순한 상황 설명이 아니다. 폭력은 언제나 자기 정당화를 필요로 한다. 월터는 살인을 하고 나서도 “내가 먼저 한 게 아니다”라는 명분을 붙인다. 이것은 단순한 방어기제가 아니다. 이것은 자기 도덕을 재편하는 논리의 출발이다.



2. 첫 살인의 무게 — 배우 브라이언 크랜스턴의 증언

브라이언 크랜스턴은 이 장면을 촬영하며 이렇게 말했다.

“이 장면은 월터가 완전히 달라지는 지점입니다. 그는 처음엔 마치 살인을 피하려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이미 계산하고 있어요. 이 장면 이후, 그는 예전의 월터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 브라이언 크랜스턴, AMC 인터뷰 (Breaking Bad: Inside Episode 103 “...And the Bag's in the River”), 2008년 방송분 중


이 장면의 연기는 단순히 감정적 분노나 공포가 아니라, 내면의 타협이 이루어지는 과정을 묘사해야 했다고 그는 설명한다. 이는 드라마의 윤리적 긴장감과 완벽히 맞물린다. 살인을 실행하는 손보다 더 중요한 건, 그 손이 움직이도록 허락한 마음의 구조다.



3. 투코의 사무실에서 — 폭력의 위협을 감각하다

폭력은 한 번 정당화되면, 다음에는 덜 무겁다. 월터는 투코의 사무실에 들어가면서 처음으로 ‘폭력의 전략적 가치’를 체득한다. 그는 단순히 생존을 위해서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우위를 점하기 위해 폭력의 가능성을 꺼내든다.


이 장면에서 월터는 진짜 폭력을 행사하진 않는다. 그러나 폭력의 상징, 즉 폭약(수은 폭탄)을 이용해 상대를 제압한다. 그는 투코 앞에서 작은 유리병을 집어던지고, 그것이 폭발하면서 순식간에 상황의 주도권을 장악한다. 그 순간, 그는 자신이 무력한 피해자가 아니라 ‘통제할 수 있는 존재’라는 감각을 처음으로 체험한다.


"This... is not meth."


그 유명한 대사와 함께, 월터는 처음으로 하이젠버그라는 정체성을 선언한다.

빈스 길리건은 이 장면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

“이 장면은 월터가 하이젠버그가 되는 통과의례예요. 그는 이제 두려움보다 확신이 더 많은 인물이 되었죠.”

— 빈스 길리건, AMC Inside Breaking Bad Featurette, Season 1 Special (2008)

그 장면 이후, 월터는 공포와 죄책감이 아니라, 명백한 통제감과 쾌감을 느낀다. 이 감정은 이후 그의 모든 선택의 감각을 바꿔놓는다.


투코를 처리한 직후, 월터는 숨을 헐떡이면서도 흔들리지 않는다. 그는 공포와 죄책감이 아니라, 명백한 통제감을 느낀다. 이 통제감은 이후 그의 모든 선택의 감각을 바꿔놓는다.


4. 니체가 말한 ‘도덕의 전복’ — 피해자의 윤리에서 권력의 윤리로


니체는 『도덕의 계보』에서, 기존의 기독교 윤리를 ‘노예 도덕’이라고 불렀다. 즉, 약자가 강자에게 품은 분노가 ‘착함’이라는 가치로 탈바꿈된 것이라는 주장이다.


월터의 변화는 이 구조와 묘하게 닮아 있다. 그는 처음엔 약자의 자리에서 “왜 나는 이렇게까지 되어야 하지?”라고 묻는다. 하지만 그 분노는 곧 “나는 그보다 나은 사람이야”라는 판단으로 변형되고, 마침내는 **“내가 심판자가 될 수 있다”**는 자기 확신으로 진화한다.


이 전환이 중요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악은 타인을 향한 미움으로 시작되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이 약자였다는 기억으로부터 출발한다. 그리고 그것이 힘을 갖는 순간, 기존 도덕은 전복된다.


5. 시청자의 윤리, 무뎌지는 중


〈브레이킹 배드〉의 무서운 점은,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보는 우리 역시 공모자가 되어간다는 점이다. 우리는 월터가 투코를 날려버릴 때 통쾌함을 느낀다. 제시가 고통받을 때 월터가 손을 써주길 기대한다. 악은 점점 명확해지지만, 우리는 그 악을 명확히 비판하지 못하게 되는 상태로 미끄러진다.


그건 단순한 캐릭터 몰입의 문제가 아니다. 서사가 주는 자기정당화의 논리에 시청자조차 익숙해지는 것이다. 월터가 한때 피해자였기 때문에, 지금은 무슨 행동을 해도 괜찮다는 식의 감정적 합리화가 작동하기 시작한다. 이 점에서 우리는 앨버커키 유니버스의 또 다른 인물, 지미 맥길—사울 굿맨을 떠올릴 수 있다.


