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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건물이야 도대체?

절제의 미학이 만든 일본 도시 풍경 읽기

by KOSAKA

일본의 도시를 거닐다 보면, 낯선 듯 낯익은 풍경 하나가 눈에 띈다. 대도시의 고층 빌딩이든, 소도시의 상점가든, 정작 ‘무슨 건물’인지 알 수 있는 큰 간판이 건물 외벽에 붙어 있지 않다는 점이다. 대신 입구 옆에 놓인 작은 디렉토리판이나, 로비에 부착된 안내도가 전부인 경우가 많다. 한국처럼 1층 가게마다 현란한 네온사인과 대형 간판이 빼곡히 붙어 있는 모습과는 상반된 풍경이다. 사람들은 이를 두고 “법 때문인가, 문화 때문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실제로 이같은 현상은 단순히 한쪽 원인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 법적 규제와 문화적 미감, 그리고 역사적 배경이 복합적으로 얽힌 결과물이다.


우선 일본의 ‘옥외광고물법은 간판·현수막·전광판 등의 크기와 설치 위치, 조명과 색채에 대한 엄격한 기준을 정해 놓았다. 1949년 제정된 이래, 2004년 경관법의 도입으로 더욱 강도 높은 규제가 추가되었다. 지방자치단체들은 자체 경관 조례를 통해 도시의 미관을 보호하려 하고, 지정된 경관구역 내에서는 형형색색의 간판 사용을 제한받는다. 또한 ‘건축기준법에서는 높이 4미터 이상의 광고물을 “구조물”로 간주해, 설계 단계에서부터 허가를 받아야 하며, 불연(不燃) 재료를 사용하도록 의무화한다. 이 과정에서 각종 서류 작업과 비용 부담이 커지다 보니, 대형 간판을 과감히 설치하기가 쉽지 않다.

빼곡한 건물들. 무슨 건물들인지 외형상으로는 알기 힘들다.

그러나 단순히 규제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부분이 분명히 존재한다. 일본 사회 전반에는 ‘조화와 절제를 중시하는 미의식이 깊이 자리 잡고 있다. 거대한 빌딩 숲 속에서도 주변 환경과 어우러지는 색채와 디자인을 고집하며, ‘작은 점 하나가 전체를 해치지 않아야 한다’는 가치관이 뿌리 깊다. 이러한 심미적 관점은 광고와 상업성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기보다, 건물 자체의 외관 디자인이나 입구 디렉토리판만으로도 충분히 정보를 전달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이어진다.


역사적 흐름 또한 중요한 요소다. 1923년 관동대지진 이후 방화·내진을 고려한 도시 재건 과정에서, 일본의 건축 양식은 목조에서 모르타르·콘크리트 외벽으로 급격히 전환되었다. 본래 건물 외벽에 ‘看板建築(간판건축)’이라는 화려한 장식양식을 더하던 시대가 있었으나, 방재 기준 강화와 도시 정비 계획은 이를 대부분 소멸시켰다. 대신 1층 로비나 현관 앞에 설치된 작고 단정한 안내판이, 과거 간판이 담당하던 역할을 대신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배경 속에서 현대 일본의 대표적인 오피스 빌딩을 살펴보면, 흔히 건물 꼭대기에는 기업 로고나 건물명이 작게 새겨져 있을 뿐이다. 입주사 로고 대신 건물 관리회사의 이름이 더 눈에 띌 때도 많다. 1층에 이르면 한눈에 들어오는 건물명판과 함께, 각 층별 테넌트(입주자) 정보가 디렉토리판에 깔끔히 정리되어 있다. 이는 건물 전체를 ‘공유된 공간’으로 인식하는 일본식 집합건축 문화와도 맞닿아 있다.


반면, 한국의 경우 상업지구를 중심으로 ‘간판 전쟁’이라 부를 만큼 각종 간판이 치열하게 경쟁하며 소비자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이는 비교적 완화된 광고 규제와, 개인 점포가 저마다 눈에 띄려는 마케팅 전략이 합해진 결과다. 대조적으로 일본에서는 광고 규제가 완화된 지역마저도 자체적으로 절제된 디자인 가이드라인을 적용하는 경우가 많아, ‘과도한 간판’이란 개념 자체가 문화적으로 용납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법과 문화, 역사 중 어느 요소가 더 결정적 역할을 했을까? 사실 어느 하나를 떼어 놓고 이야기할 수 없다. 일본의 옥외광고물법과 경관 조례가 없었다면, 보다 자유로운 광고물이 등장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위에 ‘조화’와 ‘절제’를 숭상하는 문화가 자리 잡지 않았다면, 법적 규제만으로는 도시 미관을 지금과 같은 수준으로 유지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반대로, 강력한 문화적 미감이 뒷받침되지 않았다면, 법적 제재를 느슨하게 적용하는 일부 지역에서라도 간판 경쟁이 과열될 가능성이 높았다. 결국 일본의 외벽 무간판 풍경은 법과 문화가 상호보완적으로 작동한 결과물이다.


오늘날의 일본 건축 풍경을 돌아보면, 건물 외벽은 그 자체로 완결된 ‘디자인 캔버스’ 역할을 한다. 건물주나 입주 기업은 꼭대기 로고나 1층 안내판으로만 브랜드를 드러내고, 나머지 외벽면은 최소한의 장식으로만 남긴다. 그 결과, 도시의 스카이라인은 간판 대신 건축물 고유의 실루엣과 색채로 채워진다. 이것이 바로 일본이 선택한 ‘절제의 미학’이자, 법과 문화가 빚어낸 독창적인 도시 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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