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의 대상화
!주의!
본 글은 《브레이킹 배드》뿐 아니라 본 시리즈와 스핀오프 시리즈가 구성하는 "앨버커키 유니버스" 세계관 모두를 다룹니다. 따라서《브레이킹 배드》,《베터 콜 사울》및 《엘 카미노》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을 수 있습니다.
“악은 그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악은 설명되고, 이해되고, 심지어는 지지된다.”
— 빈스 길리건 (제작자 인터뷰, 2011년 《Breaking Bad》 시즌4 방영 직후)
"하이젠버그"라는 이름은 단지 가면이 아니다. 그것은 월터 화이트가 자신을 지켜내기 위해, 아니 자신이 되고자 선택한 하나의 자아이다. 그 자아가 현실로 자리 잡기 시작하는 가장 결정적인 지점은 타인을 더 이상 '사람'으로 대하지 않을 때부터다.
이 편에서는 그 분기점을 다루고자 한다. 월터가 타인을 어떻게 대상화하고, 그것을 통해 어떻게 죄책감 없이 인간을 '배치'하고 '설계'하게 되는지를 살펴본다.
초기 월터는 여전히 흔들리는 인물이었다. 제시에게 거칠게 말하면서도 속으로는 미안함을 느꼈고, 가족에게 숨기며 불편해했다. 하지만 시즌 2 후반을 지나면서 그의 내면에서는 '윤리적 감각의 감쇠'가 본격화된다.
그 첫 단적인 예는 제인의 죽음이다. 질식해가는 그녀를 바로 옆에서 목격하면서도, 그는 팔을 뻗지 않는다. 그녀가 살아나면 제시가 자신을 떠날 것이고, 그녀가 죽는다면 제시는 다시 자신의 영향권 안으로 돌아올 것이다.
인간의 목숨이 이해관계 속에서 하나의 조건으로 환원되는 순간이었다. 그는 여전히 눈물을 흘리지만, 그것은 행동이 아니라 감상의 차원에 머물러 있다.
"그 장면은 시청자에게 충격을 줘야 했습니다. 월터가 어떤 선택을 했는지 생각하게 하려고요."
— 빈스 길리건 (DVD 코멘터리, 시즌2)
이후 그는 제시를 위로하고 다시 끌어안는다. 제시가 슬픔에 무너질 때, 월터는 그의 어깨를 다독이며 말한다. “괜찮아, 네 탓이 아니야.” 이것은 정말 위로였을까? 아니면, 자신이 만든 죽음을 더욱 은폐하고 조종하려는 또 하나의 대상화였을까?
그리고 시즌3의 마지막, 그는 더욱 명확하게 윤리의 경계를 넘는다. 자신과 제시가 거스에게 제거당할 위기에 처하자, 월터는 제시에게 전화를 걸어 말한다.
"누군가가 죽어야 해. 우리가 살기 위해서야."
그는 제시에게 게일을 죽이라고 명령한다. 게일은 정중하고, 예의 바르고, 월터에게 존경을 보내는 인물이었다. 그는 '적'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가 살아 있는 한, 월터는 필요 없는 존재가 된다. 그렇기에 게일은 죽어야만 했다.
이 장면은 단순한 살인이 아니다. 월터는 손에 피를 묻히지 않지만, 그보다 더 깊은 방식으로 살인을 지시한다. 그는 타인의 생명을, 그리고 제시의 손을 철저히 계산에 따라 움직인다. 죄책감은 고려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이것이 합리적인 선택임을 강조한다.
“게일을 제거해야 거스가 우릴 놔둘 거야. 이건 필요해.”
게일은 한 명의 인간이 아니라, 체스판의 말처럼 '교체 가능한 기술자'가 된다. 그리고 제시는 도구가 된다. 월터는 상황을 설계하고, 타인의 행동을 배치한다. 이때 타자는 인간이라기보다, 반응을 예측 가능한 변수에 가깝다. 대상화의 끝은 바로 이 설계자의 포지션이다.
이후로도 월터는 점점 더 공감 없는 언어를 구사한다. 그는 가족에게 “내가 한 일은 가족을 위한 거야”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 말은 애정의 표현이 아니라, 책임을 미화하는 구실이다. 감정을 말하는 듯하지만, 실상은 전략이다.
그는 스카일러와의 대화에서도 점점 더 협박과 명령의 방식으로 흘러간다. 마치 모든 인간관계가 '거래'로 수렴되는 듯한 화법이다. 대표적인 장면은 시즌2 중반, 월터가 사라진 돈의 출처를 의심하는 스카일러에게 '나에게 그냥 조금만 믿음을 가져달라'고 말하며, 설명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고수하는 장면이다.
여기서 그는 감정적 호소와 무언의 권위를 결합해 상대의 사고를 제어하려 한다. 또한, 출산을 앞둔 스카일러가 범죄적 수입을 거부하려 하자 "가족을 위해서야"라는 말을 반복하며, 자신의 도덕 판단을 보편적 윤리인 양 포장한다. 이처럼 월터는 자신이 옳다는 전제를 밀어붙이며 상대방을 '설득'이 아닌 '제압'의 대상으로 전환시킨다.