6. 사울 굿맨의 “나는 피해자가 아니다” — 진짜일까?

〈베터 콜 사울〉 시즌 1, 에피소드 5에서 지미는 본인에게 연방정부에서 독립하고자 하는 의뢰를 하는 백만장자에게 이렇게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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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가 피해자이기를 거부합니다.”


표면적으로는 고귀한 선언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말은 오히려 그가 진짜로 겪었던 고통과 수치, 억울함을 직면하지 않겠다는 말일 수도 있다. 그는 피해자이고 싶지 않았지만, 실은 이미 세상에 대해 분노하고 있었다.


피해자 서사를 거부하는 것은 강한 태도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것이 감정을 외면한 자기기만으로 작동하면, 그것은 오히려 자기 윤리를 무너뜨리는 출발점이 되기도 한다.


월터와 지미는 모두 자신이 “피해자가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 새로운 길을 선택한다. 하지만 그 길은 공존이나 회복이 아니라, 극단과 배제, 조작과 기만으로 가득 찬 서사였다.



7. “피해자가 아님”을 증명하고 싶은 마음은 어디서 오는가


월터 화이트도, 지미 맥길도, 스스로를 피해자로 보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그 말은 종종 ‘억울함을 외면하겠다’는 말과 동의어가 된다.


우리가 “나는 피해자가 아니다”라고 말하고 싶어질 때, 그 이면엔 어떤 감정이 있을까? 그것은 때로 자신이 약자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자존심이거나, 억울함에 머무르기 싫다는 조급함일 수 있다.

그렇기에 이 말은 아주 위험한 전환점이 된다.

“나는 피해자가 아니다.” → “나는 나의 방식으로 증명해야 한다.” → “나는 이제 누구에게도 설명하지 않는다.” → “나는 내 규칙대로 살겠다.”


이 흐름은 놀랍도록 월터와 사울의 변화 과정과 일치한다. 피해자임을 거부한 자들이 결국 타인을 짓밟는 이유는, 자기 정당화의 서사를 멈출 수 없기 때문이다.



8. 대부분은 피해자 서사에 빠지지만, 월터와 사울은 그것조차 거부했다


대부분의 사람은 고통을 겪으면 피해자 서사에 머문다. ‘나는 억울했다’, ‘이건 내 잘못이 아니다’, ‘누군가 나에게 이걸 했다’는 말은 인간적으로 자연스럽고 심리적으로도 방어적인 반응이다.


자기연민은 달콤하며 중독적이다.

그러나 월터와 사울은 특이한 경우다. 그들은 이 흔한 패턴을 거부했다. 자신이 피해자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순간, 자신의 자존심이 무너질 것처럼 느낀 사람들이다.


그래서 월터는 도움을 거부했고, 사울은 조롱을 유머로 승화시키며 외면했고, 둘 다 결국 “나는 내 방식으로 증명하겠다”는 방식으로 전혀 다른 폭력성의 길을 택한다.


즉, 피해자 서사에 빠지는 것도 함정이지만, 그 서사를 억지로 부정하려는 이들에겐 또 다른 함정이 있다. 그건 “감정을 직면하지 못한 자가 만들 수 있는 가장 비윤리적인 해답”일 수 있다.



9. 월터 화이트의 부정된 상처 — ‘나는 뺏겼다’는 말조차 하지 못한 사람


월터는 단지 교사로서 경제적으로 실패한 인물이 아니다. 그는 명백히 상처받은 사람이다.

자신이 공동창업한 회사의 언론기사를 보는 월터의 뒷모습 Image: Breaking Bad. © AMC / Sony Pictures Television.

그레이 매터라는 회사를 함께 창업하고도 중간에 빠져나와야 했고, 그 회사는 전 연인과 친구가 이어받아 대성공을 거뒀다. 그레첸과 엘리엇은 여전히 부유하고 교양 있는 부부로 살아가지만, 월터는 매일 세차장에서 손님에게 모욕을 견디며 생계를 잇는다.


이건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불공정한 상실’이다. 그는 정말 피해자다.


그런데 그는 한 번도 “나는 억울하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레첸과 엘리엇이 그의 병원비를 돕겠다고 했을 때도, 그는 격렬하게 거부한다. 그건 단순한 자존심이 아니다. 그것은 “나는 실패자가 아니다”라는 스스로에게조차 강요하는 태도다.


이 감정은 시간이 흐르면서 증오로 바뀐다. 그가 마약 사업을 키우며 “I’m in the empire business.”라고 말할 때, 우리는 그 서사 속에 ‘나는 더 이상 아무에게도 의존하지 않겠다’는 고통의 반동을 읽을 수 있다.


이건 단지 성공 욕구가 아니다. 이것은 자기 서사의 복원이다. 그는 피해자로 살아가기보다는, 도덕 바깥에서라도 지배자로 증명되기를 택한 사람이다. 그리고 이 선택은, 그를 파멸로 이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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