"I'm not in danger, Skyler. I am the danger." — “나는 위험한 사람이 아니야, 스카일러. 내가 바로 '위험'이야.”
이 유명한 대사는 시즌4 중반 이후, 월터가 이미 극단적인 인물로 진화한 상태에서 등장하지만, 그가 자신을 설계자이자 위협의 존재로 포지셔닝하는 방식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상대가 느끼는 감정을 지배하려 하며, 스스로 권력적 이미지로 포지셔닝한다. 대상화는 말투와 언어 선택 속에서 가장 먼저 드러난다. 상대를 '설득해야 할 대상'으로 보지 않고 '설계 가능한 조각'으로 보는 데서 시작하는 것이다.
월터는 자신을 컨트롤러로 인식하기 시작한다. 그는 계획을 짜고, 변수를 분석하고, 타인의 반응을 예측하며, 그에 따라 사건을 '디자인'한다. 그는 이제 마약 제조자가 아니라 사회적 게임의 플래너다. 제시가 어떻게 반응할지를 계산하고, 스카일러가 언제 이탈할지를 예측한다.
예를 들어, 행크가 자신을 쫓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그는 가짜 911신고 전화를 하도록 유도해 시간을 벌고 탈출한다. 이 장면은 단순한 생존기술이 아니라, 월터가 타인의 감정과 시스템의 반응을 계산하여 '상대의 사고를 설계'하는 수준에 도달했음을 보여준다. 그는 행크의 도덕성, 시스템의 대응 속도, 경찰 무전의 반응 시나리오까지 예상한 후 치밀하게 행동을 배치한다.
그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편집'한다. 불편한 사실은 뺀다. 위협은 감춘다. 그는 이제 마약 제조자가 아니라 사회적 게임의 플래너다.
놀랍게도, 우리는 이 과정을 따라가며 점점 더 월터를 '이해'하게 된다. 제인이 죽는 장면에서 우리는 충격을 받지만, 동시에 “그래도 어쩔 수 없었잖아…”라고 말하게 된다. 게일이 총에 맞을 때, 우리는 불편함을 느끼지만, 그것이 '생존'을 위한 선택이었기에 이해할 수 있다고 여긴다.
“우리는 월터를 미워하길 주저하게 됩니다. 그가 악하다는 것을 알지만, 동시에 그 악이 어디서 왔는지 알기 때문이죠.”
— 빈스 길리건 (New York Times 인터뷰, 2012)
한나 아렌트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악이 어떤 초인적 악의지가 아니라 “생각하지 않음”에서 비롯된다고 말한다. 타인을 '그저 실행에 필요한 변수'로 간주할 때, 우리는 죄의식 없이 악행에 가담할 수 있게 된다.
스피노자 또한 인간은 자기보존을 위한 정동(affect)에 의해 움직인다고 말한다. 월터의 대상화는 결국 자기 생존을 위한 정동이 만든 합리성의 극단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합리성은 타인의 고통을 배제한, 즉 '감정 없는 계산'이기에 악으로 기운다.
월터의 대상화 전략은 비단 드라마 속 이야기만은 아니다. 우리는 일상에서도 누군가를 '사람'이 아니라 '기능'이나 '역할'로 보는 순간을 자주 경험한다. 고객센터 상담원이 충분히 사과하지 않는다고 화를 내거나, 배달원이 늦었다고 과도하게 불쾌해할 때, 우리는 그들을 하나의 '감정 있는 존재'로 보기보다 '내 요구를 처리해야 하는 시스템의 부속'으로 인식하곤 한다.
현대 사회는 속도와 효율을 강조하며 타인을 쉽게 대상화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다. 문제는 그 구조가 너무 일상적이어서, 우리가 그런 인식을 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자각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악은 특별한 인물이 아닌, 일상의 사소한 판단 속에서 자라난다. 우리가 누군가를 변수로 보기 시작할 때, 그 순간부터 이미 대상화가 시작되고 있을지도 모른다.
타자의 대상화는 악의 시작이 아니다. 그것은 악의 진화다. 이 단계에서 타자는 더 이상 공감의 대상이 아니다. 그들은 제거될 수 있고, 조종될 수 있고, 심지어 '사라져도 되는 존재'가 된다. 이 순간, 인간의 생명은 윤리적 고려가 아니라 전략적 설계의 대상이 된다.
월터 화이트는 그 진화를 스스로 체현한 인물이다. 그는 단지 나쁜 선택을 한 것이 아니다. 그는 타인의 감정을 제거하고, 그것을 대체 가능한 부품으로 환원시켰다. 그리고 우리는 그 과정을 지켜보며 그를 '이해하게' 되었다. 악은 그렇게 진화했고, 우리는 그 진화를 따라갔다.
악은 거창하지 않다. 그것은, 누군가를 변수로 보기 시작할 때 이미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